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라일라라….”
지크가 고개를 꺾었다.
대로변에 흐드러지게 핀 하얀색의 꽃이 들어왔다. 다시 라일라를 쳐다본다.
라일라가 지크의 시선을 회피했다.
“너무 대놓고 가명 아니냐? 라일라라면 저기 핀 꽃 이름이잖아.”
“꽃 이름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게 뭐가 어때서.”
“그도 그렇네.”
지크는 쿨하게 인정했다. 어차피 그녀가 대놓고 정보를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좋아, 아가씨. 가고 싶은 곳은 있어?”
“…….”
라일라는 침묵했다.
그러나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살피는 걸 보니 가고 싶은 곳이 없는 건 아닌 듯 보였다.
“…먼저 뭘 좀 먹고 싶어.”
“배가 고픈 거야? 그러고 보니 꼬치구이도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지. 돈이 없어?”
“무슨 상관이야.”
“그래. 상관없지. 돈도 내가 다 댄다고 했으니까. 그럼 뭘 좀 먹자고.”
지크가 꼬치구이집 옆으로 주르르 서 있는 간이 상점들을 쳐다봤다. 여러 가지 개성적인 음식들이 가판 위에서 사람들을 유혹했다.
“뭐 먹을래.”
라일라가 지크를 힐끗거리면서도 주춤주춤 발을 내디뎠다. 먹고 싶은 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꼬치구이집에서 조금 떨어진 가게로 갔다. 여러 과일을 갈아 즙을 내어 주스를 만들어 파는 가게였다.
“골라 봐.”
지크가 나무판 위에 비뚤비뚤 적어둔 메뉴를 보며 말했다. 그녀가 메뉴를 곰곰이 고르다가 손가락으로 메뉴 하나를 가리켰다.
“…저거.”
“보트묄이라. 좋지. 달고 새콤하고. 주문해. 내 것까지 두 개.”
지크가 돈주머니를 꺼내 돈을 꺼내기 시작했다.
라일라가 잠시 메뉴판을 보더니 가판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상점 주인은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였다.
“저기….”
그녀가 메뉴판을 보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보, 보트묄 주스 두 개 주세요.”
“돈은 여기 있습니다.”
지크가 끼어들어 주인에게 돈을 건넸다. 주인이 해맑게 웃으며 돈을 받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주인은 보트묄의 껍찔을 벗기고는 압착기에 넣고 즙을 짜기 시작했다. 그녀가 힘을 줄수록 과즙이 압축기 안에서 점점 많이 흘러내렸다.
주인은 짜낸 과즙을 물에 알맞은 농도까지 희석시켜 둘에게 내밀었다.
“마셔.”
지크가 주스를 들이켰다. 새콤달콤한 향이 무척 좋았다. 딱 먹기 좋을 정도로 보트묄이 익은 모양이었다.
라일라도 지크가 마시는 걸 보더니 조심스럽게 컵에 입을 댔다.
“…어머?”
그녀가 놀람이 섞인 감탄을 터뜨린다. 벌컥벌컥 주스를 들이켰다.
컵이 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뭐야. 보트묄 주스는 처음 마시는 거야?”
라일라가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보트묄 주스는 맛있지. 하지만 다른 것들도 맛있는 것들이 많아. 이 상태로 노점들을 한 번 쫙 돌아보자고.”
지크가 자신과 라일라의 컵을 주인에게 건네고 라일라를 이끌었다.
* * *
둘은 노점의 음식을 이것저것 먹어 치웠다. 여러 가지 맛을 보도록 다른 종류의 음식들을 조금씩 맛봤다.
하지만 아무리 적게 먹었다고 해도 많은 종류를 먹은지라 배가 곧 가득 찼다.
“더 먹을래?”
“됐어.”
상당히 만족했는지 라일라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풀어져 있었다.
“좋아. 그럼 다음 장소로 이동할까?”
“…어딜 가는데?”
라일라가 다시 경계했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주변을 경계하는 조그마한 동물 같아 지크가 피식 웃었다.
“네 옷을 사려고.”
“…뭐?”
“네 옷 말이야. 설마 데이트하는데 계속 그 옷을 입고 있을 거야?”
