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전장의 시간이 마치 정지된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느끼는 건 인간 측뿐이었다. 그 강한 기사들이 마치 쓰레기같이 토막나는 광경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다.
‘저 자는…!’
한스는 눈을 부릅떴다.
아는 자는 아니다. 아니, 애초에 지금 성문으로 들어온 자는 로브를 깊게 눌러써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옷차림으로 예상되는 자들은 있었다.
‘사람을 타락시키는 자들! 그리고 고대 유적에서 본 자들!’
지크가 대놓고 노리고 있는, 따지자면 자신들의 적.
아닐지도 모른다. 로브라는 것은 정체를 숨기려 하는 자들이 흔하게 입는 옷인 만큼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스는 지금 들어 온 자가, 그 조직에 속해있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고대 유적에서 들었던 저주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이게 도시에 찾아온다는 악몽이었던 건가?’
로브를 입은 자가 성문 앞에 버티고 섰다.
쿠어어어어!
크아아아아!
그의 양 옆으로 몬스터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몬스터들은 로브를 입은 자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침략군의 장군처럼 팔짱을 끼고 몬스터들이 진군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런, 젠장!”
“막아!”
몇몇의 기사들이 더 성문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도 로브를 입은 자의 공격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실력을 본다면 깔끔하게 목만 벨 수 있을 것 같건만, 로브를 입은 자는 절대로 자신의 적을 깔끔하게 죽이지 않았다.
기사들이 주춤거렸다. 로브를 입은 자의 고강한 실력 탓에 기가 죽은 것이다.
그들을 몬스터가 덮쳤다.
기사들은 확실히 몬스터보다 강했다.
해일처럼 몰아닥친 몬스터들을 상대로 대부분이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많았다.
“한 명씩 있지 마! 모여서 벽을 만들어라!”
기사 단장이 소리치자 기사들과 병사들이 급히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때에 움직이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아악!”
“살려 줘!”
몬스터 무리에 둘러싸인 병사들이 가장 먼저 죽었다. 다음은 기사들이었다.
병사들보다 오래 버티긴 했지만 사방에서 덤벼오는 몬스터들은 죽여도 죽여도 충원됐다.
“크악!”
“아악!”
등 뒤에서 얻어맞고 사선에서 찔러 오는 몬스터의 공격에 기사들도 하나하나 죽임을 당했다.
“버텨라! 진형을 짜고 버티다 보면 기회가 온다! 우리 뒤에 시민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기사 단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떻게든 여기서 몬스터들을 더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러나 그의 필사적인 외침도 저 멀리서 보이는 화광에 빛이 바랬다.
화르르륵!
불길이 두 군데에서 더 솟구쳤다.
사람들이 경악했다. 불꽃이 솟아오른 곳은 비올루윈의 다른 성문이 있는 곳이었다.
‘적이 더 있어!’
한스가 이를 악물었다.
“선배!”
스녹이 한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저 멀리 새로 불길이 치솟은 곳을 향해 있었다.
“저, 저거…!”
“그래. 적이 더 있던 모양이야.”
“그럼 큰일이잖아요!”
한스가 전장을 훑어봤다. 기사들이고 병사들이고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후방이 걱정되는 것일까. 사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은 것이 보였다. 쓰러지는 병사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기사들이 희생되는 숫자도 상당했다.
나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탓! 탓! 탓!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성문부터 이어진 그 소리는 정확하게 비올루윈 병력과 몬스터들이 전투를 벌이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발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비올루윈의 응원 병력은 더더욱 아니었다.
‘…저건!’
성문을 장악한 자와 똑같이 로브를 입고 있는 자들을 보고 한스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새로운 적이다! 조심…아악!”
“로브를 입은 놈들을 조심해라! 보통 실력이 아니다!”
기사들이 악을 썼다.
몬스터들의 숫자가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나마 전선이 밀리지 않던 이유는 기사들이 몬스터들보다 실력이 더 높아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나타난 로브를 입은 자들은 그 균형을 무너뜨리는데 아주 큰 기여를 했다.
대부분은 기사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했고 몇몇은 기사들보다 훨씬 더 강한 무력을 보였다.
