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뭐로 구웠어? 레어? 미디움? 웰던?”
자신의 앞에 다가와 마법에 맞고 쓰러진 양아치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는 지크를, 라일라는 빤히 쳐다봤다.
“왜 그래? 갑자기 반하기라도 했어? 폭력적인 남자가 취향이야?”
“안 죽여?”
라일라가 땅바닥에 너부러진 사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끙끙대던 사내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얼어붙었다.
사내들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지크와 라일라의 실력,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드디어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을 건드렸는지 알게 된 것이다.
동네에서나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다니는 그저 그런 양아치들이 아닌, 진짜 강자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저놈들이 그렇게까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를 욕한 것도 아니잖아. 나름 착하게 살려고 하는데 고작 그 정도로 죽이네 마네 할 수는 없지.”
결국 자기 욕을 한 게 아니니 넘어간다는 소리다.
라일라가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이미 익숙한 한스와 스녹은 그저 어깨만 한 번 으쓱이고 말았다.
“…착하게 살려면 폭력은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야?”
지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가 함부로야? 시비 거는 놈을 쥐어 패는 건 함부로가 아니잖아?”
“…네 인식이 어떤지는 대충 알 것 같아.”
라일라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지크는 한스와 스녹에게 다가갔다.
“봤지? 앞으로 시비 거는 놈이 있으면 이렇게 행동해. 뭘 멍청하게 참고 있냐?”
“그래도 나름 영웅 지망생이 이런 시비에 함부로 무력을 휘두르는 것도 좀….”
한스가 변명했다.
“애초에 척 봐도 주변에 민폐 끼치는 놈들이잖아. 너희들이 시비를 건 게 아니면 이럴 때는 딱 죽지 않을 정도로 손을 봐 줘. 영웅 지망이란 놈들이 상대가 소악당이라고 넘어가는 게 말이 되냐?”
한스와 스녹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먼저 시비를 걸지 말 것. 폭력을 휘두르기 전에 정당한지 한 번 더 생각할 것. 그래서 자기 잘못이 없다면 들이받아. 예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영웅은 성자가 아니니까. 단, 그래도 어느 정도 손속은 두고 말이다.”
한스와 스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는 계속 데이트를….”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라일라의 모습에 지크는 말을 끊었다.
“이번엔 또 뭐야? 내가 성격은 아닌데 얼굴은 취향이야? 너한테 말하고 있지만 않으면 감상하고 싶어져?”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또 자기 혼자 납득하고 있네. 사람 궁금하게 말이야.”
지크의 투덜거림에도 라일라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만 가볼게.”
“가다니. 한잔하고 가기로 했잖아.”
“이런 분위기에서 술 마시고 싶진 않아.”
“그건 그렇군.”
아직까지 땅바닥에 굴러다니며 그들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사내들을 보며 지크도 공감했다.
“데려다줄게.”
“됐어. 내가 묵는 곳까지 알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라일라가 딱 잘라 거절했다.
이번 건 설득을 하고 어르고 달랜다 하더라도 그녀의 의지를 바꾸지 못할 것 같다.
“그러면 내일도 놀자고. 한동안 이 도시에 머물 요량이거든.”
라일라가 지크를 보고 두 눈을 깜박였다.
찰나간의 고민.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일 아침에 오늘 만난 거기.”
“좋아. 약속 어기지 마.”
그녀가 펍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그녀의 찰랑거리는 은발이 사라지자 지금껏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던 지크의 시선이 변했다.
탐색하고 약점을 찾는 사냥꾼의 그것으로.
이제 뭘 할 것이냐고 지크에게 물으러 오던 한스와 스녹이 대번에 걸음을 멈출 정도로 그것은 날카로웠다.
* * *
지크는 자신의 방에 붙어 있는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숙소의 급을 상징이라도 하듯 오로지 새하얀 돌만 이용해 깎고 붙이고 쌓아올린 테라스는 나름의 예술적 미를 뽐내고 있었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제법 훌륭했다. 곳곳에 타오르는 횃불이 조명이 되어 낮과는 전혀 다른 운치를 내보이고 있었다.
