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마인. 회귀 전의 세상에서 제들 마음대로 살고 제들 마음대로 즐기며 제들 마음대로 죽어간 작자들.
그 와중에 일어나는 피해에는 전혀, 단 한 톨의 책임감도 죄책감도 없었던 쓰레기들.
마인이란 칭호는 보통 일반 사람들이 붙였다. 거기에는 뚜렷한 기준 같은 건 없다. 하지만 그게 어떤 능력이든 최소한 스스로를 보호할 만한 능력은 있어야 했다.
아니면 악인을 통째로 갈아버리는 걸 즐겨하는 그렌 제너드나 벨리 와이그, 아이네 루벨라 같은 자들에게 퇴치당하기 일쑤인 것이다.
보통 그렇게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자신을 보호할 만한 능력은 일신의 강함이 많았고, 때문에 마인들은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의 강함을 갖고 있었다.
지크가 방금 경험한 우두머리의 실력은 분명 마인급이었다.
‘몸놀림만 보면 추적이나 그런 쪽에 특화되어 있는 걸로 보이는데.’
아까 라일라를 추적할 때의 발소리를 생각하면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한데, 정면 승부에서도 이렇게 강하다니.
“어이.”
지크가 입을 열었다.
우두머리의 반응은 없었다.
지크를 무시했다. 떠벌리기 좋아하던 스울의 녀석이나 말수가 없지만 그래도 대화를 어느 정도 나눴던 오스프린의 녀석과 확연히 달랐다.
‘젠장. 그놈들이 그리워질 줄은 상상도 못 했네.’
하지만 지크는 그의 무시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너희들 말이야. 혹시 사람 한 놈 잡고 타락시키는 놈들과 동료 놈들이냐?”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사내의 시선이 지크에게 쏠렸다.
냉막한 시선이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심장이 먼저 겁을 집어 먹을 것 같았다.
물론 지크는 겁 대신 도발하는 미소를 띄웠다.
“…계획을 바꾼다. 저놈과 코어는 살려두고. 나머지는 죽여.”
로브를 입은 자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코어라. 끔찍한 명칭이네. 저게 본명이야?”
“…이름 아니야.”
“그런 것 같긴 하군. 차라리 라일라가 훨씬 어울려.”
쿠웅!
지크가 검을 막아섰다.
지크와 라일라가 우두머리와 한 명을 맡고, 한스와 스녹이 다른 한 명 씩을 맡았다.
과연 마인 급 우두머리의 부하인지 부하들도 한 명 한 명 상당한 실력을 자랑했다.
한스는 열심히 검을 놀렸고 스녹은 그나마 능력이 통하는 곳으로 돌덩이를 뽑아내 몸에 둘러 갑옷을 만들었다.
둘은 잘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실력 차이가 너무 났다.
콰아아앙!
라일라의 마법이 작렬했다. 하지만 유의미한 타격을 주는 건 실패했다.
공간이 협소해 대규모 마법을 뿌리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였다.
콰앙! 콰앙!
우두머리의 검은 무거웠다. 더욱 놀라운 건 그의 검은 무거움을 위주로 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겁지만 깃털처럼 가볍고 벌처럼 날카로웠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까. 답은 하나뿐이다.
‘나보다 실력이 월등히 높다.’
그렇게 빠르게 힘을 찾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마인 급의 인간에게 닿지 않는다.
마왕이라고 불린 때를 생각하면 허탈감이 탁 하고 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크는 그런 쓸데없는 감정을 갖지 않았다.
우두머리를 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인간미 없는 녀석.’
하지만 인간미와 실력은 상관이 없다. 우두머리의 검은 여전히 광폭하게 지크를 몰아붙였고 그의 부하 한 명도 사이사이 날카로운 공격을 가했다.
다시 한번 회귀 전, 마왕이라 불리던 시절의 힘이 그리워졌다.
‘뭐, 됐어. 어차피 그 힘 보충하려고 온 거니까.’
