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이상한 소리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 모두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지크는 오직 그렌만 쳐다봤다. 그의 얼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미세한 변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렌이 곤혹스러워했다.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려는 듯 그의 어투엔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
미심쩍은 범죄자를 탐색하듯 지크의 시선이 계속 그렌의 얼굴에 따라붙는다.
슬슬 그렌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마저 어색해지려는 순간, 지크가 빙긋 웃었다.
“하하! 별거 아닙니다. 그저 제너드 씨를 본 순간 영웅의 풍모가 보여서 말이죠. 어렸을 적 읽었던 그림책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뭡니까. 영웅이 악당을 물리치는 순간에 했던 말인데, 제너드 씨가 그 영웅과 이미지가 겹쳐서 저도 모르게 물어봤습니다.”
“흐하하하! 그렇군요! 하긴, 제너드 님을 보면 누가 봐도 영웅처럼 보이긴 하죠.”
“과찬이십니다.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트웬까지 크게 웃으며 거들자 그렌이 얼굴을 붉히며 부정했다.
자칫 어색해질 뻔했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과찬이라니요. 제가 들은 이야기가 몇 개인데요. 제너드 님은 가슴을 펴고 자랑을 하셔도 됩니다.”
“음. 저도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은 바 있죠.”
트웬과 와이그가 번갈아가며 그렌을 추켜세웠다.
비록 완전히 카르위먼 소속은 아니라지만 그들이 명예 성기사의 칭호를 준 자가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것에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게다가 그렌은 실제로 상당히 높은 공을 세우고 있기도 했다.
“그러게요. 지크 님과는 다르시네요. 지크 님은 겉모습이나 태도나 절대로 명예 성기사로 보이진 않죠.”
트웬과 그렌이 놀라 루벨라를 돌아봤다. 설마 차대 성녀인 그녀의 입에서 저런 비꼬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직 루벨라의 변한 성격은 카르위먼에서도 널리 퍼지지 않았다.
지크가 충분히 화를 낼 수도 있는 무례한 말이기에 트웬은 긴장했다.
하지만 지크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루벨라를 제지할 거라 생각한 와이그는 오히려 웃어젖혔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 위기에 빠지셨던 때로부터 전혀 나아가지 않으셨군요. 루벨라 님의 친구로서 슬프고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로서 카르위먼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
작은 도발을 했던 루벨라의 입이 닫혔다. 그리고 와이그는 더욱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무래도 루벨라 님은 아직 지크 님에게 상대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칫!”
루벨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좋아요. 제가 졌네요. 졌어요. 제너드 님과 타입은 다르지만 지크 님도 어엿한 영웅이라고 생각해요.”
“…….”
이것에는 지크가 말문이 막혔다.
영웅이라니. 착한 일을 한답시고 다녔지만 설마 이제는 영웅 소리마저 듣는단 말인가.
“어라? 말이 없으시네요. 설마 부끄러우신 건가요?”
루벨라가 뭔가를 오해한 것 같다. 귀엽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태도가 뭔가 속에서 울컥하게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아뇨. 루벨라 님의 패배 선언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그때는 방금 말씀하신, ‘겉모습은 그렇지 않더라도 실제론 다르다’라는 어필을 원래부터 할 생각이었다고 방어하면서, 왜 그렇게 성급하게 자기가 아직 편견에 빠져 있다는 결론을 내냐고 밀어붙이셨어야죠.”
“아,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적어 둬요, 적어 둬. 이런 거 가르쳐 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루벨라, 당신 같은 분은 특히요.”
“머리 한구석에 분명하게 써 갈겨 둘게요.”
“…이거 놀랍군요.”
지크와 루벨라의 대화를 놀라 쳐다보던 트웬이 말했다.
“루벨라 님이 변하셨다는 얘기를 듣긴 했습니다만 이제는 이런 농담까지도 곧잘 하시는군요. 입담도 참 좋아지셨습니다.”
“아, 시, 실례했어요.”
새삼 이곳에 있는 게 와이그와 지크만이 아니란 걸 깨닫고 루벨라가 사과했다.