푹 뒤집어쓰고 있는 로브만이 문제가 아니다. 로브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옷은 지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것이었다.
더럽거나 낡아 보이진 않았지만 몇몇 군데 찢어진 곳도 있었다.
“옷은 별로 상관없어.”
“내가 상관 있으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지크는 적극적이지 않은 그녀를 데리고 상업지구 중에서도 의류 관련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세계적 관광도시로서 상당한 부를 창출하고 있는 도시답게 비올루윈에는 기성복 가게가 꽤 있었다.
지크는 그중 한 가게로 라일라를 데리고 들어갔다.
젊은 점원이 둘을 맞아줬다.
지크는 가게 중앙으로 들아가더니 라일라를 돌아봤다. 그녀는 여러 옷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원하는 옷이라도 있어?”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래도 골라봐. 아, 그리고.”
지크가 라일라의 로브를 가리켰다.
“그 우중충한 로브 좀 벗고. 명색이 데이튼데 그런 거 하고 다니는 녀석이 어디 있어.”
“이건….”
“알아, 너 드럽게 예쁜 거. 하지만 명색이 데이트인데 계속 그 꼴로 다니려고?”
옆에서 점원이 예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아마 속으로는 연인들이 아니꼬운 꼴불견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머뭇거리던 라일라가 로브를 벗자 그녀의 눈이 떡 벌어졌다.
지크도 다시 한번 감탄했다. 로브로 반쯤 가려진 아까와는 달리 그녀의 미모가 단번에 터져나오니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데이트로서도 충분히 즐겁겠는데?’
“골라 봐. 이건 내놓고.”
지크가 라일라의 로브를 낚아챘다.
라일라는 한 번 움찔했지만 제지하진 않았다. 하지만 옷을 고르러 움직이지도 않았다.
“뭐야, 안 살 거야?”
“여기서는 남자친구분께서 골라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정신을 차린 점원이 지크에게 권했다.
과연 프로라며 이번엔 점원에게 감탄한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네요.”
그는 여러 옷이 걸려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제법 상품이 충실한 가게였다.
지크는 라일라를 돌아봤다. 긴장감 때문인지 경계 때문인지 얼굴이 굳어 있는 그녀를 향해 지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준 선택권을 걷어찬 건 너야. 그러니까 내가 준 건 전부 다 한 번씩은 입어줘야겠어.”
그녀가 당황했다.
* * *
“이봐. 화 좀 풀어봐.”
지크가 포크를 흔들어댔다.
그들은 한 레스토랑에 와 있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이 레스토랑은 관광객들 중에서도 어느 정도 지위나 재력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가격도 상당했다.
그러나 지크도 이런 곳에서 한 끼 정도 먹는다고 거덜이 날 정도로 돈이 없진 않았다.
라일라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차림은 놀라우리만치 변해 있었다.
산뜻하고 수수한 원피스를 차려입고 옆자리에는 챙이 넓은 모자가 얹혀 있다. 발에도 화려하진 않지만 품위가 있는 구두를 신고 있다.
전형적인 관광지에 온 관광객의 모습이다.
칙칙한 로브를 푹 눌러 쓴, 조금 전의 수상쩍은 모습과는 극과 극으로 달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고르라고 할 때 골랐으면 그런 일도 없었잖아.”
“…그게 사람을 인형처럼 갖고 논 이유야?”
“아니, 역시 얼굴이 예뻐서 그런지 웬만한 옷은 잘 어울리더라고. 그래서 조금 흥을 내버렸지 뭐냐.”
지크가 뻔뻔하게 웃어젖혔다.
라일라가 식탁 위에 둔 손을 꼼지락거렸다. 당장이라도 고기를 자르는 나이프를 잡고 지크를 찌르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게 아니잖아. 점원도 중간에 슬슬 끼어들었고. 너도 별말 안 했고 말이야.”
이거 입어 봐라 저거 입어 봐라, 라일라에게 권유하던 지크에게 가만히 서 있던 점원이 슬쩍슬쩍 끼어들기 시작한 건 라일라가 다섯 벌 정도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나중에는 아예 지크와 함께 대놓고 옷을 고르고 있었다.
