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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119화 (119/628)
  • 제119화

    한스와 스녹은 지크가 명령한 대로 숙소에서 지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났는데도 지크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크 님은 정말 괜찮겠죠?”

    지크와 이렇게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은 처음인지라 스녹의 걱정이 커졌다. 하지만 한스는 스녹에게 단 한 마디만 던졌다.

    “지크 님이 당하는 걸 상상해 봐.”

    “…상상이 안 가네요.”

    자신이 이렇게 상상력이 빈약했던가. 그렇게 자책을 해봐도 지크가 당하는 모습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우리가 걱정해봐야 변하는 건 없어. 혹시 모를 일에 대해서 준비나 해 두자고.”

    한스도 슬슬 지크가 걱정되긴 매한가지였지만 그렇다고 스녹에게 대놓고 그리 말할 순 없었다. 걱정이란 감정은 상호작용을 하는 즉시 몇 배나 부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스도 심적으로 걱정이 되긴 하지만 지크가 당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되는 건 스녹과 같았다.

    “지크 님 문제는 지크 님이 우리보다 더 알아서 잘 하실 거야.”

    “역시 그렇겠죠?”

    쿠!

    역시나 지크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는 답이 나왔다. 한스, 스녹은 물론 노웸마저 이견은 없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난 지크 님 일보다 유적에서 죽은 적이 마지막에 한 말이 더 걸려.”

    “아, 그거요. 분명 이 도시에 끔찍한 악몽이 찾아들어 우리와 함께 멸망할 거라고 했죠.”

    스녹이 기억을 일깨웠다.

    “그냥 죽기 억울하니까 겁주려고 해본 소리 아닐까요?”

    “그러면 차라리 좋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한스는 불길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꼭 도시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만약에 말이야.”

    한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로 이 도시에 걷잡을 수 없는 악몽이 찾아온다면. 그래서 내 목숨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면 넌 어떻게 할래? 지금은 지크 님도 없어.”

    스녹이 고민에 잠겼다. 노웸을 들어 눈을 맞추기도 하고 창 너머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뭐, 솔직히 저도 목숨이 달린 일은 겁이 나요. 죽기는 싫거든요.”

    쿠.

    “하지만 사람들을 도와야죠. 애초에 제가 스울을 떠난 이유가 그것이니까요. 노웸의 죄를 같이 짊어지기로 했는데 불리하다고 사람들을 두고 도망칠 순 없어요.”

    쿠!

    노웸이 스녹의 팔에 얼굴을 비벼댔다.

    “노웸도 있고 지크 님에게 배운 것도 있으니 한 명이라도 더 사람들을 구할 겁니다.”

    “…그래. 역시 그래야겠지.”

    한스는 방 한구석을 쳐다봤다. 고대 유적에서 가지고 온 에스텔레이드가 천에 감싸여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자신을 다루는 사람을 가린다는 성검, 에스텔레이드.

    ‘저 검에게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겁먹고 도망갈 수는 없지.’

    한스는 새삼 각오를 다졌다.

    * * *

    밤이 깊었다. 휘황찬란한 둥근 달이 밤중에도 은은한 빛의 은혜를 뿌리려고 했지만 심술궂은 구름이 하늘을 덮어버렸다. 도시는 암흑 속에 빠졌다.

    한스와 스녹은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돈값을 하는 푹신한 침상과 이불이 그들이 충분한 숙면을 취하도록 도와줬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잠자리에 든 둘의 컨디션은 무척이나 좋았다.

    의식적으로 둘은 몸의 컨디션을 최대한으로 맞춰 놓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번뜩!

    베개의 얼굴을 묻고 고른 숨소리를 내던 한스가 눈을 떴다. 덮고 있던 이불을 던지다시피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이건…!’

    무척 미세하지만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건 사람의 비명소리였다.

    한스는 급히 에스텔레이드를 집어 들고 창문을 열었다. 미세하게 들리던 비명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무슨 일일까. 한스가 방을 나가기 위해 등을 돌리려 할 때였다.

