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시간이 점점 밤을 넘어 새벽으로 넘어갈 시간이었다. 승리에 취해 오늘을 즐긴 자들도 하나둘 잠자리에 들 그런 시간.
생각에 잠긴 한 사람이 있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행군, 술자리에서 마신 술 때문에 피곤도 하련만 그는 졸린 기색 하나 없이 침상에 앉아 깍지를 껴 입가에 댄 채 눈앞 책상의 촛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렌 제너드였다.
“…지크.”
그는 지크의 이름을 한번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입을 닫았다.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 출구가 없는 미궁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놈은 뭐지?’
그렌은 지크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이번에 처음 만난 사이지만, 그렌은 지크의 얼굴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하지만 익숙한 건 얼굴뿐이다. 행동거지나 성격은 낯설었다.
‘스틸월도 모어도 아냐.’
그가 아는 지크의 두 모습 중 그 어느 것도 지금 지크의 모습에 들어맞지 않는다.
문득 등허리가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켜켜이 쌓여 층을 이룬 많은 기억 아래에서 불쑥 떠오르는 오래된 이름 하나가 있었다.
‘…브레이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브레이브도 아냐.’
현실도피가 아니다. 그가 아는 브레이브와 지금 지크의 모습도 분명 달랐다.
‘그래, 아냐.’
사고를 치고 애써 외면하며 절대 잘못의 흔적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그는 애써 그것을 다시 기억의 층 가장 밑바닥으로 처박았다.
스틸월도 모어도 브레이브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다.
‘변수.’
그렌이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그것이 분명했다.
이미 횟수로 세는 것조차 무의미할 만큼 많이 겪어온 것이지만 눈앞에 닥칠 때마다 그렌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커다란 변수야.’
성격이나 행동, 활동 영역, 활동 시기 등 그가 아는 것과 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들은 바로는 실력도 그가 알고 있는 이 시기의 지크의 것보다 월등히 높았다.
‘…감시는 없겠지.’
몰려오는 암담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다. 지크 스틸월의 주변에 감시 인원을 배치하지 않게 명령한 것은 그니까. 정확히는 지금은 필요 없었다.
‘대체 왜 이제 와서. 여태껏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던 녀석이!’
그 중요도와 강함을 떠나 지크 스틸월이란 존재는 계획만을 따지자면 무척 편리한 존재였다.
툭하면 그의 계획 밖으로 움직여 그의 ‘완벽한 계획’을 저지하는, 혈압 오르는 존재들과는 달리 그는 대부분 그의 계획대로 움직인 것이다.
특히나 가문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이 시기에는 더더욱.
때문에 언제나 일손이 부족한 그는 지크의 감시를 없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일을 맡기고 그가 일정대로 가문을 나올 즈음에 부하들을 파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어리석음을 그는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젠장!’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걷어찼다. 바닥이 파이며 흙이 튀었다.
‘그놈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지크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수백, 수천’을 더 살아온, 그리고 그만큼의 기회를 얻어온 그렌조차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무의식적으로 한숨이 비집고 나올 만큼 압도적인 힘.
그의 계획대로 움직였을 때도 지크의 힘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계산을 완벽하게 하고 그의 힘과 기술을 전부 꿰뚫어 보고 든든한 조력자들까지 구비해도 지크의 힘 하나 때문에 막혀 실패한 전례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그 지크가 변수로 변해 어떻게 변할지조차 모른다?
‘악몽이군.’
아무리 상황에 따라 그가 변한다 해도 그 압도적인 재능과 폭력적인 마력은 변하지 않을 터.
아무리 못해도 그가 최고 수준의 강자가 될 거라는 건 분명했다.
‘…죽일까.’
아직 그의 재능은 완전히 개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전에 죽인다면 적어도 변수가 변수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적어진다.
그러나 그렌은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지워버렸다.
‘그놈을 죽여서 뭘 어쩌자고. 차라리 그놈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는 게 나아.’
그래야 또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완벽’해지리라.
‘그리고 왜 변수가 됐는지도 알아봐야지.’
힌트는 있다. 아까 지크가, 자신을 변하게 한 존재가 있다며 말한 ‘그’라는 존재.
‘대체 어떤 개자식이지?’
가문을 원망하며 그곳에서 뛰쳐나와 온갖 시련을 겪고 힘만을 추구하는 길로 빠져야 하는 지크를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까지 올려놓은 빌어먹을 자식!
‘어떤 놈인지 반드시 찾아내겠어!’
그래서 모든 정보를 바득바득 캐낸 뒤에 온갖 고통을 주며 죽일 것이다.
아이러니였다. 지크가 말한 ‘그’는 바로 회귀 전의 그렌 제너드였다.
즉, 지금 그렌은 회귀 전의 자신을 향해 분노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한 것도 잠시. 그렌은 다시 고민에 빠져야 했다.
‘…그런데 지크를 감시하기 위해 누굴 보내야 하지?’
지금 그의 세력의 사람들은 아까 생각했듯이 전부 맡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맡은 일을 끝낸다고 해도 바로 다음 계획이 잡혀 있었다. 그 계획들은 적어도 마인 시대가 본격화되기까지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몇몇 개를 캔슬시켜야겠군.’
그럼으로써 또 변화되는 운명이 얼마일까. 그는 머리를 짚었다.
‘…그러고 보니 성녀의 변수도 알아내야 했지.’
지크처럼 확연하게 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성녀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그렌이 좋아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지크가 변수가 되어 영향을 준 것 같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아이네는 순수해야 해. 그것도 모르다니. 하여간 저 빌어먹을 영감들은 도움이 안 돼!’
루벨라를 이름으로 호칭하며 그는 와이그와 트웬을 향해 이를 갈았다.