토르니움만 찾는다면 이 정도 힘의 차이는 극복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힘이 모자란 것도 분명하다. 목적했던 토르니움도 근처에 없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 젠장! 어쩔 수 없나.’
결국 지크는 생리적 혐오감을 내리 누르고 결정을 내렸다.
“흡!”
지크의 검에 막대한 마력이 실렸다.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이번 공격은 우두머리도 경시할 수 없었는지 일순 촐랑거린다고까지 느껴지는 움직임을 멈추고 검을 들었다.
콰앙!
검과 검이 부딪쳤다. 우두머리의 움직임이 잠깐 경직됐다. 하지만 큰 공격을 가한 지크의 옆구리가 훤히 드러났다.
푹!
우두머리와 함께 지크를 상대하고 있던 졸개가 지크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 상태에서도 허리를 움직여 치명상은 피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검상이 옆구리에 길게 새겨졌다. 피가 푸슉 튀었다.
콰앙!
라일라가 급히 쏘아낸 무영창 마법이 졸개가 서 있는 곳을 강타했지만 졸개는 이미 몸을 뺀 뒤였다.
휘적거리는 그의 몸짓에서 상당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지크의 상처는 조금만 더 찢어지면 내장이 흘러나올 만큼 컸다.
적어도 앞으로의 움직임에 분명 영향이 갈 것이었다.
라일라의 걱정스런 눈길이 상처를 스쳤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지크는 뒷걸음질 쳤다. 누가 봐도 위기의 빠진 상황이다.
그러나 지크는 만족스럽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의 등에 에스텔레이드가 툭 부딪쳤다.
로브를 입은 자들도 라일라도 에스텔레이드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름답고 신성한 성검. 급박한 전투에도 눈길 한 번은 주련만.
‘에스텔레이드를 알고 있어.’
주인을 가리는 성검은 그저 예쁜 장식물에 불과하다. 때문에 그들은 에스텔레이드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누구도 지크가 에스텔레이드를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상을 뒤엎어 상대를 조롱하는 것. 지크가 아주 좋아하는 행위다.
후웅!
지크가 검을 던졌다. 하지만 기습적으로 던진 검도 우두머리는 간단하게 튕겨냈다.
그 냉막한 얼굴에 비웃음이 떠오른다. 검을 던진 것을 마지막 발악으로 여기고, 그 어리석은 행동을 조롱하는 것이다.
지크가 에스텔레이드의 손잡이를 잡자 이번엔 한심하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콰드득!
그리고 지크가 에스텔레이드를 뽑아 들자,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이란 감정이 새겨졌다.
후우웅!
백색의 검신이 궤적을 그린다. 단순한 검로가 마치 천상에 흐르는 유성 같다.
우두머리가 허겁지겁 검을 들어 막았다.
콰아앙!
다시 폭음이 터졌다. 지크는 이번엔 무거움을 느끼지 않았다. 손이 아리지도 관절이 삐걱이지도 않았다. 힘으로 밀리는 감도 없었다.
몸 안에서 마력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온 빛이 마력을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후우웅!
에스텔레이드가 사방으로 뻗어지고 지크의 마력이 온 공간을 휩쓸었다.
콰아아아!
빛과 마력의 기류가 적들을 몰아붙였다.
“커억!”
“크악!”
졸개들이 비명을 질렀다. 자신들을 뱀처럼 집요하게 노리는 빛의 검기들을 피해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모든 걸 피할 순 없었고, 몸에 꽤 많은 상처를 허용했다.
잠시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네 편, 내 편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은 에스텔레이드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검을 휘두른 지크는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젠장. 설마 이걸 사용하게 될 줄은….”
“…네가 그걸 왜 뽑아?”
라일라가 한껏 벌어진 눈으로 물었다.
“왜 뽑냐니. 이거 안 뽑았으면 우리 전부 죽었어.”
“아니,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뽑았냐고! 그 검은…!”
“성검 에스텔레이드.”