비올루윈이 전방에 있는 도시가 아니라 기사나 병사의 질이 조금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부유한 도시인만큼 어느 정도 수준은 갖추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로브를 입은 자들의 실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전선은 연신 밀렸다. 조금만 있으면 전선이 붕괴될 것 같았다.
“스녹!”
“네, 선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몬스터들을 학살하고 있던 한스와 스녹이 전선으로 달려갔다.
로브를 입은 자 한 명이 한 기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양 옆에서 가해지는 몬스터의 공격에 기사의 손이 어지러워졌다.
그 순간 로브를 입은 자가 기사의 검을 쳐 날렸다. 기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몬스터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기사의 몸이 몬스터에게 이리저리 찢겨 먹힐 거라 생각될 때였다.
번쩍!
빛이 번뜩였다. 달려들던 몬스터의 몸이 두 조각 났다. 달려들던 기세 때문에 몬스터들의 몸이 따로따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어?”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던 기사가 멍청한 소리를 낸다.
턱!
그의 앞에 누군가 내려앉았다. 성스러운 새하얀 검신을 든 사내는 마치 하늘에서 구원을 위해 내려보낸 사자와도 같이 보였다.
“괜찮습니까?”
한스가 묻자 기사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어서 일어나…!”
카아앙!
한스가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검에 실리는 무게가 상당하다. 기사의 검을 날리고 최후의 일격은 몬스터에 맡긴 후에 다른 사냥감을 찾던 로브를 입은 자가 돌아온 것이다.
로브 안으로 보이는 눈이 살벌했다.
그는 확실히 강했다. 만약 에스텔레이드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고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스는 성검을 들고 있었다.
“하아아앗!”
한스가 크게 검을 밀어냈다. 로브를 입은 자의 몸이 뒤로 크게 기울었다.
그에게 빛의 참격이 몰아쳤다.
“크악!”
순식간이었다. 로브를 입은 자는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온 몸이 찢겨 죽었다.
그 광경을 기사는 멍하게 쳐다봤다.
“이봐요.”
“네, 네?”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치자 기사가 정신을 차렸다. 스녹이 떨어진 그의 검을 내밀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지금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족한 상황이니까.”
쿠!
기사는 얼떨떨하게 검을 잡았다. 검을 건네 준 스녹은 한스의 뒤를 따라 몬스터들에게 돌진했다.
빛이 반짝이고 대지가 일어난다. 빛은 날카롭게 몬스터들을 도륙했고 대지는 압도적인 질량으로 몬스터들을 깔아 뭉갰다.
둘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지 로브를 입은 자들이 둘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날카로운 공격을 연거푸 퍼부어댔다.
그 하나하나가 치명적이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몬스터들까지 그들을 계속 노리고 있는 상황.
하지만 둘은 아랑곳없이 전장을 돌아다니며 로브를 입은 자들과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했다.
사람들은 몬스터와 로브를 입은 자들에 대항하면서도 그들의 활약을 눈에 담았다.
광휘어린 빛의 검을 휘두르는 자와 높게 솟아 오른 대지를 밟고 선 자. 게다가 그들이 아까 성문을 틀어막은 사람들이라는 것까지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마음에 어떤 감정이 고개를 내미는 것을 느꼈다.
희망.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태어난 것이라 그것은 더욱 가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둘은 지금, 그들이 꿈꾸던 것에 진정한 첫발을 내딛고 있는지도 몰랐다.
기사, 병사는 물론 주변에 도망치던 시민이나 심지어 적들까지 그들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 시선엔 성문을 뚫어버린 후 성문 근처에서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전장을 살피고 있던 자의 것도 있었다.
* * *
에스텔레이드가 있던, 지금은 텅 비어버린 고대 유적의 공간에 빛이 번쩍였다.
두 명의 인영이 바닥에 내려섰다.
지크와 라일라였다.
그들은 주변 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지크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 같은 검’을 쳐다봤다.
“진짜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어.”
“내가 말했잖아. 그럴 것 같았다고.”
“고작 감만 믿고 공간 이동 같은 고위 마법을 발동했다고?”
“마법은 아냐. 공간 이동처럼 자유롭게 쓰지도 못하고. 이 검과 이곳에 특별한 링크가 있어서 왔다갔다 할 수 있었을 뿐이야.”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느낌.”