불의 이지러짐에 따라 변화하는 광원은 도시에 불가사의한 생명력을 부여했고 불꽃이 닿지 않는 도시의 어둠은 기묘한 호기심을 전해줬다.
하지만 술잔을 손에 들고 있는 지크의 시선 안에 도시의 야경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온통 오늘 만난 라일라에게 쏠려 있었다.
‘정체가 뭘까.’
지크는 오늘 그녀가 보인 행동들을 떠올려봤다. 직접적인 정체에 관한 질문은 딱 잘라 쳐낸 그녀였지만 지크도 그쪽은 애초에 별 기대하지 않았다.
‘일단 돈이 없어.’
마법사, 그것도 라일라 같은 고위 마법사가 돈이 없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녀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녀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이만큼 대우해주면 들어가겠다고 말만 하면 된다. 어느 곳이든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자유를 사랑해 떠돌이로 남았다 해도 그 정도 실력이면 아무리 못 해도 먹고 싶은 걸 먹을 수준의 돈은 벌 수 있다.
‘적어도 노점에서 꼬치 익어가는 걸 보고 침만 흘리진 않아.’
그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자일까. 손에 물 한 번 안 묻혀본, 오로지 마법만 배워 온 부잣집 아가씨나 엘리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크는 자기는 돈을 꺼내는 척하며 주문을 라일라에게 시켜봤다.
‘어색했지.’
그때는 그녀가 숨긴 비밀 하나를 잡은 것 같았다. 그러나 딱 두 번째만에 그녀의 어색함은 싹 사라져 있었다.
그건 레스토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메뉴판을 라일라에게 돌린 지크는 그녀가 하는 요량을 유심히 봤다.
‘그때도 어색했어. 문제는 그러면서도 어색하지 않았단 거야.’
주문을 할 때 허둥지둥 하는 감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전채부터 시작해 마지막에 와인까지 정확하게 주문했다.
‘노점을 돌 때도 적어도 메뉴에 대해 고민하는 감은 없었어. 그 요리가 어떤 요리인지 적어도 충분히 알고 있었어.’
노점 요리부터 레스토랑 고급 요리까지 줄줄이 꿰고 있지만 주문하는 것은 어색해 하다니. 그것도 어색해 하는 건 처음의 딱 한 번뿐이다.
‘나처럼 경험과 육체가 괴리하고 있더라도 주문을 하는 게 어색한 건 말이 안 되는데.’
대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고 경험과 육체의 괴리까지 불러온단 말인가.
‘게다가 음식을 먹을 때도 그래.’
분명 요리를 줄줄이 꿰고 있지만 그녀는 음식들을 먹는 족족 처음 먹는 것처럼 반응했다.
‘지식은 있되 경험은 없다. 일단 그건 확실하겠지.’
지크는 그녀의 상태를 육체와 경험의 괴리가 아니라 하나가 더 붙어, 육체와 경험 그리고 지식의 괴리라고 생각했다.
‘미래에서 온 건 거의 확실한 것 같고.’
자신을 모어라고 부르는 걸로 의심을 하긴 했고 오늘 옷을 사러 들어가서 확신했다.
마치 정말로 연인에게 하는 것처럼, 여러 옷을 갈아입히면서 장난을 치는 것 같던 지크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철저한 계획 하에 행해진 일이다.
‘녀석이 유행을 아는 녀석이라 다행이었어.’
지크가 던져준 옷들은 앞으로 유행할 옷을 기반으로 해서 준 것들이다. 점원은 그저 장난인 줄 알았을 것이다. 지금 시대에는 서로 맞춰 입는 옷이 아닌 것도 꽤 있었으니.
하지만 라일라는 그가 준 옷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한쪽만 밑단을 빼거나 모자는 어떤 식으로 기울여 쓰는지 등등 당시 유행한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그 녀석에게 감사해야겠군.’
지크가 패션 같은 것에 민감할 리 없는 노릇. 지크가 미래의 유행을 줄줄이 꿰고 있는 건 그의 부하 중 이런 것에 민감한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옷에 관해서만은 지크에게 잔소리를 날리는 것도 서슴지 않던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역시 내가 지크 모어가 맞는지 아닌지를 캐는 것 같지?’
