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레스토랑을 나오니 이미 해가 진 후였다. 관광도시인 만큼 대로변에 횃불을 놓아 기본적인 조명은 확보하고 있었으나 태양빛에 비할 바는 당연히 아니었다.
“마무리로 술 한잔하고 갈까?”
지크가 권하자 라일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술 취하게 해서 뭘 어쩌려고? 그리고 이미 와인 한잔했잖아.”
“그게 어떻게 술이냐? 그건 음료수.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한 조미료에 불과해. 아니면 너 술 약하냐?”
“…작정하고 마셔본 적은 없어.”
“그럼 이번에 한번 마셔봐.”
“도둑놈 소굴에 금화 자루를 맡기는 것과 뭐가 달라?”
“비유 좋네. 그럼 술은 안 마셔도 좋으니까 이야기 상대나 좀 해주든지.”
라일라가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크가 돈을 쓴 것이다.
게다가 오늘 지크가 보여준 모습도 조금 걸렸다. 장난스럽긴 하지만 지크는 철저하게 선을 지켰다.
“안주발 세워도 좋아.”
“가자.”
라일라가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지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가게 선택권은 라일라에게 맡겼다. 달이 떴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불이 켜진 술집이 꽤 많이 있었다.
관광명소의 자유로운 기분을 밤에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들이었다.
“저기.”
라일라가 가리킨 곳은 평범한 펍이었다.
둘은 펍에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적당히 빈 자리가 없나 돌아보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람들이 전부 어느 한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앙? 어디 한번 해보라고!”
‘싸움이군.’
지크가 눈을 빛냈다.
‘이거 참 타이밍 좋은데?’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했다. 지크는 그 말에 동의했다.
회귀 전 정말로 원 없이 그것들을 구경했었지만 불구경과 싸움 구경은 아직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건 거기에 자신도 끼어드는 것이었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린다. 지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라일라가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지크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들으라는 듯 말했다.
“누가 잘못을 했지? 역시 이런 건 착하게 중재를 해야….”
“퍽이나.”
라일라가 비꼬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는 사람들이 무리지은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은 사정을 듣고. 잘못한 쪽을 쳐날려… 아니, 타일러야.’
“우린 당신들과 할 말이 없습니다!”
‘응?’
방금 들린 험악한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 아마 싸움의 다른 당사자일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지크는 기감을 확장했다. 지금까지는 라일라를 견제하느라 기감을 좁히고 있어 넓은 범위를 커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었어?’
“왜 그래?”
지크의 뒤에 따라붙었던 라일라가 물었다.
“싸움 당사자가 내가 아는 놈들이어서.”
“당신과 비슷한 사람들이야?”
“그렇게 ‘끼리끼리 노는 놈들은 어쩔 수 없구나’ 같은 눈으로 보지 마. 저놈들은 위대한 나와는 차원이 다른 녀석들이니까. 게다가 먼저 싸움을 걸 배짱도 없는 놈들이고.”
“그걸 배짱이라고 표현하는 게 문제라고는 생각 안 해?”
지크는 코웃음 치고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갔다.
동그랗게 모인 사람들을 지나치자 싸움 현장이 보였다. 두 무리가 대치하고 있었다.
거칠게 보이는, 누가 봐도 ‘나 양아치나 건달이요’라는 자기주장이 명확한 사내 네 명이 모인 집단이 하나. 그리고 다른 집단은 낯익은 청년 둘이었다.
“여기서 뭐하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크에게 쏠렸다.
“지크 님!”
양아치가 아닌 쪽의 청년 둘 중 하나인 한스가 그를 반겼다. 한스 옆에 있던 스녹도 지크를 반갑게 쳐다봤다.
하지만 지크의 옆에 라일라가 선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러나 지크와 라일라는 놀라지 않았다. 라일라가 로브를 벗고 지크가 사준 옷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닌 이후 항상 겪던 눈초리였기 때문이다.
“정말로 인기 많네. 데이트 상대인 내 어깨가 으쓱할 지경이야.”
퍽!
라일라가 팔꿈치로 지크의 명치를 때렸다.