라일라는 지크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 같은 검’을 쳐다봤다.
그것이 자신들을 부르고 다시 돌려보냈다. 이젠 검의 주인이 된 지크조차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 그 검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한스와 스녹의 모습은 없었다. 숙소에서 기다리라는 지크의 말을 따른 모양이다.
지크가 위를 올려다봤다. 보이는 것은 낮은 천장뿐. 그러나 지크의 기감은 지금 확실하게 위쪽을 탐지하고 있었다.
“왜 그래?”
“도시에 뭔 일이 일어난 모양이야. 전투가 일어났어. 그것도 규모가 상당히 크군. 어떤 놈들이 도시 전체를 강습하는 모양인데.”
지크는 천장에서 시선을 떼며 이어 말했다.
“이 정도면 전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쟁이군.”
놀라운 일이었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는 고대 유적 특유의 방해 때문에 그는 바로 앞 통로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고대 유적을 넘어 도시의 기척까지 감지하고 있었다.
지크는 이번엔 석실을 둘러봤다. 그들이 떠날 때와는 굉장히 많이 변해 있었다.
‘시체가 더 있어.’
차림새를 보아 하니 이곳에서 자신들을 습격했던 놈들의 동료다. 적들의 응원군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스나 스녹 녀석에게 죽었나?’
하지만 로브를 입은 자들의 수준과 추가된 시체의 숫자를 생각하면 아직 한스와 스녹이 감당하긴 힘들어 보이는 상대였다.
그러나 바닥에 나뒹굴어 있는 시체는 전부 로브를 입은 놈들일 뿐, 한스의 스녹의 것은 없었다.
지크의 시선이 에스텔레이드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에스텔레이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가능성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도시에서 탐지되는 기척을 상세하게 살폈다. 찾는 기척이 느껴졌다.
‘진짜냐?’
놀랍게도 자신의 예측이 맞는 것 같다.
“어이, 빨리 나가….”
그 놀라운 일을 목격하기 위해 라일라를 재촉하려던 때였다. 라일라의 낌새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얘져 있었다.
“뭐야? 뭔 일 있어?”
“나 때문이야.”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는다.
“그들이 나를 찾아온 거야. 나를 찾기 위해 도시를 습격했어.”
“…너를 찾는 놈들이라면 이 시체 녀석들의 동료겠네? 그놈들이 지금 고작 너 하나 찾겠답시고 도시에 전쟁을 건 거라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을 납치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 마왕도 아니고. 고작 사람 하나 잡겠답시고 한 도시에 전쟁을 걸다니.
그만큼 놈들이 미친놈들이거나 혹은….
‘이 녀석이 그만큼 중요하단 거겠지.’
정말로 자신을 잡으러 왔다고 믿는 듯 그녀의 안색은 파리했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지크는 ‘나뭇가지 같은 검’을 어깨에 걸쳤다.
“일단 말해두겠는데.”
죄책감에 덜덜 떠는 그녀를 향해 지크는 퉁명스레 말했다.
“이게 모두 나 때문이다. 같은 생각은 때려치워. 누가 봐도 사람 한 명 잡기 위해 도시를 습격하는 놈들이 개자식들인 거지, 목표인 네가 뭔 책임이야.”
지크도 회귀 전 하찮은 이유로 도시를 습격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지크는 그 책임을 절대 남에게 돌리지 않았다.
‘도시 습격을 계획하고 실행한 게 난데 뭔 놈의 다른 이유를 탓하고 있어.’
물론 남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을 뿐, 죄책감 같은 걸 일절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크도 충분히 쓰레기였지만.
그래도 적어도 지크는 자신의 죄에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라일라의 커다란 눈망울이 지크를 쳐다봤다. 지크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일단 올라가서 정말로 너를 노리고 온 놈들인지 확인부터 하자고.”
“…분명 우리가 여기서 만난 놈들과는 질도 수도 확연하게 다를 거야. 도시에 전쟁을 걸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 왔겠지. 그런데 어떻게 하려고?”
“괜찮아.”
지크는 씨익 웃었다.
“짧은 시간이긴 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무적이거든.”
어깨에 걸쳐 맨 ‘나뭇가지 같은 검’의 무게가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