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지크와 라일라가 사라진 후, 한스와 스녹은 가장 먼저 로브를 입은 자들의 몸을 뒤졌다.
적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고 전리품을 챙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들도 지크가 교육하고 훈련시킨 내용이었다.
나온 물건은 여러 가지였다. 상당히 많은 돈과 포션, 그리고 잡다한 물품들.
한스와 스녹은 그것들을 함부로 손대지 않고 우두머리의 로브를 벗겨 보자기처럼 만들어 그 안에 쓸어 담았다.
나중에 지크에게 줄 생각이었다.
일을 마친 둘은 에스텔레이드가 꽂혀 있는 단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배가 고프면 개인적으로 챙겨 온 육포를 씹었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어둠 속에 시선을 뒀다.
지크가 말한 한동안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한스는 자기들이 갖고 이는 식량과 식수가 바닥날 때까지 있을 생각이었다.
얼마 갖고 있지는 못했다. 정말로 비상시를 대비해 갖고 있었을 뿐, 보통 그들의 식량, 식수는 지크의 마법 상자에 있었던 것이다.
‘갖고 있길 잘했어.’
지크는 기본적인 비상식량은 항상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지크 님은 어디 계실까? 지크 님이니까 별 일은 없겠지?”
쿠우!
스녹과 노웸이 대화를 한다. 지크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을 대화로 달래는 것이다.
그와 달리 한스는 고개를 돌려 에스텔레이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색의 검신이 인상적인 검. 지크가 저걸 휘두를 때에는 정말이지 동화 속 용사가 현실로 튀어나온 느낌까지 받았다.
‘에스텔레이드라.’
아무나 뽑을 수 없다는 성검. 한스는 그 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나도 뽑을 순 없겠지?’
시도를 해보진 않았다. 하지만 스녹도 들지 못하지 않았는가.
물론 지크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스녹은 자격운운 이전에 노웸과의 계약이 문제였던 것 같지만.
하지만 적어도 저 검이 주인을 가린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볼까.’
뽑지 못하더라도 만져보고 싶기는 했다. 언제 성검을 만져볼 기회가 있을까.
어차피 할 일도 없다. 한스는 일어섰다.
“무슨 일 있어요, 선배?”
스녹이 물었다.
“저거 한 번 뽑아 보게.”
“아, 저 에스…, 에스트….”
“에스텔레이드.”
“그래요, 그거!”
뽑히지 않자 아예 신경을 꺼버린 듯 스녹은 에스텔레이드의 이름마저 기억하지 못했다.
한스가 검에 다가가자 스녹이 노웸을 껴안고 흥미진진하게 쳐다봤다. 한스가 에스텔레이드의 손잡이에 손을 뻗어 갔다.
터벅!
눅눅한 공기를 일거에 날려버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향해 뻗었던 손을 회수하고는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스녹도 일어섰다.
“지크 님일까요?”
“글쎄. 지크 님의 발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한스는 발소리로 사람의 간단한 특성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까지 성장한 상태였다.
물론 지크의 민감한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충분히 쓸 만한 수준이었다.
발소리는 통로 저편에서 들려왔다. 문제는 그 통로가 자신들이 왔던 통로가 아닌, 라일라와 로브를 입은 자들이 온 통로라는 것이다.
게다가 곧 다른 발자국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아냐.”
“지크 님이 사람들을 데리고 온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냐.”
하지만 그럴 확률은 무척이나 적다.
둘은 일단 전투태세를 취하고 통로에서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
터벅!
그들이 통로를 나왔다.
지크는 아니었다. 라일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크가 데려온 사람들도 아니었다. 로브를 푹 뒤집어 쓰고 있는 그들을 보고 둘은 인상을 썼다.
‘적이다.’
통로에서 나온 새로운 로브를 입은 자들은 주변 상황을 파악하려 방을 둘러봤다.
시체가 네 구. 세 구는 로브를 입고 있었고 한 구는 그들의 전투복 차림이었다. 네 구 전부 목이 잘려나가 있었다.
목들은 전부 근처에서 굴러다니고 있었기에 그들이 누군지는 파악하기 쉬웠다.
그들의 동료였다.
그들의 시선이 한스와 스녹을 훑었다가 둘이 전리품을 담기 위해 보자기로 쓴 우두머리의 로브를 발견했다.
“어이.”
“봤다.”
