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그러나 당연하게도 에스텔레이드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지, 지크 님이 성검을 뽑으셨는데요?”
“나도 봤어.”
스녹과 한스가 흥분해서 웅성댄다.
영웅을 동경하는 그들에게 성검이란 건 말 그대로 용사의 증표나 다름 아니었다.
“저거 아무나 뽑을 수 있는 건가요?”
“설마. 지크 님이 성검이라고 했는데? 게다가 지크 님도 뽑힌 게 당황스러워 보이는 눈치시잖아. 아무나 못 뽑는 게 아닐까?”
“그럼 지크 님이 용사가 되시는 건가요?”
한스의 중얼거림에 지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콱!
망설임없이 에스텔레이드를 다시 땅에 꽂았다. 몸을 부르르 한 번 떤다. 바로 세 걸음 떨어졌다.
‘용사라니. 저 자식은 무슨 살 떨리는 칭호를…!’
착한 일을 하며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크가 진짜 착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성검을 휘두르며 용사 칭호를 받는다?
‘아, 젠장! 꿈에서도 들릴까봐 무섭네.’
지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에서 내려왔다.
“어? 저 검은 안 챙기시나요?”
“흥미 없어. 애초에 저 검 가지러 온 것도 아니니까. 솔직히 말해서 내게 성검이 가당키나 하냐.”
한스와 스녹은 현명한 반응을 했다. 바로 침묵이라는 반응을.
에스텔레이드가 무슨 더러운 오물이라도 되는 양 거리를 벌린 지크는 팔짱을 끼고 에스텔레이드를 쳐다봤다.
‘이쁘긴 이쁘네.’
토르니움은 묵직하고 밋밋하게 생겼다. 검은 검신만 아니라면 별다른 특징이 하나도 없는, 딱 검이라는 기능에만 충실하게 만들어진 검이었다.
그러나 에스텔레이드는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크는 ‘검이 성능만 좋으면 되지’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만 에스텔레이드는 토르니움에 비해 성능도 꿇리지 않았다.
‘그래도 됐어. 난 토르니움만 있으면 돼.’
“저, 지크 님.”
어느새 다가왔는지 에스텔레이드 근처에서 얼쩡대던 스녹이 말했다.
“지크 님이 갖지 않으시겠다면 한 번 뽑아 봐도 괜찮을까요?”
영웅 희망자로서 성검에 도전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좋을 대로 해. 단, 아마도 넌 못 뽑을 거다.”
“아, 역시 주인을 가리나요?”
“그렇기도 하고. 게다가 넌 노웸이라는 특수 생명체가 붙어 있잖아. 내가 알기로 저 녀석은 주인 고르는 게 까다로워서 환수와의 계약 같은 다른 링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거부한다고 하거든.”
“그런….”
쿠우우우….
스녹과 노웸이 동시에 실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한번 뽑아봐라. 내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자신이 한 번 뽑은 이후, 지크는 에스텔레이드에 대한 신뢰가 한없이 추락하는 걸 느꼈다.
‘아니, 얼마나 지조가 없으면 나한테 뽑히냐? 그렌 제너드 그놈도 사실 인성 쓰레기인 거 아냐?’
지크가 그렇게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지크의 권유를 받은 스녹은 해맑게 웃으며 에스텔레이드의 손잡이를 잡았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한다. 그리고 힘껏 들어 올렸다.
“…….”
“…….”
“…….”
셋 다 말이 없었다. 스녹의 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울룩불룩해진 스녹의 팔근육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에스텔레이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스녹이 울상을 한 채 몇 번 더 힘을 줘봤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결국 스녹은 에스텔레이드를 놓았다.
“…쳇, 성검 따위 필요 없어. 나한텐 노웸만 있으면 돼.”
쿠우!
노웸이 스녹의 어깨에 올라타 앞발로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자기의 환수에게 위로를 받으며 스녹은 에스텔레이드에 등을 보였다.
터덜터덜 단을 내려오는 그의 어깨가 작아 보였다.
“너도 한번 도전해볼 테냐, 한스?”
“아뇨. 저도 못 뽑을 것 같네요.”
“그래도 한번 시도해보기는 하지그래?”
그렇게 말하니 한스도 호기심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주춤주춤 에스텔레이드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한 통로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셋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통로로 향했다. 한스와 스녹이 급히 지크의 곁으로 달려 왔다.