“왜 사과를 하십니까? 아무리 루벨라 님이 차대 성녀라고 해도 친구와 하는 농담 따먹기까지 제한되지 않습니다. 카르나 님도 그렇게 꽉 막히지 않으셨어요. 선대 성녀들께서도 입이 험한 분이 많았죠. 아무래도 험한 일에 투입되는 일이 많으니까요. 강단도 없이 중요한 일에 아무 역할도 못 하는 자들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와이그가 트웬의 말에 동의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루벨라에게 강단을 수도 없이 강조한 그가 아니던가.
“그래도….”
머뭇거리면서도 부정적인 뉘앙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목소리의 주인인 그렌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녀님이란 대외적으로 교황님과 같이 카르위먼의 얼굴이 아닙니까? 건방진 말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의 성품을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당연하죠.”
그렌의 조심스러움이 민망할 정도로 트웬은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기본적인 예의와 성품은 갖춰야 합니다. 성녀의 의무는 우리 같은 무지렁이 기사들같이 전장에만 서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애초에 성녀 아니, 성녀 후보의 발탁은 강단보다는 그 능력과 성품을 봅니다.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강단을 강조하는 겁니다. 다른 것들은 이미 성녀 후보 검증 과정에서 이미 검증된 거니까요.”
“요새는 그 성녀 후보 검증도 믿을 수 있을까 의심되지만 말이죠.”
와이그가 투덜거렸다.
루벨라를 질투해 그렇게 괴롭히던 첼시 윈드네의 경우가 생각이 난 것이다.
루벨라가 어색하게 웃었고 트웬도 부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가 카르나 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려 한다 해도 결국은 인간. 어쩔 수 없이 헛점이 있을 수밖에 없죠. 그걸 걸러내려고 두 차례에 걸쳐 검증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결국에 어울리는 분이 성녀로 오르게 됐고 말이죠.”
와이그를 달랜 트웬이 빙그레 웃으며 그렌을 향해 말했다.
“대답이 되셨습니까?”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젊은 사람의 도움이 되는 건 나잇살 먹은 사람에게도 기쁨입니다. 그런 질문은 언제든 환영이에요. 젊은이가 나아가는 걸 보는 건 언제 봐도 기꺼운 일이니까요.”
트웬이 껄껄 웃었다.
“하지만 루벨라 님도 조금은 주변 눈치를 보셔야 할 겁니다. 성녀를 무슨 보기 좋은 인형으로 생각해서 사석에서조차 무조건 좋은 모습만 보이라고 요구하는 고집불통 인간들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명심할게요.”
“하지만 저와 있을 때는 언제나 그러셔도 됩니다. 전 루벨라 님의 변화를 기꺼워하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명심할게요.”
루벨라가 활짝 웃었다.
“좋습니다. 솔직히 루벨라 님의 연약함은 걱정이었는데 그 마지막 단점마저 사라졌을 때는 퍽이나 놀랐죠. 역시나 포르티에서의 사건이 결정적이었겠죠?”
“그렇죠. 그때까지의 제가 얼마나 세상물정을 모르고 있었는지 그리고 밸리드 신도들이 얼마나 악독한 족속들인지 완벽히 깨달은 사건이니까요.”
포르티의 사건은 이미 카르위먼 내에 상당히 퍼져 있었다. 지크의 활약도 중요한 것은 포장되어 숨겨져 있었지만, 그래도 알려져도 상관없는 정보 정도는 퍼져 있었다.
“그곳에서 지크 님의 도움이 정말로 컸어요. 아마 따지자면 제 변화는 지크 님이 이끌어주신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그 점에서는 감사해요.”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뭐, 저도 변화하게 된 계기가 있어서 루벨라 님을 그렇게 도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게 있습니까?”
갑자기 그렌이 끼어들었다.
“가능하다면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흥미가 가는군요.”
“분명 착하게 살아보라고 권유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했죠? 아까 지크 님이 말한 소설 속의 영웅과 비슷한 사람이네요. 혹시 그 사람인가요?”
예전, 지크와 처음 만났을 때 얘기를 용케 떠올려 루벨라도 흥미를 가진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그의 말 때문에 제가 착한 일이란 걸 하게 됐죠.”
“거칠게 살아오셨다고 했죠.”
