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그날 저녁, 카르위먼은 일단 밸리드의 신전에서 하루를 묵고 가기로 했다.
전쟁에 대한 피로는 경건한 카르위먼의 신도들도 피해갈 수 없어 휴식이 절실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크가 구한, 밸리드에 제물로서 갇혀 있던 사람들도 몸을 추스르고 치료를 받아야 했다.
신관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는 데다가 포션도 풍부하게 제공되는 카르위먼이라 부상병들은 대부분 회복되었지만, 사지가 결손될 정도의 부상은 어쩔 수 없이 절단면만 회복해야 했다.
잘려나간 부위를 찾을 수 있다면 회복이 가능하지만 치열한 전투의 상황, 그리고 주 전장이 호수의 위라는 환경상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예상보다 피해를 적게 입은 것도 분명해, 카르위먼 신도들의 표정은 밝았다.
지크 일행은 세 명이서 방 하나를 배정받았다. 상당히 크고 화려한 방이었다.
카르위먼이 지크 일행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그 방 배정이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의 전투가 고됐는지 한스와 스녹은 일찌감치 곯아떨어져 코를 골았다. 하지만 지크는 깨어 있었다.
그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채 트리슬로와에게 죽은 소년과 가족, 이웃들의 유해가 담긴 작은 항아리를 앞에 두고 바라봤다.
‘퍽 만족스러운 복수였지?’
온갖 협잡질을 하고 복수도 해본 지크에게 있어서도 이번 건 상당히 완성도 높은 복수였다.
계획은 그렇게 섬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순했다.
지크는 처음부터 트리슬로와를 그가 도망친 협곡에서 끝장내려 생각하고 있었다.
회귀 전의 경험에서, 전쟁에서 진다면 트리슬로와가 그곳으로 도망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것도 심상치 않은 부상을 입은 채로.
‘그놈 성격이라면 끝까지 저항하다 정말로 몸에 한계가 와야 도망칠 테니까.’
실제로 회귀 전, 지크가 쳐들어왔을 때 그랬다.
‘비밀통로도 알고 있는 데다가 밸리드의 추기경씩이나 되는 인간이니 어떻게든 지부에서 탈출은 가능해.’
신전에 잠입한 이유는 양동작전을 펴 카르위먼을 유리하게 하며 혹시라도 복수를 더욱 잘 이끌 만한 기회가 있는지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신전의 비밀통로를 완전히 꿰고 있었기에 시도했던 일이다.
‘그리고 대박이 났지.’
‘사각뿔의 원혼’. 놈들의 움직임과 몬스터의 움직임에 뭔가 연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게 ‘사각뿔의 원혼’ 때문일 줄이야.
그걸 탈취한 덕분에 지크는 자기 멋대로 트리슬로와를 휘두를 수 있었다.
‘‘전부 너 때문이야’는 마지막에 협곡에서나 써 먹을 줄 알았는데.’
소년을 고문하며 그 일이 전부 소년 때문이라고 트리슬로와 놈이 지껄였다 들었을 때 지크는 반드시 그 말을 돌려주겠다 맹세했다. 그리고 일이 잘 풀려 아주 깔끔하게 써먹었다.
‘어쨌든 일이 잘 풀렸어. 카르위먼을 끌어들인 것도 주효했고.’
하지만 잘 풀린 계획에 반해 입맛이 쓰기도 했다.
‘고작해야 밸리드 북부 총지부 하나 괴멸시키는데 카르위먼의 힘까지 빌려야 하다니.’
나름 계획은 짰지만 이번처럼 완벽한 복수를 성공한 데에는 운도 많이 따랐다. 솔직히 지크의 손으로 트리슬로와의 숨통을 끊지 못할 확률도 충분히 있었다.
‘역시 당장에 휘두를 힘이 필요한가.’
지크의 마력은 여전히 수월하게 해방되고 있고, 한스, 스녹에게 시키는 훈련에 절대 못지않은 강도로 스스로 훈련도 하고 있지만 그래도 힘이 모자랐다.
‘시간도 많으니 힘은 천천히 쌓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답답해. 암살자 놈들 같은, 당장에 힘을 써야 할 대상도 생겼고. 역시 그걸 찾으러 가야 하나.’
마왕으로 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후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지만 역시 그게 필요할 것 같다고 지크는 생각했다.
* * *
다음날, 카르위먼의 신도들은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밸리드의 흔적이 잔뜩 서린 이 공간에 있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카르위먼은 떠나기 전 꼴보기 싫은 밸리드의 신전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콰아아아앙
와이그의 칼질 한 방에 주춧돌이 박살나고 기둥이 잘리며 벽이 터져나간다. 거기에 카르위먼의 다른 신도들도 거들었다.