지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자격이 없는 자는 들지 못하는 검이지.”
“…너 자격 있어?”
“없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이 녀석에게 물어봐.”
지크가 에스텔레이드를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검이라고 해도 질문에 대답하는 기능은 없었다.
“그래도 성능은 확실히 좋네. 힘의 상승 폭이 아주 죽여줘.”
허공에 대고 검을 몇 번 휘적여봤다. 마치 자신의 성능을 자랑이라도 하듯 에스텔레이드는 공기를 가르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지크를 노려 본다. 경악과 충격이 눈에서, 표정에서, 행동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물러설 기색은 없다.
‘흠, ‘전투에서는 등을 보이면 안 된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이유야 여러 가지가 떠올랐지만 역시 가장 의심되는 건 그것이었다.
‘이 녀석이 그만큼이나 중요하단 것.’
지크는 라일라를 흘끔 봤다. 여전히 복잡한 얼굴로 에스텔레이드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미래에서 온 걸 확신하고 있으니 지크는 라일라가 에스텔레이드를 알고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상한 건 이곳에 있다는 것 그 자체지.’
그러나 지크가 모르는 미래의 정보를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일단은 같이 싸워줬으니 조금은 입이 싸졌겠지?’
그러면 정보를 더 얻기 쉬워졌을 것이다.
‘그러면 일단 저놈들부터 쳐날려 싸움을 끝내야지.’
그리고 이 에스텔레이드도 얼른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을 것이다.
솔직히 힘은 정말 매력적이다. 지금의 지크를 마인급의 힘을 낼 수 있도록 증폭시켜줘 저 냉막한 우두머리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게 만들지 않았는가.
하지만 성검에 대한 지크의 거부감도 상당했다. 대안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겠지만, 이 근처에는 토르니움이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다.
‘뭐, 이걸 휘두르는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한 번 원없이 써 보자고.’
지크는 일단 포션을 꺼내 마셨다. 옆구리의 상처가 사라졌다.
“여기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준비해 줘.”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올렸다.
“조심해. 갑자기 얻은 커다란 힘은 제어가 제대로 되지 않을 테니까.”
충고를 하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쯧!”
혀를 한 번 차고 우두머리가 부하들에게 신호를 줬다.
성검을 든 지크가 굉장히 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라일라 정도의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는 걸 느긋하게 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우두머리는 정확하게 지크의 정면으로 돌격했다.
‘힘은 강해졌다만!’
그도 라일라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상대한 지크의 강점은 소름끼칠 정도로 정밀한 검의 움직임이다.
근력, 마력, 그 모든 것이 윗줄인 자신이 검술의 완성도 하나만으로 밀렸다. 표정엔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두머리는 지크의 실력에 상당히 경악한 상태였다.
‘확실히 성검은 압도적인 파워를 준다.’
하지만 정밀한 검술을 장점으로 하는 녀석들에게 갑작스러운 파워업은 독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의 장점인 빠른 발놀림과 날랜 움직임으로 우두머리는 지크의 빈틈을 노렸다.
지크가 검을 휘두른다.
‘역시!’
지금까지의 유려한 움직임은 없다. 그저 잔뜩 들어간 힘만이 있을 뿐.
콰앙!
우두머리의 검과 지크의 검이 정면충돌했다. 그때 우두머리가 지크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지크는 우두머리가 예상한 대로 과한 힘 때문에 몸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였다. 그의 검이 번쩍이며 지크의 목을 노렸다.
그때 지크의 표정이 변했다. 웃는 낯으로.
‘뭐!’
불길한 느낌에 그가 뒤로 빠지려 할 때였다.
콰득!
에스텔레이드가 그의 검을 가로막았다.
“내가 힘에 취해 마음대로 날뛰길 기대했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이 정도 힘의 증폭 따위로 흥분할 만큼 어린애가 아니라서 말이야.”
‘함정!’
우두머리가 그제야 깨달았다.
“잠깐의 희망은 달콤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