“네. 무척 거칠게 살아왔습니다.”
“이해해요. 지크 님은 가문의 일이 있었으니까요.”
예전 한스가 그랬던 것처럼, 루벨라는 지크가 가문 내에서 당해왔던 차별을 거칠게 살아왔다는 뜻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와이그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지크가 거칠게 살아왔다는 뜻은 개 같은 짓을 하며 살아왔다는 것으로, 둘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지만 지크는 당연하게도 그들의 정보를 수정해주지 않았다.
“그때 만난 게 그입니다. 단, 그가 누구인지 정체를 밝힐 수는 없군요. 하지만 확실한 건, 정말로 정의감을 휘감고 있는 것 같은 작자란 겁니다. 오해하실까 봐 말하건대 전 그 인간을 별로 좋아하거나 그러진 않습니다. 오히려 싫어하죠. 개인적으로 정말로 재수없어 하는 타입입니다. 하지만 인정은 합니다. 그리고 그의 조언대로 사니, 뭐랄까…. 제 성격과 어울리진 않지만, 나쁘진 않더군요.”
“정말로 멋진 만남이었네요.”
“글쎄요. 멋진 만남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지크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제가 여기서 루벨라 님과 농담따먹기를 하진 못했겠죠.”
“역시 멋진 만남이 맞아요.”
“저도 동감입니다.”
루벨라에 이어 와이그까지 동의하자 지크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지크의 시선이 그렌에게 옮겨갔다. 그렌은 진지하게 지크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조언대로 살아보고 있고 의외로 이런 삶도 나쁘지 않았다, 라고요.”
지크는 웃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네. 개인적인 흥미에 이렇게 대답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지크 님.”
“별말씀을요.”
그 후로도 천막 안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흘렀고 밤은 점점 깊어갔다.
* * *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며 지크가 간이 침상에 털썩 누웠다.
성전을 승리하고 온 사람들을 위해 상당히 신경을 썼는지 지크가 누운 곳은 간이 침상답지 않게 적절하게 푹신거렸다.
팔을 이마 위에 올리고 천막의 천장을 쳐다봤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방금 있던 일이 스쳐지나갔다.
‘그렌 제너드라….’
회귀 전 자신의 길을 막아서고 자신을 죽인 이.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길을 가리킨 이.
‘회귀자는 아닌 거 같았어.’
지크는 눈을 깜박였다.
다음에 태어나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돼라. 그가 죽기 전 그렌 제너드가 그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렌 제너드는 그 말을 모르는 것 같았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회귀를 일으킨 것이라면, 그래서 같이 회귀한 자가 있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자들은 용사 파티. 그중에서도 ‘운명을 비트는 열쇠’에 찔린 그렌 제너드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했건만.
‘뭐, 루벨라도 회귀하지 않았으니 저놈도 회귀를 안 했을 수도 있겠지. 애초에 회귀를 한 것 같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내가 본 적도 없는 여자니까.’
의외로 ‘운명을 비트는 열쇠’는 회귀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렌이 연기를 한 걸 수도 있었다. 지크 자신도 회귀에 관한 중요한 정보는 숨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놈이 그러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놈이 회귀를 했건 안 했건, 굳이 그렌 제너드와 엮일 생각은 없었다.
그를 인정도 하고 그의 조언을 따르고는 있지만, 만약 회귀 전의 악연을 이유로 자신을 적대한다면 자신도 들이받으면 그만이었다.
그와의 인연은 딱 거기까지다.
‘그래도 어쨌든 의사표현은 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네 조언을 받아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그렌 제너드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회귀 전, 지크에게 충고를 내뱉었을 때의 그렌의 마음을 그는 모른다. 드디어 마지막 마왕을 쓰러뜨린다는 기쁨에 갑자기 정의감이 샘솟아 내뱉은 말일 수도 있고, 정말로 진실하게 그 말을 내뱉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지크는 상관없었다.
그저 이 시간대의 그렌을 만난다면 그 말을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젠 상관없지.’
하고 싶은 말도 끝냈다. 더 이상 그에게 구애될 일도 생각도 없다.
지크는 뒷머리에 깍지를 끼고 두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편한 숨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