“사람이 있었나봅니다.”
검을 뽑고 경계하며 한스가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난 완전히 우리가 처음 발견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성검을 가지러 온 사람일까요?”
“길을 잘못 든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렌 제너드는 아니겠지?’
에스텔레이드의 회귀 전 주인이 그인지라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가벼웠다. 적어도 그렌 같은 건장한 성인 남성은 아니었다.
‘감각이 흐트러지니 정말 불편하네.’
지금 상태를 파악할 만한 건 청각뿐이었다.
가벼운 발소리 뒤로 다른 발소리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처음 발소리보다 더욱 가볍고 경쾌하다. 하지만 이건 발소리의 주인이 가벼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자들.’
적어도 길을 잃고 들어 온 관광객이란 예상은 지워야 할 것 같았다.
지크가 둘에게 손짓했다. 경계 상승 및 전투 준비의 신호. 둘은 눈을 더욱 매섭게 뜨며 통로에서 발소리의 주인이 튀어나오길 기다렸다.
탓!
통로에서 사람 한 명이 뛰쳐나왔다.
원피스 자락이 흩날린다. 컴컴한데다 묵은 공기가 폐를 압박하는 고대 유적의 안에서 입을 만한 옷은 아니다. 하지만 그 팔랑거리는 옷이 지크는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찰랑거리는 은발과 반짝이는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자기주장을 한다.
라일라였다.
열흘 뒤에나 만나리라 생각한 그녀의 등장에 지크는 적잖이 놀랐다. 라일라도 마찬가지인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녀의 뒤로 들리는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지크는 그녀의 등 뒤를 봤다.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로브를 푹 눌러 쓴 수상하기 그지없는 차림이 어떤 조직을 떠올리게 한다.
라일라의 눈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검을 통로를 향해 겨눴다.
“엎드려!”
지크가 고함쳤다. 달려들던 라일라가 그대로 넘어지듯 땅바닥을 굴렀다. 지크가 검을 내질렀다.
공간 찌르기.
마력이 섞인 공기가 송곳처럼 날아갔다. 라일라의 위를 지나쳐 그 공격은 로브를 입은 자에게 달려들었다.
퍼엉!
지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공격이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뛸 때 나는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상대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가 적인지도 아직 모른다. 라일라에게 검을 휘두르려 하길래 일단 견제를 하고 본 것이다.
그러나 공간 찌르기가 너무 쉽게 무효화된 감도 있었다.
고작해야 휘두른 주먹 한 방에 지크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을 조금은 늦출 수 있었고 그 틈을 타 라일라는 지크의 곁으로 달려왔다.
“새로 사귄 친구들이야? 그다지 질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친구는 가려서 사귀는 게 좋아.”
“친구 아니야.”
숨을 고르면서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크는 일단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저번에 지크가 사줬던 옷이 이리저리 찢겨 있다. 새하얀 피부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 있기도 했다.
이미 몇 번 굴렀는지 탐스러운 은발에는 잿빛의 먼지가 엉겨 있었다.
“상태가 별로 좋지 않군. 네 실력이면 웬만한 놈들에게 이렇게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저놈들이 강한 건가?”
“강해.”
“공간 이동 마법은? 아티팩트 있잖아.”
“…여기서는 안 통 해.”
지크의 감각을 어지럽히는 힘이 공간 이동도 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크의 말은 장난기도 조롱기도 쏙 빠져 무척이나 진지했다.
위험이란 단어가 잔뜩 묻어나오는 말투에 한스와 스녹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뭐 하는 놈들이야?”
“나를 쫓는 놈들.”
“왜?”
“…….”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기쟁이네.”
그렇게 중얼거린 지크는 다시 시선을 통로에 두었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통로에서 나왔다. 라일라가 멈춘 걸 보고 그들도 평범하게 걸었다.
수는 총 넷. 그중 한 명이 돌출되어 있었다.
‘저놈이 우두머리로군.’
지크의 공격을 주먹만으로 무효화한 놈이다. 그가 라일라를 쳐다보더니 지크 일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에 왜 사람이 있지?”
우두머리의 목소리는 감정의 고저가 거의 없어 무척이나 냉혹하게 들렸다. 한스와 스녹의 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이건 계획에 없지 않나?”