그들이 대화를 나눈다. 눅눅한 공기 속에도 주변의 침묵에 힘입어 그들의 대화는 한스와 스녹에게 무척이나 잘 들렸다.
‘다섯 명.’
상대의 숫자는 아까보다 더 많았다. 설혹 저들 중 아까 상대한 우두머리 급의 강함을 가진 자가 없다고 해도, 졸개만큼의 힘만 가지고 있다면 한스와 스녹은 대번에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로브를 입은 자들도 머뭇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칠까.”
“하지만 대장이 당했는데?”
그들은 지금 그들의 동료들이 한스와 스녹에게 전부 당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싸움을 피할 수 있을까. 한스와 스녹이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좌절됐다.
“우리의 임무를 떠올려라.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동료들이 죽은 지금 단서라곤 저놈들뿐이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하자 로브를 입은 자들의 눈에 각오가 어렸다.
“게다가 동료들과 싸운 게 저놈들이 맞다면 지쳐 있을 수도 있다.”
“그도 그렇군.”
로브를 입은 자들은 상의를 끝내더니 옆으로 나란히 늘어선 후 천천히 한스와 스녹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스녹.”
“넵!”
“뛰어!”
한스의 판단은 빨랐다. 둘은 그대로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쫓아!”
둘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자신감이 붙은 것일까. 로브를 입은 자들이 쫓기 시작했다.
둘의 속도는 빨랐지만 로브를 입은 자들의 속도는 더욱 빨랐다. 둘은 방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로브를 입은 자들에게 포위당했다.
그대로 전투가 벌어졌다.
캉! 카캉! 캉!
검과 검이 부딪치고 바위와 검이 부딪친다. 불꽃이 튀겨 간간이 어두운 방을 밝히지만 그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서걱!
“큭!”
검이 팔을 훑고 지나갔다. 화끈한 열기가 느껴져 한스는 신음을 토했다.
로브를 입은 자들은 강했다. 우두머리보다는 떨어졌지만 그 외의 자들에게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한 명씩 맡는 것도 버거웠던 판에 둘이서 다섯 명을 상대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싸움이 될 리 없다.
한스가 힐끔 스녹을 쳐다봤다. 몸에 암석 갑옷을 걸치고 이리저리 위협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단단한 그의 갑옷도 이미 상당히 깎여 나가 있었다. 그의 능력이 제대로 통하는 곳이 아니라 스녹은 더더욱 고전하고 있었다.
로브를 입은 자들의 움직임에서 아까의 긴장이 사라지고 여유가 느껴졌다.
한스와 스녹의 실력이 그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을 안 것이다.
“죽이진 마. 물어볼 게 있으니까.”
로브를 입은 자 중 한 명이 말을 했다. 아마도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한스와 스녹은 벌써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을 것이다.
퍼억!
“커억!”
한스가 복부를 얻어맞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턱!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성검에 꽂혀있는 단이었다.
한스와 스녹은 어느새 에스텔레이드가 꽂혀 있는 방의 중앙으로 몰려 있었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한스와 스녹이 통로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리고 자신들이 포위하기 편하도록 그곳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큭!”
한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도 단 위로 올라 로브를 입은 자들을 경계했다.
그들은 천천히 한스에게 접근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비웃고 있었다.
한스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뒤에도 한 명이 퇴로를 차단하며 단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스녹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농락당하고 있다. 도움을 받긴 힘들었다.
툭!
몰리던 한스의 허리어름에 무언가가 부딪쳤다. 에스텔레이드에 닿은 것이다. 그들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에스텔레이드는 여전히 새하얬다.
문득 지크의 모습이 떠올랐다. 에스텔레이드를 뽑아 휘둘러 전세를 역전시킨 영웅 같은 모습.
한스는 다가오는 적들을 쳐다봤다.
조금 망설였지만 그럴 시간조차 아깝다. 그는 검을 왼손으로 옮기고 오른손으로 에스텔레이드를 잡았다.
적들이 비웃는다. 그들도 에스텔레이드를 아는 게 분명했다.
한스도 자신이 에스텔레이드를 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크가 가르쳐 준 가르침이 있었다.
‘끝까지 발악해라. 포기는 죽어서 해도 늦지 않다. 어떤 때든, 숨이 끊어지기 전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반항해. 설령 그 희망이 실낱같다고 해도.’
