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지크와 라일라는 인상을 썼다.
넓은 공동에 그림자들이 우글우글대고 있었다.
대부분은 둘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몇 놈은 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여기가 그림자들의 본거지가 확실한 것 같군.”
“비켜봐.”
라일라가 지크의 앞으로 나섰다.
두 손을 들고 가만히 주문을 외운다.
파직! 파지직!
그녀의 손에 번개가 튀기기 시작했다.
주문이 끝났다.
그녀가 가만히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공동 안에 천둥 같은 굉음이 몰아쳐 지크는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몰아치는 섬광은 공동 안을 찢어발기며 그림자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잠시 환하게 비춰졌던 공동의 빛이 사라졌을 때, 대다수의 그림자들은 흔적도 없이 소멸해 있었다.
“처리했어.”
“…너 일부러 그랬지?”
지크가 아직까지도 지직거리는 손을 털며 말했다.
라일라가 얄밉게 싱긋 웃었다.
“네가 있는 곳을 사정권에서 빼려면 이래저래 골치가 아프거든. 마력도 더 들고. 어차피 그 정도 공격 정도는 너에게 별 타격도 못 주잖아?”
“미리 말 정도는 해라.”
지크가 그녀를 지나치며 투덜거렸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는 공동의 중앙을 가리키고 있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듯 그것은 방향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조금씩 진동까지 하고 있었다.
라일라도 그걸 목격했다.
“거의 다 온 모양이네?”
“그래. 저기 뭔가 보여.”
둘은 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의 진동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들이 공동의 중앙에 도착했을 때, ‘운명을 비트는 열쇠’의 진동은 최고조로 달했다가 뚝 끊겼다.
“…이건.”
“…검인가?”
공동 중앙에는 무언가가 바닥에 박혀 있었다.
라일라의 말마따나 그건 검처럼 보였다. 그러나 검이라고 딱 정의내리기에도 애매했다.
분명 날이 서 있는 걸 보니 검 비스무리한 건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형태는 보통 검의 형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굳이 형태를 표현하자면 무슨 나뭇가지처럼 생겼다.
날밑에서부터 칼날이 갈라지고 구부러져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것이, 마치 잔가지 가득한 나뭇가지 하나를 뚝 떼서 바닥에 거꾸로 박아넣은 것 같았다.
자루도 자루쇠가 드러나 있어 무척이나 볼품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크도 라일라도 한동안 별 말을 하지 못했다. 은은하게 나오는 압박감이, 그 검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있었다.
스윽!
지크의 손에 있던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공중에 떠올랐다.
천천히 허공을 날아 그것은 검의 갈라진 날 하나로 접근했다. 지크와 라일라는 그걸 빤히 쳐다봤다.
다른 날과는 다르게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접근한 날은 끝부분이 깨져나간 것처럼 훼손되어 있었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는 날의 끝부분에 살짝 내려앉았다.
날의 훼손된 끝 부분과 ‘운명을 비트는 열쇠’의 뒷부분이 완벽하게 맞아 들었다.
마치 그 날 끝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이 ‘운명을 비트는 열쇠’인 듯 보였다.
검날과 ‘운명을 비트는 열쇠’ 사이에 있던 미세한 균열이 마치 진흙을 손으로 매만진 것처럼 사라졌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검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지크가 입을 열었다.
“저건 뭐냐?”
“몰라.”
“네가 본 미래에 저런 건 없었어?”
“아마도.”
“쓸모없는 꿈이네.”
“너야말로 손에 저런 걸 박아 넣고 다녔으면 정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냐.”
“내가 박아 넣은 거 아냐.”
둘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할 때였다.
우웅!
검이 울었다. 둘의 대화가 뚝 끊겼다.
우웅! 우웅! 우웅!
마치 심장 박동을 시작한 것처럼 검이 규칙적으로 울어댔다. 라일라가 지크를 앞으로 밀었다.
“널 부르는 것 같잖아. 뽑아 봐.”
“정체도 모를 것에 날 실험체로 쓰지 마.”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크는 순순히 검의 앞으로 나아갔다.
검에 호기심을 느낀 탓이다. 게다가 그토록 정체를 알고 싶어 한 ‘운명을 비트는 열쇠’의 본체가 이 검 같지 않은가.
턱!
자루쇠를 손아귀에 쥐었다. 지크는 놀랐다.
‘따뜻하네?’
다른 검들처럼 시리도록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상상했건만 검의 자루쇠는 마치 사람의 손을 잡은 것처럼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크가 천천히 검을 뽑아냈다.
콰직!
땅에 박혀 있던 검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크는 검을 들어 모습을 훑어봤다.
제작할 때 실용성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디자인. 가까이서 보니 더 나뭇가지 같다.
그러나 사방으로 뻗어나간 날들은 그 하나하나가 정말로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검의 자루쇠에서 어떤 기운이 손을 파고들었다.
위협적인 건 아니었다. 마치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그런 느낌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그에 맞춰 검이 울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지크의 몸 한 바퀴를 부드럽게 돌았다. 지크의 마력이 그 기운을 환영하듯 일어났다.
퍼엉!
지크를 중심으로 마력파가 터졌다. 공기가 거칠게 울부짖었다.
가까이 있던 라일라의 옷이 거세게 펄럭였다. 라일라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몇 걸음 물러섰다.
마력파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공기도 곧 잠잠해졌다.
라일라가 손을 내리고 지크를 쳐다 봤다. 지크의 손에는 그 나뭇가지 같은 검이 꼭 쥐여 있었다.
“후우!”
지크가 숨을 내쉰다. 기분 좋은 한숨이었다.
밝아진 안색이 그의 기분을 대변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고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해본다.
“…지크?”