우르르!
오랜 기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륙 북부의 모든 지부를 총괄하던 밸리드 북부 총지부의 신전은 그렇게 무너졌다.
카르위먼 신도들은 다시 호수를 건너고 동굴을 지나 황야로 나왔다. 그리고 바로 총단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지크 일행은 행렬 가장 앞에서 와이그, 루벨라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지크도 한동안은 그들과 일정을 같이 할 생각이었다.
가려고 정한 곳까지 얼마 정도는 동선이 겹치기도 하고 카르위먼 신도들과 같이 움직이면 음식과 숙소 같은 것들을 모두 챙겨주니 편하기도 했던 것이다.
앞서가던 일행이 뭔가를 발견했다.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와 열을 맞춰 오는 것이 누가 봐도 군사집단이었다.
경계를 한 것도 잠시. 무리에서 펄럭이고 있는 여러 개의 깃발 중 하나를 발견하고 일행은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와이그가 입을 열었다.
“지원군이군요.”
깃발에는 카르위먼의 문양이 박혀 펄럭이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성하께서 최대한 지원군을 모아보겠다는 얘기는 하셨습니다. 그래도 자체 방어 병력도 필요하고 해서 썩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 저런 방법을 쓰셨군요.”
접근하는 집단엔 카르위먼의 깃발만이 아니라 근처 여러 영지의 깃발도 같이 휘날리고 있었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 영지에도 도움을 청했나 보군. 나쁘지 않지. 아무리 카르위먼의 밸리드 처단 목적이라고 해도 타 집단이 영지 근처에서 무력 행동을 하는 걸 좋게 볼 세력은 없으니까. 지원군에 자신들의 병력을 끼워넣어 어떤 군사작전을 펼치는지 감시하는 게 차라리 속 편하지.’
아마도 교황이 외교적으로 힘을 쓴 것일 것이다.
‘감시를 위해 파견됐다 해도 카르위먼은 외교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데다가 실질적 전력을 지원받을 수 있고. 영지에도 나쁜 판단은 아니야. 비용이야 카르위먼에서 지원해줬을 거고. 무엇보다 말석이라도 ‘성전’에 끼었다는 명분은 무척이나 귀중한 거니까.’
아마 밸리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만 아니었다면 교황은 초반부터 연합군 지원을 위해 움직였을 것이다.
‘하여간 만만치 않은 노인네야.’
다른 건 둘째 치고 연합군을 창설해 지원을 보내는 데 걸린 시간이 정말로 빨랐다. 지크는 새삼 카르위먼의 위세, 그리고 교황의 정치력에 놀랐다.
얼마 안 있어 두 집단이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와이그 경!”
“어서 오시오, 트웬 경.”
와이그가 연합군의 가장 앞에 있는 성기사를 맞았다.
“성하의 명령 하에 와이그 경을 돕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중에 와이그 경이 밸리드 놈들 토벌에 성공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이렇게 마중을 나왔고요.”
이미 와이그는 작전의 성공을 알리러 전령을 보낸 상황이었다. 트웬은 도중에 그 전령을 발견하고는 와이그를 마중 나온 것이다.
고작해야 마중에 대규모 병력을 이끌었다는 게 어처구니없었지만 아마도 이것 또한 외교적인 행동일 것이다. 기껏해야 영지의 병력을 이끌고 ‘성전’에 끼러 왔는데 이미 토벌이 끝났다고 바로 흩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아마도 영지의 기사들이 명성 높은 와이그나 성녀가 될 루벨라와 얼굴이라도 익히러 온 거겠지. 우린 이만큼이나 카르위먼을 위해서 노력했다라고 생색을 내려 병력도 죄다 끌고 온 거고.’
“아하하, 이거 무슨 마중씩이나. 부끄럽습니다.”
와이그가 겸손을 떨었다.
“아뇨. 자그마치 밸리드 북부 총지부를 박살내지 않으셨습니까. 이 정도의 공은 우리 카르위먼의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것이니 이 정도의 예우는 받으셔야죠.”
“저만의 힘이 아닙니다. 루벨라 님은 물론 다른 카르위먼의 신도들도 열심히 싸웠고, 무엇보다 여기 계신 지크 님과 그 종 두 분의 협력이 없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전과였습니다.”
와이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하하하! 과연, 모든 사람의 힘이 합쳐졌으니 그런 큰 공을 세우셨겠죠.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어서 다음 도시까지 가시죠. 영웅분들을 위해 제가 자그마한 파티를 준비해놨습니다.”
