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지크 일행의 여행은 여느 때와 같았다. 훈련이란 미명하에 문명 생활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동하며, 간간이 들르는 마을에서 착한 일을 한다.
고된 여정이었지만 한스와 스녹은 웬일인지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단순한 녀석들.’
지크는 그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들이 열의를 태우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지크가 그들에게 가고 있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려준 것이다.
목적지에 가까워져 그들은 일반적인 산을 나와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도로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배낭을 메고 지팡이 하나를 의지한 채 걷고 있는 사람들, 좁은 공간에 잔뜩 구겨진 사람들을 태우고 천천히 움직이는 수레, 번쩍번쩍한 장식물이 달린 채 도로 한가운데를 떡하니 점령하며 가고 있는 마차.
온갖 인간군상들이 오가는 길을 그들은 천천히 걸었다.
파란 하늘 아래 커다란 성벽이 나타났다. 도시를 지키는 그 충실한 벽은, 기분 탓인지 다른 성벽들보다 조금 더 친근하고 편안해 보였다.
“봐! 도착했어, 노웸!”
스녹이 노웸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성벽을 보여줬다. 노웸이 쿠! 외쳐 화답했다.
한스도 제법 흥분한 모양인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곳이….”
“맞아.”
지크의 시선이 성문에 꽂혔다.
“저곳이 ‘비올루윈’이다.”
비올루윈. 눈앞에 보이는 도시의 이름이다.
한 나라나 영지의 수도는 아니다. 엄청난 돈과 물자가 오고가거나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껴 인구가 많거나 전략적 요충지에 세워진 도시도 아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요소를 하나 갖고 있었다.
그건 관광이었다.
“약속대로….”
지크가 입을 열자 한스와 스녹이 그의 입을 바라봤다.
먹이를 얻기 위해 어미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새끼 새가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저기서는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
한스와 스녹이 뛸 듯이 기뻐했다.
이번 여행에서 그들은 오직 이 잠깐 동안의 꿈같은 휴식만을 생각하며 지크의 그 고된 훈련을 감내했던 것이다.
백작가 내에 있던 한스나 광산에 처박혀 있던 스녹에게까지 그 명성이 들려올 정도로 비올루윈의 인지도는 컸다.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관광도시에 들른다는 사실은 둘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크 일행은 도시에 들어섰다.
관광객이 북적거리는 도시인지라 안으로 들어가는 데 상당한 시간을 써야 했다. 성문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도시 안에 들어온 순간 한스와 스녹은 그 정도 기다림은 충분히 버틸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잘 정비된 도로가 직선으로 쭉 펼쳐져 있다. 양옆으로 비올루윈 특유의 하얀색 돌로 지어진 집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다. 저 너머로 물을 뿜어내고 있는 분수들이 보였다.
고작해야 성문에 들어섰을 뿐인데 지금껏 그들이 보았던 어떤 경치와도 다르다.
한스와 스녹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딱! 딱!
둘의 머리가 앞으로 확 쏠렸다. 스녹은 이마로 노웸까지 박았다. 노웸이 쿠우우! 비명을 질렀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멍청이들아.”
돌처럼 서서 길의 혼잡에 당당히 일조하던 둘의 정신을 뒤통수 치기라는 유구한 체벌로 각성시키고 지크가 앞장섰다.
아무리 강해져도 지크의 이 뒤통수 치기는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기척 정도는 충분히 느낄 만하건만, 이건 무슨 유령에게 기습을 당하는 것 같다.
따라가도 따라가도 따라잡을 수 없는 신기루. 그게 그들이 느끼는 지크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곧 앞에 나타난 커다란 숙소를 보고 그들의 생각은 일거에 날아갔다.
오스프린에서 요하임이 잡아줬던 숙소도 충분히 고급스러운 숙소였다. 눈앞의 숙소와 비교해도 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숙소는 관광지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지크는 방 세 개를 잡았다. 당연히 많은 액수의 돈이 깨졌지만 얼마 전에 밸리드 북부 총지부 토벌의 공으로 카르위먼에게서 충분한 금전을 받았다.
