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122화 (122/628)

제122화

유적에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도 늦었고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도 난리통에 모두 도망갔을 것이다. 지크와 라일라는 유적에서 나왔다.

‘그리운 광경이군.’

도시 이곳저곳에서 피어나는 불꽃을 보고 지크는 감회에 잠겼다.

마왕으로 살았을 적에는 일상처럼 보던 풍경이다. 그러나 회귀 후에는 능력도 없고 나름 얌전하게(?) 살면서 이 정도 규모의 전투를 볼 기회가 없었다.

‘포르티, 오스프린에서는 고작해야 영주성 내외에서 싸운 게 전부고 스울에서는 아예 도시 바깥에서 싸웠으니까.’

이렇게 도시 전체를 휘말리게 하는 전투는 회귀 후 처음이었다.

“아…!”

라일라가 화광이 치솟는 곳을 멍하니 쳐다본다.

지크가 충고를 해서 죄책감에서 조금은 벗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전장의 참상이 바로 눈에 들어오니 다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이제부터는 본인이 알아서 감당해야지.’

무슨 부모도 아니고 더 이상 참견하긴 그랬다.

당장 자살하겠다고 난리를 칠 것 같지는 않으니 지크는 일단 방관하기로 했다.

‘주력은 몬스터들이로군.’

기척 탐지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 멀리서 몬스터의 포악한 울음소리가 연신 들렸다.

‘어디부터 갈까?’

상황을 보니 도시에 있는 세 개의 성문에 적들이 모두 들이친 것 같았다.

하지만 지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정면으로 가자.’

그쪽에 한스와 스녹이 있다. 그리고 꽤 많은 기척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는 거기가 주력인 것 같았다.

‘아, 물론….’

지크의 눈이 한쪽을 향했다.

‘먼저 온 놈들부터 조진 후에!’

지크와 라일라 주변으로 어두운 그림자들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이놈들은 옷차림의 변화가 없냐.’

이제는 신물까지 나는 로브를 보며 지크가 침을 탁 뱉었다.

하지만 불만 많은 지크는 그들의 관심 대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적들의 시선은 전부 라일라에게 쏠려 있었다.

‘정말로 라일라 하나를 잡기 위해 이 사달을 낸 건가?’

놈들의 반응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라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지크처럼 눈앞의 참상을 그저 ‘그립네’ 정도로 퉁 쳐버릴 수 없었다. 절로 이가 갈렸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적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잡아라. 사지를 잘라내도 되지만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

우두머리의 명령에 적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한 치의 틈도 없는 그 박력에 지크가 휘파람을 불었다.

물론 지크에게 있어 그것은 겉보기만 요란한 멋있는 쇼에 불과했다.

휘파람 소리를 들었는지 우두머리가 지크를 힐끔 쳐다본다. 하지만 그 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같이 있는 놈은 죽여라.”

지크에 대한 관심은 그 말이 전부였다.

적들이 지크와 라일라를 향해 검을 겨눴다.

라일라도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지크의 손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뭐야?”

“내가 맡을 테니까 넌 빠져.”

“백마 탄 왕자님 기분이라도 낼 생각이야? 이건 내 일이기도 해. 같잖은 친절은 사양하겠어.”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친절이 아니다. 그냥 네가 방해일 뿐이야.”

“뭐?”

“딱 적당하게 기분 고양됐는데 괜히 초치지 말라고.”

라일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투나 행동을 보니 라일라 자신을 위해 말을 돌려 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눈은 정말로 방해 덩어리를 보는 것이었다.

지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적의 수는 대략 스물.

‘식전 운동 정도는 되려나.’

로브를 입은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일라의 마법을 견제하기 위함인 듯 그들은 사방으로 퍼졌다. 그리고 지크를 빙 돌아 라일라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크에게도 일단의 적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라일라는 마법을 준비했다. 아무리 지크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그가 얻은 ‘나뭇가지 같은 검’이 심상치 않아 보이지만 그것만 달랑 믿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적들이 미웠다.

하지만 지크는 라일라의 행동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뭇가지 같은 검’을 들어 올렸다.