거기에는 예의범절을 갖춘 명예 성기사 그렌 제너드의 모습은 한 톨도 없었다.
‘그리고 밸리드의 전력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대책을 세워야 하고.’
포르티를 몽땅 제물로 바쳐 만들어졌어야 할 언데드 군단과 밸리드 북부 총지부, 그리고 북부 총지부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사각뿔의 원혼’까지 사라졌다.
정말로 어마어마한 피해다. 그것들이 변화시킬 미래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갑자기 눈이 뻑뻑해졌다. 높은 경지의 무력을 갖고 있는 그라도 예상치 못한 복잡한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정신적으로 피로해졌다.
‘…일단 오늘은 자자.’
그는 침상에 누웠다.
‘이 우스꽝스러운 축하연을 끝내고 대책을 세우자고.’
바로 해결책이 떠오를 만큼 가벼운 문제가 아닌지라 그는 일단 일을 미뤄두길 택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덮는다. 그때 문득 지크가 자신을 향해 뜬금없이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소설책에서 봤다는 문장.
‘다음에 태어나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돼라, 인가.’
머릿속에서 몇 번 되새겨 보곤, 몸을 뒤척여 취침하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정말로 그냥 헛소리를 한 모양이야.’
그렌은 잠을 청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몇 번 더 몸을 뒤척였지만 그도 곧 조용히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카르위먼은 밸리드 북부 총지부를 괴멸시켰다는 소식을 빠르게 알렸다.
자신들의 전공을 자랑하는 것과 더불어 밸리드의 위협이 줄어들었다는 걸 알리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밸리드에 대한 경고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카르위먼 신도들은 기뻐했다. 자긍심을 느끼고 얼굴에 미소를 걸고 다녔다.
신전을 휘감고 있는 긍정적인 기운이 주변까지 뻗어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밸리드 토벌의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지크는 그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고 자신의 두 종과 함께 길을 떠나려 채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이미 화려한 공훈식은 끝난 상황.
지크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물질적 보상을 받았다.
“지크 님은 정말로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시는군요.”
마중 나온 와이그가 말했다.
“조금 더 쉬시다 가는 게 어떤가요?”
같이 마중 나와 있던 루벨라가 권했다.
지크의 두 종이 지크의 눈치를 봤다. 그들로서는 얼마 정도 더 신전에 머무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썩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충분히 쉬었습니다.”
역시였다. 지크의 말에 한스와 스녹은 시선을 다시 전면으로 돌렸다. 이제는 실망하는 기색도 없었다.
와이그와 루벨라도 지크의 말을 예상했는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지크 님은 이번에 명예 성기사 자격을 얻었으니 앞으로의 여행에서 카르위먼의 신전이 있으시다면 들러주시기 바랍니다. 신전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종종 신전을 통해 명령도 내릴 거고 말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움 요청입니다. 그리고 지크 님도 그걸 전부 알고 명예 성기사를 받으신 것 아닙니까?”
“후후, 그렇죠.”
지크는 웃으며 긍정했다.
“그래도 바로 지크 님의 도움을 청하진 않을 겁니다.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또다시 도움을 청하기엔 저희도 면이 서지 않아서 말이죠.”
“걱정 마십시오. 저도 도움을 청한다고 재깍재깍 받지는 않을 테니까요. 제 뻔뻔함은 루벨라 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루벨라가 작게 웃었다.
“그럼요. 지크 님의 뻔뻔함은 잘 알고 있고말고요. 아마 거기 계신 한스 님과 스녹 님을 제외하면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을걸요?”
한스와 스녹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급히 멈췄다.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카르위먼의 성녀가 이런 무자비한 함정을 팔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이 눈빛으로 보내는 무언의 항의에 루벨라가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두 사람을 함정에 빠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농담이에요.”
루벨라가 덧붙였다.
하지만 지크의 환한 웃음을 보니 그녀의 뒤늦은 도움은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래봤자 저 두 놈이 한동안 지옥을 볼 거라는 건 변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죠.”
두 사람이 소리 없이 절규하는 걸 루벨라는 미안하게 쳐다봤다.
쓴웃음을 지으며 이 가벼운 촌극을 보고 있던 와이그가 지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디로 갈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뭐 발길 가는 대로 가면 어디든 나오지 않겠습니까?”
“어쩔 때는 지크 님의 그 자유가 부럽군요.”
“여행자가 되겠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제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해드릴 테니까요.”
“카르위먼에서 잘리게 된다면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지크와 와이그가 악수를 나눴다. 루벨라와도 악수를 나누고는 뒤를 돌았다. 한스와 스녹도 둘과 인사를 하고 지크의 뒤를 따랐다.
예전에도 그랬듯 지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해가 기울며 빛을 상징하는 듯한 새하얀 신전의 그림자가 마치 지크에게 길을 비켜주듯 움직였다.
화사한 햇살이 지크에게 내리꽂혔다.
와이그에게 한 말과는 다르게 지크는 이미 다음 목적지를 점찍어둔 상태였다.
‘그걸 찾으러 가야지.’
이번 전투에서 지크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고 지크도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인 시대보다 평화로운 시대라고 해도 세상에 사건사고는 충분히 많았고 지크 자신의 더러운 성질은 그 사건사고에 잘 휘말리는 최적의 체질이었다.
때문에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지크는 검 하나를 떠올렸다.
보통 은빛을 띄고 있는 여타의 검들과는 달리 검은색의 검신을 자랑하는 검.
마검 토르니움.
회귀 전, 네 명의 부하와 함께 ‘힘의 마왕 지크 모어’를 상징하던 검이었다.
‘그 녀석을 찾는다면 어느 정도 힘을 메꿀 수 있을 거야.’
토르니움의 위력을 떠올리며 지크는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