아까 한스, 스녹에게 폭력을 사용할 때 한 번 더 생각하라는 말을 듣고 충격 받은 얼굴을 한 걸 보면 거의 확실하다.
‘마음 같아서는 사로잡은 다음 강제로 불게 만들고 싶긴 한데.’
하지만 지크는 그 방법은 아예 뒷전으로 밀어놓은 상태였다.
‘공간 이동 아티팩트를 갖고 있는 한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라일라와 우호적인 사이를 쌓아올려 천천히 정보를 캘 기회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본인도 공간 이동을 사용할 수 있는 것 같고.’
펍에서 나간 라일라를 지크는 기감을 확장해 쫓았다. 하지만 라일라의 기척은 어느 순간 뚝 사라졌다.
‘아마도 거기서 공간 이동을 했겠지.’
공간이동 아티팩트를 위급시도 아닌데 사용하진 않았을 터. 스스로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라일라 스스로의 실력이 강하기도 했다.
‘뭐, 내일 또 만나기로 했으니 정보는 그때 더 캐내볼까.’
지크는 기대고 있던 테라스의 기둥에서 손을 뗐다.
황홀한 도시의 불빛을 뒤로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브레이브라는 이름을 언급했었지.’
아마도 그것도 지크가 모르는 정보일 것이다.
‘보물창고 같은 녀석일세. 어떻게든 잘 구슬리면 무척이나 유용한 정보를 많이 뱉어낼 거야.’
물론 얼굴이 예쁘니 데이트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기대가 되기도 했다.
지크는 다음날을 기약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지크의 방에 불이 꺼졌다.
* * *
지크는 다음 날도 라일라를 데리고 데이트를 계속했다.
여러 유명한 건축물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며 보트 같은 것들도 함께 타보는, 누가 봐도 흐뭇해지거나 혹은 눈꼴이 시린 연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둘은 철저하게 서로를 탐색했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툭툭 내뱉는 말을 통하여 상대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의외로 이 서로를 탐색하는 데이트가 재미있기도 했다. 둘 다 순수하게 이 시간을 즐기고도 있었다.
“내일은 어딜 갈 거야?”
이제는 라일라가 이렇게 먼저 물어올 정도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음 날은 지크가 한스, 스녹에게 준 휴가기간이 끝나는 날이었다.
“할 일이 있어서 내일은 안 돼.”
“아….”
라일라가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그런 모습에 놀랐는지 급히 안색을 고쳤다.
“그, 그래. 어차피 너랑 나는 원래 경계하는 사이였으니까. 계속 이럴 수는 없지.”
하지만 누가 봐도 어깨가 늘어져 있었다.
“너무 앞서 나가지 마. 정말로 할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일 뿐이지 완전히 헤어지자는 말은 아니니까. 할 일만 마치면 시간은 나. 그러니까 열흘 뒤에 언제나 만났던 거기서 만나는 게 어때?”
그녀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좋아. 너를 관찰할 시간도 더 필요하니까. 여기서 헤어지긴 좀 그렇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하는 핑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라일라는 그렇게 말했다.
라일라의 기분이 좋아지자 다음 일정은 상당히 좋은 분위기에서 흘러갔다.
데이트를 끝낸 후 라일라에게 손까지 흔들어 준 지크는 거리 저 너머로 사라지는 라일라를 쳐다봤다.
‘이거 참. 생각 이상으로 친해졌는데.’
이미 며칠 전에 털을 잔뜩 곤두세운 고양이 같은 모습은 사그라들어 있었다.
기본적인 경계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라일라는 분명 지크와의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처음에 보였던 모습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성을 보는 감정 같은 건 없어.’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껏 친구 하나 없던 아이가 생애 처음으로 만난 친구와 노는 즐거움에 사정없이 빠졌달까.
계속해서 라일라를 탐색하는 지크의 양심이 조금 아플까 싶을 정도였다.
‘뭐, 양심 같은 건 없지만.’
지크는 피식 웃고 등을 돌렸다.
‘라일라에 대한 건 미뤄 두고. 슬슬 그걸 가지러 가자고.’
마검 토르니움.
그의 검을 가지고 올 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