“그렇습니다.”
“변수로군.”
지크가 눈을 빛냈다.
변수, 변수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작자들을 지크는 알고 있다. 그가 항상 찾고 있고 항상 조지고 싶은 녀석들.
“일단 마셔.”
지크는 포션 한 병을 꺼내 라일라에게 건넸다.
이걸 마셔야 하나 고민을 하는 눈빛을 한 것도 잠시, 상황이 다급한 것을 감안해 라일라는 포션을 들이켰다.
그 사이 로브를 입은 자들 중 부하로 보이는 세 명이 양 옆으로 흩어졌다.
방의 가장자리 부분으로 빙 돌아 지크 일행을 둘러싸고 한 명 씩 늘어선다. 마치 네 명이 지크 일행을 포위하는 형국이 됐다.
‘어지간히 자기들 실력에 자신이 있는가 보군.’
아무래도 집단전은 서로 모여 있을 때 힘을 낸다. 지금 저들의 포진은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은 형태였다.
저들도 모르진 않을 터. 혼자서도 지크 일행을 감당할 수 있다는 압도적인 자신감이 원인일 것이다.
일단 지크는 말을 걸었다. 자신이 오해를 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봐! 일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화를 해보지 않겠어?”
상대의 반응은 무척이나 심플했다.
“죽여라.”
사방에서 로브를 입은 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빨라!’
“절대 만만한 놈들이 아니다! 긴장하고 움직여!”
경고를 날리고 지크는 라일라의 앞을 막아섰다. 그에게 우두머리가 달려들었다.
콰아앙!
“큭!”
지크의 몸이 휘청였다. 마력을 잔뜩 불어 넣은 검이 윙윙 울렸고 팔부터 다리까지 충격이 자르르 흘렀다. 머리가 순간 멍했다.
지크는 바로 정신을 억지로 다잡고 검을 놀렸다.
콰앙! 콰앙!
폭발하는 것 같은 충돌음이 반복된다. 고작 몇 번의 충돌만으로 지크는 관절이 삐걱대는 걸 느꼈다.
“라! 운트! 바이르!”
뒤에서 라일라가 주문을 외우는 게 들린다. 지크는 우두머리의 검을 다시 한 번 받고 옆에서 찔러들어가는 검의 검면을 팔꿈치로 때렸다.
콰직!
팔꿈치가 찡했다. 피가 튀었다. 다행히 뼈까지 상한 것 같진 않다.
“웰! 블룸!”
퍼어엉!
완성된 마법이 발동했다.
콰아아앙!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폭음이 일었다. 공기가 마구 진동하며 모든 것을 부서트릴 듯 연신 때려댔다.
“크윽!”
효과가 있긴 했는지 적들이 물러났다. 지크는 자신들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은은한 바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중영창.’
공기의 진동으로 적을 공격하고 바람 장벽을 주변에 펴 아군을 보호한다. 그렇게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한 것이다.
‘아주 마법에 관련된 건 못 하는 것이 없군.’
“괜찮냐?”
지크는 한스와 스녹의 상태를 물었다.
“네, 간신히.”
“아야야야….”
둘 다 죽거나 중상을 입은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상태가 썩 괜찮은 것 같지도 않았다.
“지크 님! 그런데 여기서는 땅을 조종하기가 힘들어요!”
스녹이 별로 좋지 않은 사실을 말해 왔다.
“유적 심층부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힘이 있어. 때문에 땅의 마법 같은, 마법의 여파가 아닌 발동만으로 주변의 지형을 훼손할 수밖에 없는 마법은 발동이 힘들어.”
“그럴 수가!”
쿠우!
라일라가 말해준 잔혹한 진실에 스녹과 노웸이 절망했다.
“완전히 못 쓰는 건 아니지?”
“지면에 조금씩 힘이 통하는 곳이 있긴 해요.”
그 곳을 통해 간신히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막기에 로브를 입은 자들의 공격은 너무 강맹했다.
“그럼 갑옷을 걸쳐.”
“넵!”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던 터라 스녹은 잽싸게 대답했다.
지크는 다시 우두머리를 노려봤다.
라일라의 마법 공격에 떨어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지크는 뺨으로 흐르는 땀을 어깨를 문질러 훔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아린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이 자식, 마인 급의 인간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