    화악!

    건물 저편이 일순간에 환해졌다.

    태양이 뜬 건 아니었다. 아직 그런 시간이 아니다. 성벽 근처에서 불이 붙은 것이었다.

    ‘화재가 난 건가?’

    그 때문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 것일까.

    그러나 사건은 고작 어떤 건물에서 난 화재 사건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저편에서 솟아난 화광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여러 곳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그건 분명 사고가 아니었다.

    한스의 뇌리에 적이 죽어가면서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쾅!

    문을 박차고 나섰다. 아직 이변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한스는 옆방으로 향했다.

    벌컥!

    문고리에 손을 올리기도 전에 옆방의 문이 열리고 스녹의 모습이 보였다.

    그도 이상사태를 감지한 것이다.

    “선배! 이거 혹시…!”

    “아직은 몰라.”

    지금 알려진 건 하나도 없기에 한스는 판단을 미뤘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스녹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곧 신색을 회복하고 방에서 완전히 나와 문을 닫았다.

    “가죠, 선배.”

    “괜찮겠어? 저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나도 몰라.”

    “좋은 일이 아니란 건 확실하잖습니까. 그렇다면 나서야죠. 이럴 때 겁먹고 물러섰다간 지크 님의 열렬한 비웃음이 기다릴 게 확실하고요. 아니, 비웃음으로 끝나면 다행이죠.”

    “실력과 정신력의 향상을 위한,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지독한 지옥훈련이 기다리고 있겠지.”

    생각만으로도 싫다는 듯 스녹이 손을 내저었다.

    “좋아. 그럼 서두르자. 이러고 있을 시간에도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을지도 몰라.”

    “네!”

    한스와 스녹은 숙소를 뛰어나가 화재가 난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나와 저 멀리 난 불꽃을 지켜보고 있었다.

    걱정 어린 표정을 하는 이도 있었고 흥미진진한 얼굴을 한 이도 있었다. 그들을 피해 한스와 스녹은 계속 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명은 더욱 많아지고 불꽃의 세력도 커졌다. 그리고 비명에 섞여 불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고함, 병장기 같은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인간이 아닌 것의 괴성이었다.

    “이건….”

    한스가 말을 잇지 못했다. 스녹은 입을 벌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활짝 열린 성문으로 몬스터들이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었고 비올루윈의 병사들이 그것들을 필사적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몬스터가 너무나 많았다.

    한스의 기감에 걸리는 것만 해도 성벽 근처에 몬스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성벽 너머의 몬스터가 얼마나 있는지 알겠어?”

    스녹이 손을 짚었다. 그리고 대지가 보내오는 정보를 느꼈다.

    “수백은 족히 넘을 것 같아요!”

    “젠장!”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감싸고 있던 천을 풀었다. 하얀 성검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눈앞의 몬스터부터 막아내자! 준비는 됐지?”

    “네!”

    한스가 에스텔레이드를 치켜세우고 스녹은 노웸을 어깨에 태운다.

    둘은 몬스터들을 향해 돌격했다.

    * * *

    자연 동굴로 접어든 지크와 라일라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가리키는 곳으로 계속 걷고 있었다.

    자연 동굴로 접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미로 같은 통로가 거슬릴 뿐, 직접적으로 그들의 발목을 잡아채는 존재는 없었지만 자연 동굴로 들어서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흡!”

    후웅!

    지크가 검을 휘둘렀다. 마력을 머금은 검이 목표를 베어 갈랐다.

    스윽!

    하지만 지크의 손에 걸리는 감각은 없었다.

    빗나간 것일까.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퍼엉!

    두 쪽으로 갈린 목표가 터졌다. 검은 기운이 허공에 노닐다 마치 허공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이건 대체 뭐야.”

    지크가 투덜거리며 통로 앞쪽을 바라봤다.