물론 아무리 많은 금액이라도 물쓰듯 펑펑 사용한다면 금세 떨어지겠지만 그 정도로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지크는 한스와 스녹을 불러 모았다. 눈을 반짝이는 둘에게 통보했다.
“5일이다.”
지크가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폈다.
“5일 동안 자유 시간이다. 그때까지는 마음대로 놀아 봐.”
한스가 주먹을 꽉 쥐고 스녹은 노웸을 꽉 껴안았다.
그렇게 지크 일행의 짧은 휴가가 시작됐다.
* * *
한스와 스녹은 정말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지크에게 받은 훈련들을 모조리 응용하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도 나가볼까.’
관광도 할 겸, 도시의 구조도 알 겸, 정찰도 할 겸 지크도 숙소를 나섰다. 먼저 나선 종 두 놈은 어찌나 빨리 움직였는지 벌써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회귀 전 기억을 떠올려보며 지크는 도시를 거닐었다. 명성 높은 관광도시답게 볼거리는 많았다.
길거리 한쪽에서는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반대쪽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밭이 있었다. 좀 더 걷자 도시를 관통하고 있는 넓은 강이 나왔다.
딱 운치가 생길 정도로 적당하게 바랜 석재 아치교가 강 곳곳에 서 있었다. 그 위에서는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얼굴로 아름다움을 즐겼다.
‘이런 곳이었군.’
토르니움을 가지러 한 번 들렀던 도시지만 그땐 이런 관광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토르니움이란 마검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지러 왔을 뿐이다.
‘그때도 한바탕 하지 않았나?’
힘에 눈이 뒤집혀 있던 시기였던 걸 감안하면 작은 소란으로 끝나진 않았을 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아깝네.’
인성이 썩어빠지고 성질 더러운 지크라도 일반인만큼의 심미안은 가지고 있다.
지크가 둘러본 도시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예전의 지크는 이 도시에 한 번 왔으면서도 그저 관광도시라는 정보만 알고 있을 뿐, 도시의 아름다움에는 관심도 없었다.
‘여유가 없었지.
그리고 여유라는 걸 가질 정도로 힘이 생겼을 때 그는 이미 전 세계와 투쟁 중이었다.
다리를 넘어 도착한 곳은 상업지구였다. 다른 도시들에서도 파는 생필품 같은 것들에 더해 여러 관광상품들도 팔고 있었다.
조금 더 걷자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음식을 파는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온 것이다.
‘뭣 좀 사먹을까.’
지크는 돈꾸러미에서 잔돈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손 안에서 동전을 이리저리 놀리며 어떤 것이 더 맛있을까 고민하던 지크의 발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평범한 꼬치집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숯불 위로 이름 모를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다.
고기에서 뿜어지는 연기가 냄새와 함께 사람들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하지만 지크의 시선을 잡아 끈 건 다른 것이었다. 꼬치 집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이 화사한 도시에서 꾀죄죄한 로브를 입고 있는 그 사람은 수상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로브 때문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꼬치집을 향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꼬치집 주인도 그가 신경 쓰이는지 힐끔거렸다.
‘이런 우연이 있나.’
지크가 씨익 웃었다. 마법 상자 안에 넣어 둔 검을 꺼낼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는 로브를 걸친 자의 곁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스윽!
그가 지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크를 발견한 그가 움찔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오랜만이지?”
지크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스와 스녹이 봤다면 대번에 그 꿍꿍이를 의심하며 크게 물러섰을 그런 웃음이었다.
“여기서 뭐 해? 아, 관광도시에서 뭐 하냐는 소리는 좀 그런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
지크를 경계하는 로브를 걸친 자가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크는 태연했다. 고개를 돌려 꼬치집을 쳐다봤다.
자신의 꼬치집을 계속 바라보던 로브를 걸친 자를 수상히 바라보던 주인은 다시 꼬치 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지크를 기다리고 있던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먹고 싶어?”
“…….”
