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성검이 번쩍였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광휘와도 같이 에스텔레이드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서걱!
“크윽!”
에스텔레이드가 우두머리의 가슴부터 복부까지 길게 갈랐다. 치명상이었다.
우두머리가 뒤로 물러섰다.
지크는 따라가지 않았다. 주변 날파리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번쩍이는 성검을 그들은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갖춰 입었던 기세등등함은 흔적조차 없었다.
번쩍! 번쩍! 번쩍!
어두운 방에 빛이 몇 번 빛났고, 그때마다 졸개들의 목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지크 일행을 몰아붙인 자들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연약함이었다.
지크는 검을 멈췄다. 에스텔레이드의 하얀 검신에 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에스텔레이드가 잠시 빛난다 싶더니 피가 스르륵 흘러 내렸다. 에스텔레이드는 깨끗한 검신으로 돌아왔다.
그 어떤 더러움도 용납지 않는 검. 언제나 순백의 검신을 유지하는 검.
그것이 에스텔레이드다.
지크의 시선이 유일하게 남은 우두머리에게로 향했다.
그는 통로 근처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날아갈 것 같다.
“죽기 전에 좋은 일 한 번 해보지 않을래? 별로 어려운 건 아냐. 네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얘기해주면 돼.”
우두머리가 웃었다. 하지만 얼음장 같은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얼마나 살가울까. 그의 미소는 독사 같았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아무 말 않는 우두머리를 보며 지크는 에스텔레이드를 들어 올렸다.
“커억!”
우두머리가 신음을 뱉었다. 하지만 에스텔레이드는 아직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지크의 공격 때문이 아니다. 그의 내부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우두둑! 카드득!
우두머리의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지크에게는 익숙한 소리였다.
‘역시 그놈들의 동료야.’
스울의 암살자 우두머리가 그랬고 오스프린의 암살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변형하고 있었다.
덩치가 커지고 근육이 드러난다. 인간의 형상이 없어지고 괴물의 형상이 드러난다.
지크가 낸 상처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빨라.’
지크는 혀를 찼다.
다른 암살자 놈들에 비해 힘만 강한 게 아니라 변형에 대한 기술도 높은 듯, 그의 변형은 무척 빨랐다. 변형 중 빈틈을 노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녀석이 울부짖었다.
사람의 고함이 아니다. 라일라가 어깨를 움찔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한스와 스녹은 태연했다.
녀석이 돌진해오자 지크도 달려갔다.
라일라가 만일을 대비해 마법을 준비하고 한스와 스녹은 지크의 싸움을 눈에 담았다.
콰앙! 콰앙! 콰앙!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싸움이 펼쳐졌다. 괴물의 괴성과 달음박질, 흉흉한 칼질과 주먹을 빛나는 새하얀 검신이 모조리 요격했다.
아마 고대 유적을 지키고 있는 신비한 기운이 없었다면 주변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싸움으로부터 일어나는 여파에 한스와 스녹이 밀려날 정도였다. 방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도 고대 유적의 보호를 받는 것인지 묵묵히 버티고 서 있기에 둘은 기둥 뒤로 피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꿈쩍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마법 장벽을 펼치고 한 손으로는 언제든 무자비한 벼락을 때려낼 수 있도록 준비하며 싸움을 지켜봤다.
변형 후에 무조건 힘만으로 밀어붙였던 놈들과는 다르게 우두머리는 변형 후에도 세련된 기술을 사용했다. 아마 그것도 변형의 숙련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승부의 추를 원상태로 돌리지 못했다.
승부가 났다.
퍼억!
[커억!]
복부에 날아든 에스텔레이드를 괴물은 피하지 못했다.
지크는 냉정하게 에스텔레이드를 다시 빼냈다. 괴물의 손이 지크를 향해 날아왔지만 허리만 굽혀 그것을 피했다. 얼굴 바로 앞에 있는 괴물의 허벅지에 칼을 꽂았다.
콰직!
[끄악!]
괴물의 피가 튀었다. 하지만 놈은 독했다. 상처는 아랑곳없이 무릎으로 지크를 치려 했다.
하지만 지크는 히죽 웃었다.