라일라가 지크를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지크는 환한 웃음을 그녀에게 보였다.
“끝내주네, 이거.”
* * *
“하앗!”
한스가 에스텔레이드를 휘두른다. 성스러운 빛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끄엑!
그의 앞에서 달려들던 트롤의 몸이 두 쪽이 났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빛은 주변 오크 몇 마리를 더 도륙한 후에야 사라졌다.
“흐아아앗!”
뒤에서 스녹이 기합을 내질렀다.
쿠우우!
노웸의 울음소리도 같이 들렸다.
콰앙! 콰앙!
지면이 물결치며 돌창이 솟아올라 몬스터들을 꿰어 들어올렸다.
둘은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계속 성문 쪽으로 향했다.
이미 성문은 완전히 부서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닫는다고 해도 출입을 통제하는 본래의 목적은 전혀 이루지 못할 게 분명했다.
“스녹! 성문을 막아!”
한스가 성문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막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도륙한다. 에스텔레이드는 유감없이 그 성능을 내보였다. 빛이 몬스터의 바다를 갈랐다.
‘준비해두기 잘했어!’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갖고 나온 후 가만히 있던 게 아니다.
에스텔레이드는 분명 한스에게 큰 힘을 준다. 하지만 그 힘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오히려 힘에 휘둘려 틈만 늘어나게 된다. 때문에 단 하루뿐이지만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다루기 위해 꽤 엄격한 훈련을 했다.
훈련을 봐줄 지크가 없어 완벽하게 대비했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에스텔레이드를 다룰 수 있게 됐다고 자부할 순 있었다.
“흐아아아앗!”
사방으로 휘날리는 빛의 검기가 성문 근처에 몬스터들을 난도질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스가 발을 크게 구르며 성문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후웅!
빛이 뻗어 성문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을 꿰뚫었다.
한스는 연신 성문을 공격했다. 빛줄기가 계속해서 뻗어 나가고 몬스터들이 연신 쓰러진다.
성문의 모든 몬스터가 쓰러지기까지는 한순간이었다. 성문이 비었다.
“스녹!”
스녹이 땅에 손을 댔다.
두두두두두!
가지런히 놓인 돌바닥이 둥실 솟아올랐다. 땅 속에 있던 돌덩이와 바위들도 지면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후웅! 후웅!
그것들이 성문으로 날아갔다.
쿠웅! 쿠웅! 쿠웅!
돌들이 성문에 차례차례 쌓여 간다. 커다란 바윗덩이들이 얼기설기 성문을 막아서고 자잘한 돌덩이들이 바위의 사이사이를 메웠다.
성문은 순식간에 돌들로 막혔다.
우어어어어어!
성문 너머에서 몬스터들의 괴성이 들렸다. 성문을 막은 돌덩이들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대지의 권능으로 물샐 틈 없이 튼튼하게 만들어진 돌벽은 몬스터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좋았어!”
스녹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한스도 일단 안도했다. 성벽이라는 이점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변에서 몬스터들을 막고 있던 병사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일단 성 안으로 들어 온 놈들을 먼저 죽여야 해.’
그리고 조금만 있으면 본격적으로 지원군도 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이 합류한다면 이 공격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스녹! 일단 성 안에 있는 몬스터들을 처리하자!”
“네!”
둘은 주변에 보이는 몬스터들을 닥치는 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병사들도 기세가 올라 몬스터들을 몰아붙였다.
“기사들이 왔다!”
한 병사가 소리쳤다.
도시 안쪽에서 번쩍이는 갑옷을 걸치고 날카로운 칼을 든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가 더욱 높아졌다. 한스와 스녹도 그들의 지원이 반가웠다. 기사들은 일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전부 쓸어버려!”
기사 단장이 검을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기사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도시 안에서 싸우는데 말은 거추장스럽다.
마력을 사용하여 말에 탄 것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아니 그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기사들은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었다.
기사들의 검이 휘날리고 방패가 번뜩인다. 안 그래도 수세에 몰렸던 몬스터들이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성벽으로 올라가라! 성벽 아래에 있는 몬스터들을 공격 해!”
기사 대장이 외치자 어느 정도 여유가 돌아온 병사들이 우르르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안정됐다. 이제 성벽 안 몬스터를 처리하고 본격적으로 성벽 밖의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시작하면 성공적으로 이 기습적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고 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불길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정말로 이걸로 끝인가?’
도시의 지옥을 말했던 고대 유적의 적이 떠오른다.
설마 그가 말한 지옥이란 게 이 몬스터의 습격이 전부인 것일까?
‘…아닐 것 같아.’
한스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콰아아아앙!
성문을 막고 있던 돌벽이 터져 나갔다.
“아악!”
“크악!”
비산한 돌덩이들에 맞은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성문 근처에 있던 병사들에게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쿠어어어!
크아아아!
몬스터들도 피해를 입긴 마찬가지였지만 성벽 안은 인간 측이 유리해진 상황이다.
즉, 몬스터들보다 인간들이 더 많았다. 때문에 피해도 인간들 쪽이 더 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어어어어어어!
성벽 밖에서 몬스터들이 일제히 괴성을 질러댔다. 그것들이 뻥 뚫린 성문으로 다시 진입하기 시작했다.
“막아!”
기사들이 서둘러 성문으로 달려갔다. 들어오려는 몬스터들을 성문에서 틀어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을 반긴 건 몬스터들이 아닌 어둠 속에서 날아온 거센 공격이었다.
콰직! 서걱!
갑옷이 잘리고 신체가 썰린다.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진다. 대부분이 즉사했고 살아남은 자도 치명상을 입었다.
몬스터들보다도 먼저 로브를 입은자가 성문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