전면으로 달려드는 적들이 검을 들어 올려 대비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크가 히죽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걸로 끝이었다.

쿠웅!

육중한 무언가가 떨어진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땅이 깊게 파였다. 공기가 진동했다.

그리고 지크에게 달려들던 자들이 사라졌다.

“뭣…!”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우두머리의 입에서 경악성이 비집고 나왔다.

라일라에게 달려들던 적들이 멈췄다. 라일라도 정신이 흐트러져 마법이 무효화됐다.

지크에게 달려들던 적들이 말 그대로 사라진 상황에 그들의 생각이 일순간 멈췄다.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건 지크 한 명뿐. 나머지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크, 이거지!”

짜릿함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지크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골치 아픈 계략 따윈 필요도 없고, 적이 무슨 수로 나오든 상관도 않는 절대적인 힘.

그것이야말로 ‘힘의 마왕’ 지크 모어의 상징이었다.

‘아, 요 근래 너무 잔머리만 굴려댔더니 머리가 삐걱거렸단 말야. 정말로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을 한다니까.’

하지만 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지크는 이번 공격에 뭔가 대단한 기술을 쓴 게 아니다. 그저 마력을 가득 담아 뿌렸을 뿐이다.

물론 나름의 컨트롤을 하긴 했지만 그건 지크에게 있어서 컨트롤이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그에게 덤벼드는 날파리들을 피 한 방울, 육편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일소할 수 있었다.

‘이번 한 번만 쓸 수밖에 없는 게 유감이야.’

하지만 그렇기에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 그리고 전장이란 환경은, 힘을 즐기기에 더없는 곳이다.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더욱.

“그….”

우두머리가 간신히 입을 뗐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른다. 하지만 적들은 우두머리를 포함해 여전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허수아비야? 왜들 그러고 있어. 날 죽인다고 하지 않았냐?”

“…넌 뭐냐.”

우두머리가 간신히 내뱉은 말이다. 곧 죽을 놈이랍시고 전혀 상대하지 않던 방금과는 전혀 다른 대응.

“그럼 너희들은 뭔데 잘 살고 있는 도시에서 분탕질 중이냐?”

“저 여자와 무슨…!”

퍼엉!

폭발 소리가 들리고 피와 육편이 쫙 흩어졌다.

터져버린 적 근처에 있던 자들이 피와 살점을 뒤집어쓰고 후다닥 물러났다.

지크는 내지른 주먹을 그대로 둔 채 우두머리를 향해 말했다.

“누구한테 신호를 보내려고?”

적 하나가 우두머리의 신호를 받고 무언가 신호탄 같은 것을 꺼내는 걸 보고 지크가 가볍게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결과는 잔혹한 폭살이었다.

“괜한 짓 하지 마. 서두르지 않아도 내가 찾아갈 거니까. 어차피 오래 끌 싸움도 아니고.”

지금은 적이 도시 안까지 진입한 상황. 민간인 희생자가 나올 확률이 무척이나 크다.

착하게 살려고 하는 지크로선 두고 보면 안 되는 일이었다. 때문에 지크는 이번엔 별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지크가 다시 ‘나뭇가지 같은 검’을 들어 올린다.

“피해!”

우두머리가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 두 번의 공격. 그는 지크가 대체 무슨 수로 자신의 부하들을 소멸시키고 터뜨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방법이 유려한 기술일 수도 훌륭한 장비일 수도, 아니면 고유한 능력일 수도 있다. 그걸 알지 못하는 한 자신들이 불리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건 모두 틀린 것이었다. 아니, 단 하나만 맞았다.

지크의 공격은 무척 단순했다. 그저 빠르고 강했을 뿐.

기술도 장비도 능력도 아니었다. 다만, 로브를 입은 자들이 불리하단 것만은 사실이었다.

후웅!

사방으로 도망가는 자들을 향해 지크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퍼억!

허공에서 여러 파열음이 화음을 맞추듯 동시에 울렸다. 짧고 강한 소리였다.