돌아온 대답은 없었지만 지크는 꼬치집으로 걸어갔다.
“두 개만 주세요.”
“네!”
주인은 잘 익은 꼬치 두 개를 건넸다. 돈을 치르고 지크는 로브를 걸친 자에게 돌아왔다.
“자!”
지크가 꼬치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하나는 자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육즙이 툭 터지며 고기가 입 안에서 씹혔다.
그다지 좋은 고기는 아니다. 아무리 관광도시라도 이런 거리에서 파는 음식의 질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주인의 솜씨가 제법인 듯 냄새는 별로 나지 않고 익기도 적절히 잘 익었다.
“이거 의외로 괜찮네? 근데 안 받을 거야?”
로브를 걸친 자는 꼬치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크를 주시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움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응? 뭐가?”
로브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그것도 그 수상쩍음에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아름다운 목소리.
“내가 누군지 아는 거지?”
“응.”
“당신과 나 사이의 일을 잊은 거야?”
“뜨겁게 사랑했던 사이라는 거?”
로브 여성의 입이 꾹 다물렸다. 누가 봐도 기분이 상한 게 분명했다.
지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워, 워! 진정하라고. 가벼운 농담이야.”
“…꿍꿍이나 말해.”
“예전에 말했잖아.”
지크가 다시 꼬치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데이트하자고.”
“…….”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브가 살짝 들썩이며 숨어 있던 은발이 주륵 빠져나왔다.
음영 아래서 붉은 눈동자가 살짝 보였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 일순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야, 진짜 더럽게 예쁘네.’
많은 미녀들을 보아온 지크조차 감탄할 정도로 압도적인 미.
그녀는 예전 오스프린에서 바곳 부인을 죽이고 도망간 그 마도사였다.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데이트 비용부터 장소 선택까지 전부 내가 처리하지. 에스코트는 확실히 해줄게. 너는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정말이라니까. 그저 미인과 데이트를 하고 싶을 뿐이야. 게다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굳이 싸울 필요는 없잖아? 네가 죽인 바곳은 내 적이기도 했고, 네가 오스프린의 영주성을 침범한 건 이 영지에서는 관련 없는 일이지.”
“본심은?”
“내가 아가씨에게 궁금한 게 많아서”
“…별로 얘기해주고 싶은 생각 없어.”
“역시 그렇지? 그러니까 얘기해 줄 필요는 없어. 내가 알아서 네 말이나 행동, 유도심문 등으로 빼갈 거니까.”
그녀가 어이가 없어 지크를 바라봤다. 하지만 지크는 뻔뻔하게 턱을 들어보였다.
“내가 그런 건 잘하거든.”
“…그걸 말해버리면 내가 승낙하리라고 생각해?”
“모르지. 아무리 대단한 나라도 사람 마음을 완벽히 읽을 수는 없으니까. 특히 너 같은 낯선 사람은 더더욱. 하지만 지금 하나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네.”
지크가 내밀고 있던 꼬치를 더욱 들이밀었다.
“네가 지금 이 꼬치를 엄청나게 먹고 싶어 한다는 것.”
“…….”
“농담이 아니라 정말 맛있어. 익기도 잘 익었고 소금으로 간도 잘한 데다가 냄새도 별로 안 나.”
주저하는 게 빤히 보이는 그녀를 향해 지크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식으면 맛없어.”
탓!
그녀가 꼬치를 채가듯 빼앗아갔다. 그럼에도 한동안 고민하던 눈치더니 끝을 꽉 깨물어 먹었다.
“…어머?”
감탄사를 흘리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예상대로 무척이나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꼬치의 마지막 고깃덩이를 입에 던져넣고 지크가 물었다.
“데이트 승낙이라고 봐도 되지?”
정신없이 먹던 그녀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 그러나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곧 다시 먹는 데 집중했다.
지크는 그녀가 다 먹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 그럼 이름을 가르쳐 줘. 데이트 상대인데 적어도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 참고로 알고 있겠지만 난 지크야.”
“…라일라. 라일라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