지크가 가슴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그러나 혀를 날름 내밀고 있는 얼굴은 그에게 전혀 타격이 들어가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 대 더 때리진 않았다.
“빨리 사건 해결이나 해.”
그녀가 밀자 지크는 순순히 앞으로 나왔다.
“지크 님! 저 여자는 분명히…!”
라일라의 얼굴을 아는 한스가 당황해서 물었다.
“우연히 만나서 작업 들어갔다. 예쁘잖아?”
“헛소리는 그만 내뱉고 해결이나 해.”
“성격도 딱 내 취향이고.”
그녀가 도끼눈을 뜨자 지크는 낄낄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건에 개입하기 위해 움직였다.
라일라는 팔짱을 끼고 지크의 등을 쳐다봤다. 사방에서 내려꽂히는 시선들을 깔끔하게 무시한 그녀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진지했다.
마치 무언가를 꼭 확인해야 하는 것처럼.
“무슨 일이냐?”
한스가 라일라를 계속 흘끔댔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지크와 같이 다니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단순히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것뿐입니다.”
그다지 사건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 한스는 그렇게만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한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넌 뭐야?”
사내 중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물어 왔다.
술에 취한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이성이 완전히 날아갈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거친 성격이 술김에 폭발했다는 느낌이었다.
“이 두 놈의 주인.”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정말로 놀랐다기보다는 과장되게 행동하며 조롱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뭐야. 대단하신 영웅님들이 주인님이 계셨다고? 하하하하하하하!”
사내가 웃었다. 다른 세 놈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상대를 얕잡아보고 비웃는 태도가 열받는다. 하지만 지크는 그들을 따라 싱긋 웃어줬다.
물론 지크의 그런 상태가 절대로 기분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아는 한스와 스녹은 저도 모르게 반 발자국 물러나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런 둘의 모습을 사내들은 자신들에게 겁을 먹었다고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이 봐! 저놈들을 보라고! 천하의 영웅이 되고 싶다고 하신 분들이 고작해야 우리가 웃었다고 벌벌 떠는 꼴이라니!”
“어라? 그럼 우리가 세계를 뒤흔드는 마왕이 되는 건가?”
“마왕만 되겠어? 마신이나 그런 게 아니고?”
“고귀한 영웅 나리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으니 그 정도는 되겠지!”
우두머리 사내가 신나서 떠들자 다른 놈들도 따라 목소리를 높였다.
유치하고 경박한 조롱. 정말로 저런 말이 재미있는지 진심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은 끝났다.
“술자리에서 ‘영웅이 될 거다’ 뭐 그런 얘기 했냐?”
“네.”
한스와 스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 것이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지만 지크에게 하는 대답만큼은 담담했다.
지크는 그들의 꿈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내들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지크는 무시했다.
“그저 그뿐이고?”
“네. 그런데 갑자기 저 사람들이 끼어들었어요. 꿈이 유치하네, 대단한 사람 납시셨네, 그런 말을 하면서요.”
상당히 분했는지 스녹이 씩씩댔다.
“대응은 어떻게 했어?”
“처음엔 무시했는데 우리가 별 반응을 하지 않자 아예 저희 테이블 근처까지 와서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그러다 언성이 높아졌고요.”
“아니, 대영웅님의 실력을 보고 싶었는데 우리를 그냥 무시하잖아. 아무리 대영웅님이라도 그래도 되는 거야?”
대영웅.
대영웅을 꼭 붙이며 빈정대는 네 사내.
상황 파악은 끝났다. 성격이 좋지 않은 건달 놈들이, 어찌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한스와 스녹의 꿈을 보고 빈정댄 것이다.
지크는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들이 대응을 잘못했네.”
사내들이 다시 크게 웃었다.
“이야, 영웅 나리들께서 주인님에게 혼을 다 나네! 난 이런 장면을 처음 보는 것 같아!”
지크가 빙글 몸을 돌렸다.
“잘 봐. 이런 때 대응 방법을 보여줄 테니까.”
그는 뚜벅뚜벅 사내들에게 걸어갔다.