그리고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사람이 땅바닥에 착지하는 소리도, 다급하게 뜀박질하는 소리도, 고통에 내지르는 비명 소리도.

심지어 자잘하게 박살난 무언가들이 떨어지는 소리조차도.

지크는 몸을 돌렸다. 눈을 부릅뜬 채 경악하고 있는 라일라가 보였다.

“가자.”

지크는 지금 가장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전장을 턱으로 가리켰다.

* * *

한스와 스녹은 잘 버티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무척이나 활약하고 있었다.

기사와 병사들을 억누르는 로브를 입은 자들을 그들은 상당수 쓰러뜨린 것이다. 특히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휘두르며 로브를 입은 자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거칠 것 없어보이던 그의 빛의 검도 계속 전장을 휩쓸지는 못했다.

카앙!

“뭐!”

에스텔레이드가 막혔다. 한스는 당황했다.

맞댄 검으로부터 거대한 힘이 느껴진다. 에스텔레이드를 뽑은 후 이렇게 정면에서 힘으로 밀리는 건 처음이었다.

한스는 자신과 검을 맞대고 있는 자를 확인했다.

그는 스녹이 성문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돌벽을 부수고 몬스터들을 끌어들인 바로 그 자였다.

로브 속 시선이 한스를 한 번 쳐다보고는 에스텔레이드로 옮겨 간다.

“에스텔레이드.”

그는 에스텔레이드를 아는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 한스를 쳐다봤다.

“왜 네가 갖고 있지?”

“무슨 상관…이야…!”

텅!

한스가 힘으로 에스텔레이드를 밀어붙이자 그가 뒤로 뛰었다.

하지만 스스로 물러났을 뿐, 한스에게 밀려났다는 느낌은 없었다.

“네놈이 갖고 있을 물건이 아니다.”

“그렇게 쳐부러우면 미리 갖고 가든가. 주인 없는 거 먼저 주우면 그만이지 네 것 내 것을 따지고 앉았어, 등신이!”

한스는 지크가 회귀한 후, 지크와 가장 오래 인연을 맺은 자다. 그리고 지크에게 온갖 교육을 받았다.

물론 지크는 영웅이 되고 싶다는 그의 꿈을 인정하고 그에 관련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지만, 그 와중에 지크의 더러운 성격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평소 지크의 옆에만 있느라 잘 티가 나지 않을 뿐이지 한스도 이미 만만치 않게 입이 걸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시비를 걸면 바로 맞받아치라는 것이 지크의 가르침이지 않던가. 더욱이 상대는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적이다.

“너같이 칙칙한 옷이나 쳐입는 놈은 에스텔레이드에 가당치도 않으니까 더러운 눈깔이나 닫고 저리 꺼져!”

“이것 참 새롭군.”

한스의 온갖 욕설에도 오히려 그는 웃었다.

“나한테 이렇게 욕설을 하는 놈이 얼마만이지.”

“욕으로 기뻐하는 변태였냐?”

“그건 아니야. 오히려 지금 상당히 열이 받았어. 마침 네가 들고 있는 건 너에게 과분한 물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적이다.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군.”

그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너, 이름은?”

“알아서 뭐 하게.”

“에스텔레이드의 주인으로 선택받을 수 있었던 자의 이름이 궁금할 뿐이야. 참고로 내 이름은 이몰르다.”

그러나 한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흠, 대답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몰르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제압한 다음에 힘으로 알아낼 수밖에.”

섬뜩!

한스의 등허리에 소름이 쭈뼛 섰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한스가 있던 자리로 무언가가 훑고 지나갔다.

후웅! 후웅!

보이지 않는 무언가는 마치 눈앞에서 한스를 놓친 게 안타깝다는 듯 날카로운 비명을 울렸다.

콰드드득!

한스가 서 있던 지면이 난도질당했다.

마치 무른 진흙에 조각칼을 이리저리 그어 놓은 것 같다.

한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이몰르를 쳐다봤다.

“자, 에스텔레이드의 주인이여. 자네는 얼마나 난도질을 당해야 그 고귀한 이름을 말해주실까?”

이몰르의 로브 속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