손에 힘을 줬다. 마치 검이 뽑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에스텔레이드의 손잡이는 의외로 손에 착 달라붙었다.
스릉!
손아귀에 기분 좋은 진동이 느껴졌다. 한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에스텔레이드는 분명 아까보다 조금 뽑혀 있었다.
다가오는 적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리는 게 보인다. 그건 지크가 에스텔레이드를 뽑았을 때 적들이 짓던 얼굴과 판박이였다.
스르르릉!
검 끝이 지면에서 빠져나와 검신이 완전히 세상에 드러났다.
적들이 다급하게 달려드는 게 보인다. 에스텔레이드의 거대한 힘이 한스의 몸에 스며들었다.
‘아아!’
한스는 환희했다. 뽑힐 리 없어 보였던 성검이 그의 손에서 백색의 광채를 뽐냈다.
철없을 때 처음 꿨고 지크에 의해 구체화되기 시작한 영웅이란 꿈에, 에스텔레이드가 색채를 더하는 것 같았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렀다.
* * *
지크와 라일라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자신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확인을 했다.
“아까 거기와 똑같은데?”
지크의 말처럼 주변의 모습은 고대 유적과 같았다.
라일라는 눈을 감고 마력을 짜 올렸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여기서도 공간 이동은 안 돼.”
“영락없이 헤매야겠군. 유적처럼 미로만 아니라면 좋겠는데.”
하지만 지크는 곧 자신의 말을 후회해야 했다.
얼마 걷지 않아 그들의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갈림길 너머로 또 다른 갈림길이 보였다.
“허튼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소리 자주 듣지 않아?”
“내버려 둬.”
지크는 손을 내저었다.
그들은 출구를 찾아 걸었다. 침묵 속에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하지만 그 침묵도 길게 유지되지 않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말이야.”
걸으면서 지크가 입을 열었다.
“지금껏 대답을 해주지 않아도 대충 넘어갔지만 이번엔 설명을 좀 해줬으면 해. 왜 네가 그 고대 유적의 비밀통로 안에 있었는지. 널 쫓는 녀석들은 뭐 하는 놈들인지.”
“…….”
“또 침묵이냐. 그래도 조금은 말 좀 해보는 게 어때? 이래봬도 난 네 생명의 은인 아니냐?”
“…나도 정확히는 몰라.”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모르다니. 네 기억이잖아.”
“…맞아. 내 기억이야.”
하지만 뭔가 시원한 대답이 아니다.
라일라가 한숨을 몇 번 내쉬었다. 뭔가를 말하긴 할 모양이었다. 라일라가 지크를 쳐다봤다.
“…왜 그래?”
기대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거라 생각한 지크가 얼굴을 찌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파서.”
“그러고 보니 아까도 아프댔지?”
둘은 손가락을 자세히 살펴봤다.
“상처는 없는데?”
“그게 문제야.”
“고통이 심해?”
“꽤.”
실제로 타는 듯한 고통이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고통에 강한 지크가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당장 손가락을 붙잡고 뒹굴었을 것이다.
“겉이 멀쩡하다면 속에 문제가 있는 게 아냐? 뭔가 박혀 있다거나.”
“그럴 만한 기억은 없…!”
고개를 젓던 지크의 움직임 딱 멎었다.
“뭔가 걸리는 게 있는가 보네?”
지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을 뽑았다. 주먹을 쥐고 아픈 손가락만 쭉 핀다. 그리고 검으로 내려쳤다.
촤악!
손가락이 잘려나가며 피가 튀었다.
라일라가 눈을 치떴다. 손가락에 뭔가 박힌 게 있다고 바로 손가락을 잘라내다니.
하지만 놀라는 라일라는 신경도 쓰지 않고 지크는 잘라낸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건 기괴한 모습이었다. 자기 손가락을 해체하는 지크의 모습에 라일라도 한 걸음 물러설 정도였다.
하지만 지크의 손가락에서 나온 뭔가를 보고 다시 그에게 접근했다.
“뭐가 박혀 있…!”
라일라가 말을 멈췄다. 그녀는 지크의 손가락에서 나온 그걸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부릅떠져 있었다.
그걸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지크의 피로 흠뻑 젖어 있는 그것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여전한 날카로움을 자랑했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
회귀한 지금, 본 적도 없어야 할 그것이 회귀 전의 그때처럼 지크의 손가락에 박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