    방금 지크가 퇴치한 것과 비슷한 것들이 꾸물꾸물 접근하고 있었다.

    그건 기괴했다.

    마치 땅에 붙은 그림자가 그대로 일어선 것 같았다.

    색채도 뚜렷한 형체도 없이 그저 어둠이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 그래도 얼핏 윤곽선 같은 것은 있었다.

    네 개의 촉수 같은 것이 툭 튀어나와 있어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고 뭉뚱그려진 것 같은 발을 열심히 놀리는 동물 같은 것도 있었다.

    사람처럼 보이는 개체 중 몇몇은 팔 같은 그림자 하나가 더 길어 마치 무기를 든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다수는 그저 통로에서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이었지만 몇몇 개체는 지크와 라일라를 향해 다가와 둘을 공격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단한 무력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퍼엉!

    또 하나의 그림자가 지크의 검에 터져 나갔다. 통로 저편에서 몇 마리가 더 다가오고 있었다.

    콰앙!

    지크의 뒤에서 날아간 불덩이가 적중하자 다가오던 그림자들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정말로 끝이 없네.”

    싸우는 맛도 뭣도 없는 그림자들이 계속 덤벼오는 상황이 짜증나 지크가 투덜거렸다.

    “이 녀석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

    “없어. 머릿속에 걸리는 것도 없는 걸 보니 나도 전혀 모르는 녀석인 모양이야.”

    “수많은 미래를 본 너도 모르는 녀석이라니. 이게 바로 대발견이란 건가.”

    지크는 다가오는 그림자 하나를 공간 찌르기로 꿰뚫었다.

    “전혀 반갑지 않지만.”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다시 빙글 돈다. 그들은 길을 꺾었다.

    “이놈은 언제까지 우릴 끌고 다닐 셈인지, 원.”

    “그 사람들이 걱정돼?”

    “누구? 내 종들?”

    지크는 한스와 스녹을 떠올렸다.

    “그래 봬도 내가 단련시킨 녀석들이야. 게다가 둘 다 재능도 있고 의지도 있어. 내 훈련에도 꿋꿋이 잘 따라오고. 그래서 별 걱정은 안 해.”

    무슨 일이 생기든 적절히 대처를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둘 다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어서 그게 좀 위험하긴 하겠지만.”

    “꿈?”

    “영웅이 되고 싶단다.”

    “…그런 꿈을 꾸면서 당신 밑에 있단 말야?”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란 말인가.

    하지만 지크는 오히려 가슴을 폈다.

    “이래 봬도 나는 영웅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야. 게다가 실력도 무척 뛰어나지. 내 밑에서 배우는 그 녀석들만큼이나 운 좋은 놈들은 온 세상을 다 뒤져도 얼마 없어.”

    “…당신의 그 대책 없이 긍정적인 생각이 조금 부럽긴 해.”

    적어도 스트레스로 고생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조금은 진심으로 지크의 사고방식이 부러웠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면 빨리 움직이긴 해야겠네. 실력이 따라주지 않는 정의감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까.”

    “빨리 움직이자는 말에 찬성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 둘을 너무 걱정하진 마.”

    “…위험할 수도 있다며?”

    “내가 그 녀석들의 부모도 아니고 모든 일에 대응해줄 수는 없지. 혹 녀석들이 내가 없는 동안에 꿈을 이루려 하다 죽는다 해도 그건 녀석들이 정한 길이다. 멋없게 걱정이나 동정을 할 필요는 없어.”

    “…….”

    “그래도 복수는 확실히 해줄 거다.”

    “전혀 마음이 놓이는 말이 아냐.”

    마왕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지크의 성격은 여전히 더러웠다.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가리키는 곳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림자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림자들의 근원이 되는 것이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가리킨 곳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퍼엉!

    가로막는 그림자 한 놈을 또다시 박살내고 걸음을 내딛자 둘은 통로를 벗어나 커다란 어떤 공동에 들어오게 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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