전투의 피로에 지친 그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미리 준비한 모양이었다. 와이그도 거절하지 않았다.
“기대가 되는군요. 그럼 어서 가볼까요?”
두 무리가 합쳐져 천천히 황야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무리가 끼어들었음에도 지크와 두 종의 자리는 와이그의 옆자리였다.
트웬을 포함해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지크 일행을 흘끔흘끔 바라봤다. 누가 봐도 와이그가 아끼는 게 보이는 그들에게 호기심이 인 것이다.
그러나 지크는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오로지 단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지원 온 성기사들의 가장 앞 줄에 있던 자. 화려한 외모와 진중한 분위기가 어울려, 마치 ‘정의의 성기사란 이런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인물이 있었다.
지크가 아는 인물이다. 아니, 알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이야.’
지휘부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자를 떠올리고 지크는 묘한 감흥을 안았다.
‘그렌 제너드.’
회귀 전, 지크를 죽인 태양의 용사. 그가 지원군 안에 있었다.
* * *
카르위먼 신도들은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쳤다. 트웬이 파티를 준비해놓았다는 곳은 마을이 아니었다. 규모가 크지 않았기에 카르위먼의 병력이 충분히 먹고 마실 정도의 물자가 없던 것이다.
그들은 얼마를 더 움직여 목적했던 도시에 도착했다. 트웬의 명령을 받은 몇몇 신도들이 도시 옆에 넓은 숙영지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상태는 꽤 좋았다. 카르위먼 신도들은 숙영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넓은 지휘부 천막에선 와이그를 비롯한 지휘부 사람들과 지크 일행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엔 그렌 제너드도 끼어 있었다.
와이그는 트웬에게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전쟁을 이겼는지 떠들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실제와 꽤 차이가 있었다.
북부 총지부를 카르위먼이 알아냈다든지, 신전에 갇혀 있던 제물들이 사용한 비밀 통로도 카르위먼이 가르쳐줬다든지, 지크가 트리슬로와를 처단할 수 있던 건 미리 잠복을 지시한 와이그 때문이라든지.
철저하게 지크의 공을 깎고 카르위먼의 공으로 돌렸다.
물론 지크를 상당히 좋아하는 와이그가 일부러 이런 일을 할 리 없다. 예전 포르티의 사건 때 그랬던 것처럼 지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세부적인 이유가 좀 달랐다.
예전엔 지크가 밸리드의 표적이 될까 봐 그랬다. 이번에도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지크와 종들, 특히 종들인 한스와 스녹의 활약이 커 어떻게든 소문이 날 수밖에 없긴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와이그를 비롯한 카르위먼의 상층부가 염려한 건 지크가 갖고 있는 정보였다.
그가 지금껏 꺼낸 무궁무진한 정보들은 다른 세력이 침을 흘릴 정도의 것들이다. 만약 카르위먼이 조금만 엇나간 집단이었어도 지크의 정보의 출처나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 등을 강압적인 방법으로라도 캐려 했을 것이다.
물론 지크도 카르위먼이기에 그런 정보를 아낌없이 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카르위먼이 강압적으로 나온다 해도 빠져나갈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지크가 약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지크는 이번에도 카르위먼의 정보 통제에 흔쾌히 찬성했다.
지금 지크의 공은 양동작전을 통해 크게 공을 세운 자, 딱 그것뿐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지크를 칭송했다.
“하하하하하! 이거 근래에 우리 카르위먼에 좋은 일만 생기니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밸리드 놈들에게 한 방 먹였고 이제 성녀님이 탄생할 것이며, 믿음직한 명예 성기사도 둘이나 탄생을 했으니까요!”
트웬이 지크와 그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서로를 처음 보실 겁니다. 앞으로 같이 싸울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서로 인사를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렌 제너드입니다.”
그렌이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지크는 뭔가 이루 말하기 힘든 감정이 솟았다.
자신을 죽인 이와 같은 식탁에 앉아 술을 먹는 건,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리라.
그렌 제너드는 여전했다. 열 나올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는 정의감이 구체화되어 반짝이는 것 같다.
친근한, 하지만 예의를 잃지 않는 재수 없는 태도도 여전하다. 다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젊어 보이긴 했다.
‘이때부터 재수가 없는 놈이었군.’
지크가 인정하는 인간들 중 최고인 놈이었지만 그래도 이 생리적 혐오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동안 루벨라와 같이 다녀 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그렌 제너드는 예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느낌은 느낌이고 지크는 그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었다.
“지크입니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갑작스러운 지크의 질문에도 그렌은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다음에 태어나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