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성검이라는 존재를 처음 안 건 아주 어렸을 적, 할머니가 읽어준 동화책에서였다.
마왕을 토벌하는 용사의 이야기. 대천사가 내려 준 성검을 들고 여행길에 오른 그 용사는 온갖 시련을 넘고 목적을 이루고는 아름다운 공주님과 결혼한다.
철모르던 시절 그의 꿈은 용사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현실을 보게 되면서 자신의 꿈이 허황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의 신분은 백작가의 하인. 용사와는 거리가 멀다.
분명 용사님이나 공주님도 시중을 드는 하인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화 속에서 얼굴을 비치진 않았다. 등장인물이라는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자신이었다.
철이 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의 꿈은 자연스럽게 삐걱거리는 망각의 수납장 속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에는 백색의 성검이 뚜렷이 존재감을 표하고 있었다.
한스가 휘두른 에스텔레이드에서 빛이 날뛰었다. 에스텔레이드를 든 지크의 싸움을 감탄 반, 부러움 반으로 보던 것이 득이 되었다.
콰아아아!
“크윽!”
“으윽!”
빛의 기류에 휩싸인 적들이 속절없이 밀려난다. 한스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막대한 빛이 공간을 환하게 물들였다.
‘침착하자. 침착해.’
쿵쿵 뛰는 심장에게 주의를 주듯 한스는 속으로 뇌까렸다.
전투 중에 흥분은 치명적이다. 그게 황홀한 상황이든 암울한 상황이든 전투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자신을 속이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지크가 말했었다.
조금은 흔들리던 에스텔레이드의 궤적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후웅! 후웅!
빛이 계속해서 뻗는다. 적들은 막거나 피하기 급급했다.
아까 전의 지크처럼 되지는 않았다. 지크는 우두머리를 제외한 적들을 단 일격만을 사용해 목을 날렸었다.
그러나 한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크는 그에게 하늘 위의 존재다. 자격지심을 느낄 상대가 아니었다.
어느새 적들 중 네 명이 한스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스녹에게도 여유가 돌아왔다.
콰앙!
“크악!”
에스텔레이드와 검을 맞댄 적이 뒤로 날아갔다. 빛이 마력을 증폭한다. 근육, 혈관, 신경 모든 것에 빛이 스며들어 몸의 능력을 향상했다.
‘된다!’
지크가 가르쳐줬지만 아직 육체 능력과 마력이 여물지 않아 실패해왔던 기술들이 능숙하게 펼쳐졌다.
서걱!
손에 어떤 느낌이 왔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강한 반동이 아니다. 육체를 가르는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목이 반절가량 잘린 한 명의 적이 목을 부여잡는다. 그러나 솟구치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끄륵! 끄륵!’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입에서도 피를 뿜었다.
탓!
한스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지크의 가르침이 귀로 들리는 것 같다.
상대의 약한 점을 파고들고 상대 집단의 약한 놈을 조져라. 중상을 입혔을 때 웬만하면 놓치지 마라.
‘그리고 죽일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죽여라!’
우우웅!
에스텔레이드에 빛이 어린다. 한스가 크게 공중을 베었다.
후웅!
마력을 머금은 빛이 초승달처럼 날아갔다. 물러나던, 목에 상처를 입은 적이 눈을 크게 뜨는 게 보인다.
그게 그가 본 현실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서걱!
그의 복부에 명중한 빛은 그를 깔끔하게 이등분했다. 상체와 하체가 다른 의지를 가지게 된 것처럼 따로따로 바닥에 떨어졌다.
한 명이 죽자 로브를 입은 자들은 더더욱 밀리기 시작했다.
한스를 상대하고 있던 자들은 하나같이 손이 어지러워졌다. 그 틈을 빛은 더욱 공격적으로 파고들어갔다.
한 명이 쓰러지고 또 한 명이 쓰러진다.
콰지직!
스녹과 싸우던 적이 자신의 적을 모두 처리한 한스를 견제하다 스녹의 거대한 암석 주먹에 짓이겨지며 전투가 끝났다.
살아남은 자는 한스와 스녹이었다.
“하아! 살았다!”
숫적으로 질적으로 밀리는 불리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다.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늘어뜨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그거…!”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임에도 스녹이 한스의 곁으로 재빠르게 뛰어왔다. 그리고 한스가 들고 있는 에스텔레이드를 쳐다봤다.
“우와, 선배는 자격이 있었군요!”
“그런 것 같아.”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들어봤다. 새하얀 검신은 마치 자신의 힘이 어떻느냐고 뽐내는 것 같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격이 있어야만 들 수 있다는 검을 자신이 들었다. 자신의 꿈이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지크가 떠올랐다. 그의 앞에서 자신이 에스텔레이드를 들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처음엔 최악의 관계(따지자면 한스의 일방적인 잘못이었지만)였지만 지크는 그의 꿈을 비웃지 않고 여러모로 도움을 줬다. 성검을 들게 된 자격을 가지게 된 건 전적으로 그의 덕이라고 생각했다.
지크와 여행을 떠나기 전의 자신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하려 해도 성검을 들 수 있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스녹은 잠시 부러운 듯 한스의 에스텔레이드를 쳐다봤다. 그러나 곧 떨쳐버렸다.
“나한텐 노웸이 있으니까.”
쿠!
노웸이 크게 대답했다.
툭!
갑자기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스와 스녹이 바로 그쪽을 견제했다. 그리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전투가 끝났을 때의 확인사살과 한동안 마음을 놓지 않는 것. 지크가 누누이 강조하던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에스텔레이드라는 존재 때문에 완전히 잊어 먹고 있었다.
‘지크 님이 계셨으면 죽었다.’