‘그렇게 다리를 잃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콰드드득!
에스텔레이드에 힘을 줬다. 마력이 빛과 함께 줄기줄기 뻗고 광포한 기운이 검신을 따라 날뛴다.
퍼어엉!
괴물의 다리가 터졌다. 피와 살점과 뼛조각의 폭우가 쏟아졌다.
하지만 지크는 멀찌감치 물러난 후였다. 에스텔레이드가 번쩍이며 검신의 피가 씻겨 내려갔다.
[흐! 흐!]
괴물이 엎어져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린다.
지크는 처형인처럼 녀석에게 걸어갔다.
휘익!
괴물이 검을 던졌다.
차앙!
지크는 가볍게 검을 쳐 냈다.
아까와는 반대의 구도. 다른 점이 있다면 지크에게는 에스텔레이드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지만, 괴물은 진짜 최후의 발악이었다는 점뿐이었다.
지크가 괴물에게 에스텔레이드를 겨눴다.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말이야. 나한테 뭔가 할 얘기 같은 거 없어?”
괴물이 침을 뱉었다. 피가 섞여 있었다.
“개자시….”
퍼억!
괴물의 욕이 끝나기도 전에 지크는 괴물의 목을 날렸다.
“…끝났어?”
“그래.”
라일라에게 대꾸해주며 지크는 등을 돌렸다. 라일라가 준비해둔 마법을 취소시켰다.
한스와 스녹도 기둥 뒤에서 나왔다.
퍽!
지크가 에스텔레이드를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넣었다.
“…그건 왜 도로 꽂아놔?”
라일라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안 쓸 거니까.”
“…뭐? 왜?”
“나한테 안 어울려. 이걸 들고 있으면 무슨 놈의 정의의 사자가 된 것 같잖냐.”
지크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너 그 검의 성능은 알고서 하는 말이지?”
“지금 쓴 것 못 봤냐? 좋은 아니, 대단한 검인 건 인정해. 그래도 내 취향은 아니야.”
“성검 에스텔레이드를 고작 취향에 안 맞는다고 쓰지 않겠다니….”
기분 탓일까. 라일라는 에스텔레이드의 하얀 검신이 조금 기죽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어. 오히려 그게 주된 이유지. 저걸 쓰지 않아도 대체품은 있으니까.”
“대체 에스텔레이드의 대체품이란 게 뭐….”
생각나는 게 하나 있어 말을 끊었다.
“…설마 토르니움을 가질 생각이야?”
“역시 알고 있군.”
그녀가 토르니움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지크는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에는 놀랐다.
그녀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붉은 눈동자가 지크를 직시한다.
덥석!
그녀가 지크의 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끌었다.
“왜 그래?”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지크는 순순히 라일라에게 끌려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스와 스녹이 다가오지 않고 둘을 바라봤다. 라일라의 분위기가 심각한 탓이었다.
라일라는 지크를 멀리 데려가지 않았다. 고작 몇 걸음. 에스텔레이드의 옆이었다.
“뽑아.”
“뭐?”
“뽑으라고!”
그녀가 강하게 말했다.
“토르니움 말고 이걸 써. 좋잖아, 에스텔레이드. 성능도 뒤지지 않고. 칙칙한 토르니움에 비해 화려하고.”
“어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토르니움을 쓸 거라니까. 그리고 이 녀석은 이미 쓸 놈이 있어.”
“주인없는 검에 쓸 놈이 어디 있고 못 쓸 놈이 어디 있어? 에스텔레이드가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인정받았잖아.”
“그렇다고 이 녀석을 사용할 이유도 안 돼. 이놈의 선택이 절대적인 건 아니야. 에스텔레이드가 나를 자신을 사용할 수 있는 자로 선택했다고 해도 사용자는 나다. 결정권자는 나야. 나한테 에스텔레이드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검 중 하나에 불과해. 그리고 난 이 녀석을 그다지 사용하고 싶지 않고.”
“…모어가 될 셈이야?”
그제야 지크는 라일라가 꺼려하는 게 뭔지 알아챘다.
힘의 마왕 지크 모어. 토르니움을 가진 지크가 다시 그 존재로 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는 것이다.