“그 여자도 한 대 걷어차고 왔어야 했는데.”
“참아. 대신 나도 한동안 인형이 되어줬잖냐.”
열 몇 벌을 갈아입고 누가 봐도 성질이 난 라일라를 달래기 위해 지크는 그녀와 역할을 바꿨다.
그때부터 라일라는 역으로 지크에게 온갖 옷을 몰아줬었다.
“그런데 확실히 그 점원은 대단했어. 정말로 쉬지 않고 옷을 갖다주던데.”
“분명 그 가게는 장사 잘될 거야.”
점원의 접대용 미소가 그때는 분명 진심으로 즐기는 미소로 바뀌었다고 라일라는 확신했다.
“그래도 덕분에 옷도 제법 잘 샀으니 나쁜 경험은 아니었어.”
지크도 원래 입고 있던, 조금은 우중충한 여행복이 아닌 심플하지만 시원시원하고 멋도 첨가된 옷을 입고 있었다.
라일라가 골라 준 옷 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둘은 몇 벌 정도 옷을 더 샀다.
가게를 나올 때 여러모로 좋은 표정을 짓고 있던 점원의 얼굴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마 안 있어 시켰던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둘은 식기를 들었다.
의외로 둘은 이 고급스러운 분위기에도 잘 섞여 들었다.
서로 외모도 좋았던 데다가 복장도 좋았다. 물론 상당히 가벼운 느낌의 복장이었지만 관광지라는 특성상 오히려 이곳에서는 그런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서로 테이블 매너를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
지크가 와인 한 잔을 따라주며 라일라를 직시했다.
“그런데 너 정체가 뭐냐?”
“의외로 늦게 물어보네?”
“아까는 알려주지 않았을 거 아냐. 완벽하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으니까.”
“아직 너에게 마음을 연 건 아닌데?”
“그래도 아까보다는 좀 낫겠지.”
라일라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까라면 절대로 입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마셨네? 거기에 독 탔는데.”
“어머. 상당히 센스가 있네. 원래 와인 한 잔엔 독을 좀 타야 향이 더 깊어지지.”
그리고 이번엔 한 번에 거의 반을 마셨다.
“묻겠는데 싸구려 독을 쓴 건 아니지?”
“설마. 이런 미인과 데이트를 하는데 내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겠어? 충분히 비싼 거야.”
지크는 낄낄대면서 고기를 썰어댔다.
“그런데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은 있을까?”
“전혀.”
“뭐, 그럴 줄 알았어.”
지크는 크게 자른 고기를 한입 가득 넣었다. 고기의 익기도 적당했고 소스도 맛있었다.
“왜 그렇게 봐?”
입에 넣은 고기를 씹고 있으니 라일라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게 보였다.
“넌 정말 지크야?”
“이름을 바꾼 기억은 없네.”
“성은 바꿨었지?”
“뭘로. 모어로?”
“…다른 것일 수도 있고.”
움직이던 식기가 멈췄다.
지크와 라일라는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마치 상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를 탐색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비밀을 꽁꽁 싸맨 여자에게 별로 대답해주고 싶진 않은데.”
“쪼잔하게.”
“거울을 가져다드릴까요, 아가씨?”
“비밀을 가진 남자는 별로 매력 없어.”
“나는 예외지. 어떤 단점이 있더라도 매력이 넘치는 남자거든.”
“허황된 생각을 하는 남자도 매력 없어.”
“그런 것조차 극복하는 나는 참으로 대단한 남자라니까.”
다시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식탁보 위에서 마치 불꽃이 튀기는 것 같다.
라일라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브레이브.”
“응?”
“네 성 말이야. 만약 새로 만든다면 모어가 아니라 브레이브가 좋다고 생각해.”
“지크 브레이브?”
뜬금없이 자신의 성을 정해주다니. 지크가 의문에 차 라일라를 쳐다봤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저 묵묵히 고기를 씹고 있었다.
“혹시 네 성이냐? 이거 설마 청혼하는 거야? 같은 성을 쓰며 평생을 함께하자 뭐 그런 거? 아,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닌데?”
지크가 넉살을 떨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대꾸하지 않고 식사를 계속할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