둘의 뇌리에 똑같은 생각이 흘렀다.
그들의 걱정대로 소리를 낸 것이 살아남은 적인 걸 알게 됐을 때는, 지크의 불호령에 대한 걱정을 떠나 자칫하면 급습당해 위험할 수 있었던 것에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다행히 적은 바닥에서 꿈틀댈 뿐, 제대로 된 거동은 하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새빨간 피가 얼굴에 가득 묻어 있었다.
상처를 보면 살기는 글렀다. 조금은 마음을 놓으면서도 한스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겼다고 생각하나.”
그가 웃었다. 피칠갑을 하고 웃는 모습이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물론 지크를 따라 온갖 경험을 해온 둘인지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스가 검을 치켜 들었다.
“어차피 너희는 죽는다. 이제 곧 이 도시에 끔찍한 악몽이 찾아 들어 너희는 도시와 함께 멸망할 거다!”
“무슨 뜻이지?”
그는 한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기만 했다.
푹!
한스가 에스텔레이드를 내려쳤다. 그의 목이 떼구르르 굴렀다.
“정보를 캐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지크 님이 아니잖아. 녀석에게 말만으로 적절한 정보를 끌어내긴 어려워. 설혹 말한다고 해도 그게 진실인지 파악할 능력도 없고. 무엇보다 말해줄 놈으로 보이지도 않았잖아.”
스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돌아가자. 지크 님 말대로 숙소에서 기다려야지.”
하지만 둘은 그가 죽어가며 말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 * *
지크는 심각하게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를 내려다 봤다. 그때, 라일라가 그를 툭툭 쳤다.
“일단 치료부터 해.”
그의 잘린 손가락은 아직도 피를 시원스레 배출하고 있었다.
“그렇군.”
지크는 포션을 꺼내 손가락에 부었다. 과연 카르위먼의 최고급 포션. 사지가 결손된 걸 재생시킬 순 없어도 손가락 하나 정도는 가능했다.
손가락이 재생되기 시작하는 걸 확인하고 지크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를 다시 내려다봤다.
“그거….”
라일라가 ‘운명을 비트는 열쇠’를 가리키며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알고 있어?”
“…모르겠어.”
“미안하지만, 라일라. 지금 난 너와 장난칠 기분이 아니야.”
“이건 정말 몰라.”
라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뭔가 걸리는 게 있긴 해. 하지만 지금은 몰라.”
“지금은 몰라? 그러면 예전엔 알았고?”
“…그것도 몰라.”
지크는 라일라를 쳐다봤다.
그녀는 지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장난을 하는 것 같진 않다. ‘공간 이동이 되지 않으니 강제로 불게 만들어볼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공간 이동이 없더라도 라일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라일라의 반응도 단순히 알려주기 싫어서 하는 반응도 아닌 것 같았다.
“…네가 말해줄 수 있는 것만이라도 좋아. 말해봐.”
결국 지크는 강경책을 폐기했다.
다행히 라일라도 계속 어깃장을 놓진 않았다.
“…좋아.”
라일라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내밀었다.
“세 개. 네 질문 세 개에 대답해줄게.”
“너무 짠데? 조금 더 올려줄 수 없어?”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하는 수 없나.’
지크가 뭘 물어볼지 고민을 할 때였다.
스윽!
“응?”
“어?”
말을 시작하려던 라일라도 그런 라일라를 기다리던 지크도 동시에 시선을 내렸다.
지크의 손바닥 위에 있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에 그들의 시선이 꽂힌다.
“이거 방금 움직였지?”
“그래.”
분명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옆으로 움직였다. 지크는 그것이 움직이는 촉감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스으윽.
‘운명을 비트는 열쇠’의 움직임이 조금 더 커졌다. 그것이 지크의 손바닥에서 서서히 돈다.
뾰족한 부분이 통로 저편을 가리켰다. 마치 나침반처럼.
지크와 라일라의 시선이 동시에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가리키는 통로 저 편을 쳐다봤다.
“…움직이면서 얘기할까?”
“…좋아.”
둘은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가리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들은 통로를 따라 걸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는 빙글 돌아 어느 한 통로를 가리켰다.
누가 봐도 그들에게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묻고 싶은 건 정했어?”
라일라가 물었다.
“대충은.”
“그럼 물어봐.”
“그런데 정말 답을 줄 수 있겠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네 기억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사실이야. 그래도 걱정마. 내가 모르는 걸 물었다고 세 가지 질문에서 까진 않을 테니까.”
“흠.”
지크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를 내려다봤다.
‘적어도 이건 모르는 눈치였지.’
얼마간 같이 다니면서 지크는 라일라가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것이 연기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지크는 그녀의 말 모든 걸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녀가 자그마한 몸짓과 반사적인 행동에서조차 지크를 속일 수 있는 천부적인 배우라는 뜻이 되니까.
‘일단 물어는 봐야지. 신뢰성은 나중 일이고.’
“좋아, 라일라. 일단 네 본래 이름부터 말해봐.”
“…뭐?”
라일라가 당황했다.
‘흐음.’
지크는 그녀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예상치 못 한 질문을 받았다는 반응이 아니다. 마치 대답할 거리를 모르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고작 이름을 물었는데?’
이름만으로 자신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라일라야.”
“그건 가명이잖아.”
“아니야.”
“내가 이름을 물었을 때 급히 지은 거 아니야?”
“…그건 맞아.”
“그런데 그게 네 이름이라고?”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라일라를 쫓던 로브를 입은 자들이 라일라를 보고 코어 운운했던 기억이 났다.
‘코어가 이름일 수도 있지만, 그것도 아니라고 했었지.’
아마 다른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