사내들과의 짧은 거리는 고작 몇 걸음으로 금방 메워졌다.
“뭐야, 우리한테 사과라도 하려고? 그것도 좋지. 그러고 보니 네가 데려온 여자가 무지하게 예쁘네.”
우두머리 사내의 끈적한 눈빛이 라일라를 훑었다.
라일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마저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변해, 사내들은 본능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여자를 넘긴다면 우리가 용서….”
“어이!”
지크는 환하게 웃으며 사내들의 말을 끊었다.
“부모님은 잘 계시냐?”
“…뭐?”
“부모님은 잘 계시냐고.”
지크가 웃음을 지우고 사내들의 발끝부터 머리끝을 쭉 훑었다.
누가 봐도 기분 좋은 눈초리는 아니었다.
“너희 같은 것들을 키우느라 몸이며 속이며 다 썩어 문드러진 것 같은 그 불쌍한 분들의 존체가 아직 정정하시냐 이 말이다.”
네 사내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뭐, 이…!”
사내들에게서 온갖 욕설이 퍼부어졌지만 지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너희의 성격이 그렇게 쓰레기처럼 형성된 가장 큰 원인이 혹시 너희의 부모님이냐? 내 말은, 그러니까 마치 쓰레기 같은 너희의 도플갱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개쓰레기가 너희 부모님이냐는 소리야.”
지크는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언뜻 들으면 상냥하게까지 들리는 말투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그 상냥함에 감동할 사람은 단언컨대 절대로 없을 게 분명했다.
“아니면 혹시 돌아가셨냐? 아, 그래, 그런 가능성이 높겠구나. 너희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절대로 너희 같은 쓰레기로 키우지 않았을 테니. 나 같으면 자살을…. 어라? 혹시 부모님이 숨을 거두신 이유가 너희가 그런 쓰레기로 커서 스스로 안은 죄책감 때문이냐? 무슨 이런 불효막심한 놈들이 다 있어!”
이제는 숫제 화를 내기까지 한다.
한데 그 화라는 게 감정을 다잡지 못해 쏘아대는 게 아닌, 아이들을 훈계할 때 사용할 법한 화라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개자식이!”
결국 우두머리 사내가 분을 참지 못하고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고작해야 동네 뒷골목에서나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양아치가 지크에게 상처를 주는 게 가능할 리 없다.
턱!
사내의 주먹은 지크의 손바닥에 너무나 쉽게 막혔다.
퍽!
그리고 역으로 날아간 지크의 주먹은 사내의 턱을 매섭게 후려쳤다.
“끄억!”
사내의 목이 팩 돌았다. 입가에서 피를 뿌리며 그가 넘어졌다.
다른 사내들이 뒤를 이어 덮쳐들었다.
나름 우세한 숫자를 바탕으로 빠르게 기습해서 지크를 쓰러뜨리겠다는 의지가 보였지만 불행하게도 지크에게 그들의 움직임은 거북이가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퍽! 퍽!
뭔가 대단한 기술을 쓸 필요도 없었다. 마력을 사용하지도 않고 그저 사내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 두 사내의 복부에 펀치를 한 방씩 먹였다.
“어욱!”
“우웁!”
숨이 탁 막히고 몸이 자동적으로 구부러진다.
참을 새도 없이 방금 먹은 술과 안주가 목구멍 너머로 역류했다.
“이잇!”
나머지 한 사내는 지크에게 덤비지 않았다.
너무 순식간에 당한 동료들을 보고 나름 머리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는 쓰러지는 동료들을 지나쳐 후방에 서 있는 라일라에게 달려갔다.
인질로 쓰려는 것 같았다.
주변 구경꾼들이 ‘어! 어!’ 하는 비명을 내지른다. 라일라가 위험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지크는 싸움이 끝났다는 듯 손을 털었다.
‘멍청한 놈.’
그게 라일라를 인질로 삼으려는 녀석에 대한 인식이었다.
파지직!
“아아악!”
짜릿한 소음과 고통에 찬 비명.
지크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라일라의 앞에 쓰러져 연기를 내뿜는 마지막 사내를 보고 혀를 한 번 차 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