“착하게 살겠다며. 술집에서도 그랬고 데이트를 하면서도 종종 말했잖아. 그러면 토르니움보단 에스텔레이드를 들어야 해.”
“…일단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꼭 토르니움을 들지 말고 에스텔레이드를 들어야 한다는 법도 없어. 토르니움이 마검 카테고리에 들긴 하지만 그건 그 검의 힘이 워낙에 무식하고 폭급해서 그렇지 사람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거나 하진 않아.”
물론 어설픈 인간이 사용하면 주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거나 사용자 스스로를 파멸시키기도 한다. 마검이라 불리는 이유도 그것이다.
하지만 세밀한 마력 제어와 기술을 갖고 있는 지크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라일라는 수긍하지 않았다. 지크의 소매를 더욱 꽉 쥐었다.
“…에스텔레이드를 가져, 응?”
지크가 말없이 라일라를 내려다볼 때였다.
욱신!
지크가 인상을 썼다. 손가락 하나가 아팠다. 지크는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 상처도 없었다.
‘왜 이래?’
지크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우웅!
에스텔레이드가 울었다. 동시에 지크를 중심으로 기묘한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놀랐다. 기운 안에 지크와 라일라가 있었고 한스와 스녹은 기운 밖에 있었다.
지크가 라일라를 쳐다봤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거 아냐.”
“뭔지는 알겠어?”
“마법적 장치는 아니야. 하지만 기운이 공간을 비집는 것 같긴 해. 아마도 우리를 강제 전이시키려고 하는 것 같아.”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저 녀석이지?”
“그렇지.”
지크와 라일라는 방금 울음소리를 토해냈던 에스텔레이드를 쳐다봤다.
하지만 녀석은 조용했다. 마치 시치미를 뚝 떼는 것 같다.
지크가 바깥으로 걸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기운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검을 뽑아 휘둘러봤지만 기운을 베지 못했다.
‘꼼짝없이 끌려가게 생겼군.’
지크는 한스와 스녹을 쳐다봤다. 둘은 당황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동안 기다렸다가 내가 오지 않으면 먼저 돌아가라!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어!”
“저, 비밀 통로는 지크 님만 여실 수 있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지.’
한스가 통로에 대해 상기시켜주자 지크가 얼굴을 찌푸렸다.
“부수고 나가볼까요?”
한스가 물었다.
“힘들 거다. 나와 저놈의 싸움에서도 흠집하나 나지 않던 유적 아니냐. 통로의 문만 일반적인 벽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어.”
로브를 입은 자들의 시체를 뒤지면 문을 여는 아이템 같은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다른 방법으로 들어 온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자신이 돌아와 구해줄 수밖에 없는 걸까. 그러나 이게 어디까지 자신들을 날릴지 모른다.
일단 라일라에게 이곳에 들어온 방법을 물으려 할 때였다.
라일라가 소용돌이의 벽에 손을 댔다.
펑!
소용돌이의 벽면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라일라는 그 구멍을 통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건 자그마한 반지였다.
“그거 갖고 있으면 열릴 거야.”
“별 걸 다 갖고 있네?”
“뭐, 그렇지.”
“방금 한 그걸로 이 공간 이동을 막을 순 없어?”
“무리야. 방금도 상당히 무리해서 구멍을 만든 거야. 공간 이동을 막거나 우리가 빠져나갈 정도의 구멍을 뚫는 건 불가능해.”
그러고 보니 그녀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무리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한스가 주섬주섬 반지를 주웠다. 금색의 반지에는 붉은 보석을 꽉 문 정교한 장식이 붙어 있었다.
척 봐도 보통 귀한 물건이 아니다. 한스는 마치 떨어뜨리면 당장이라도 부서질 유리를 대하는 것처럼 반지를 잡았다.
“지크 님. 조심하십시오.”
지크에 대한 걱정을 거의 하지 않는 한스와 스녹이었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이 일이니만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너희 걱정이나 해, 인마들아.”
역시 끝까지 지크는 지크였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남기고 지크는 사라졌다.
남은 건 지크가 사라진 곳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한스, 스녹과 여전히 백색의 찬란함을 내보이고 있는 에스텔레이드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