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털썩!
트리슬로와가 쓰러졌다. 가슴을 부여잡고 꺽꺽거리는 모습이 폐가 상한 모양이었다. 숨을 제대로 못 쉬고 피거품을 문다.
지크가 그의 위에 올라탔다.
“자, 그럼 하늘로 가는 불쌍한 영혼에게 구원조치를 취해줘야지.”
지크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게 뭐게?”
그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를 뜻하는 브로치였다. 당연히 트리슬로와도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내가 널 위해서 관심도 없던 이걸 받아왔다는 거 아니겠냐. 카르위먼은 명예 성기사도 카르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해줄 수 있으까. 그래서 네가 가는 길 내가 잘 보내주려고 받아왔어. 물론 축복은 카르위먼의 방식으로 할 거야.”
트리슬로와는 독실한 밸리드의 신도다. 그리고 밸리드와 카르위먼은 적.
그것도 서로 종교적인 믿음이 완전히 다른 앙숙이다.
그런데 밸리드 신도에게 카르위먼 식의 축복을 해준다면 그게 축복일까?
아니, 저주와 다름없다. 그것도 무엇보다 끔찍한 저주.
트리슬로와가 반항했다. 아니, 허우적댔다.
지금의 트리슬로와가 할 수 있는 반항은 그저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물론 쌩쌩한 지크에게 그런 깜찍한 반항이 통할 리 없었다.
“왜 그러는 거야? 좋은 말씀 전해준다니까. 죽기 전에 회개하라고 내가 널 생각해서 해주는 거야.”
지크가 트리슬로와의 반항을 한손으로 저지했다.
“아, 그리고 네 장례도 내가 치러주려고. 분명 밸리드의 장례는 수장이었지? 커다란 돌덩이 같은 걸 시체에 달아 물 속에 가라앉히는 식으로 말이야. 내가 보기엔 너희들 장례는 문제가 있어. 죽은 것도 서러운데 어떻게 그런 차갑고 어두운 물 속에 쳐 넣는단 말이야?”
종교적인 교리와 그들이 믿는 신에 관련되어 그런 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지만, 그래서 죽어서 물 속에 들어가는 걸 전혀 꺼리지 않는 그들이지만, 그런 것 따위 지크가 알 바인가.
그는 그저 트리슬로와를 괴롭히면 그만이다.
“그래서 난 색다르게 네 장례를 치뤄 주려고 해. 일단 네 몸을 화장할 거야. 그리고 그 뼛가루를 셀록블럼 산봉우리 위에다 뿌리는 거지.”
셀록블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다. 지크가 내뱉는 장례 방식 하나하나가 밸리드의 장례와는 완전히 반대방향이었다.
“어때. 내 생각 좋지?”
“이… 쿨러! 개 자…식…!”
트리슬로와가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하지만 트리슬로와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그것뿐이었다.
“어이구, 조금 더 기다리다간 네가 죽어버리겠네. 그럼 안 되지. 빨리 좋은 말씀 듣자고. 아, 그 전에.”
지크는 무릎으로 트리슬로와의 팔을 깔아뭉개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마법 상자에서 작은 항아리 하나와 카르위먼의 성서를 꺼내 들었다.
성서를 한쪽 팔에 낀 지크가 작은 항아리를 트리슬로와의 면전에 들이밀었다.
“이게 뭔 줄 알아?”
“알 게…뭐…야…!”
“네 손에 죽은 소년과 그 가족,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웃의 유골함이야.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데리고 왔지.”
지크는 유골함을 조심스레 옆에다가 두었다.
“자, 저 사람들에게는 네가 죽어가는 게 잘 보이도록 가장 좋은 자리를 챙겨 줬어. 그러니 우린 계속 볼거리를 제공하자고.”
지크가 두꺼운 성서에 미리 표시해둔 페이지를 펼쳐 든다.
그건 죽음으로써 카르나에게 다다르는 이들을 위한 축복의 구절이 적혀 있었다.
“여기 있네.”
한 손으로는 책을 들고 한 손으로는 명예 성기사의 브로치를 트리슬로와의 얼굴에 갖다 댔다.
“이거…치워…!”
트리슬로와가 다시 거세게 반항했다. 그러나 지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구절을 읽어나갔다.
“그리하여 카르나 님의 앞으로 향하는 빛의 길이 만들어질지니. 아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카르나 님의 성광이 너를 감싸고 빛의 길을 깔아 그분의 곁으로 인도하실 것인 즉.”
“…닥…쳐…!”
“지금껏 너를 옭아맸던 모든 근심과 걱정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며.”
“으…그으으윽…!”
“너의 그 충실한 섬김이 빛을 따라 너와 함께 올라올 것이니라.”
“아, 아아아아아악!”
트리슬로와가 울부짖었다.
그도 밸리드의 신도로서 언젠가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있다. 밸르의 거룩하신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작 지인 중 몇 놈 죽었다고 질질 짜는 놈들이나 앙숙인 카르위먼 등등 자신들을 원망하는 인간들은 온 세상에 넘쳐나는 것이다.
하지만 두렵진 않았다. 밸르를 위해서 바친 생, 밸르를 위해 싸우다 죽는다면 그 어떤 죽음이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만큼이나 비참한 죽음은, 트리슬로와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비켜어어! 쿨럭!”
당장이라도 고막을 박살내고 싶다. 그래서라도 저 가증스러운 카르나의 헛소리를 듣지 않고 싶었다.
하지만 양손은 봉쇄되어 있다. 눈이야 감을 수 있지만 귀는 막지도 못한다.
“너의 영혼은 알맞은 세월과 알맞은 벌, 알맞은 경과를 거쳐 태초의 순수함을 가지게 될 것이니, 두려워 말고 너의 죄를 씻으라.”
“제…쿨럭! 제기랄…!”
트리슬로와가 아무리 울부짖고 버팅기고 반항한다 해도 지크는 묵묵히 성서를 읽어내려갔다.
트리슬로와의 움직임이 점점 잦아들었다. 내뿜는 피거품이 한층 더 많아지고 쌕쌕대는 격한 숨소리는 줄어갔다.
얼마 안 가, 트리슬로와의 움직임이 천천히 멎어 갔다. 그에겐 이미 지크의 축복의 말도 뭔가 왱왱대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 흐릿해진 시야로 뭔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아.’
트리슬로와는 직감했다. 그건 바로 비참하게 죽어감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자신을 밸르가 마중 온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온몸에 깃든 분노와 슬픔이 일거에 날아갔다.
‘난 틀리지 않았어!’
그것만으로도 지금껏 겪은 아픔이 아무래도 좋아졌다. 지금은 오히려 지크에게 미소를 지어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놈의 웃긴 표정을 볼 수 있을 텐데.’
그게 조금 아쉬웠지만 밸르께서 자신을 마중나왔는데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트리슬로와는 조용히 밸르가 자신을 데려가길 기다렸다.
밸르는 천천히 그의 얼굴로 다가오더니 방향을 살짝 틀어 그의 얼굴 옆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다 너 때문이야!]
트리슬로와가 눈을 치켜떴다.
흐릿한 시야가 순간적으로 맑아졌다. 그의 눈에 비친 건 밸르가 아니었다. 소름끼치도록 웃고 있는 지크의 얼굴이었다.
“꺽!”
너무 놀랐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소리가 턱턱 막혔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을 치떴다.
덜컥!
트리슬로와의 심장이 멎었다. 그저 죽을 때가 됐는지, 아니면 너무 놀라 그런 것인지는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심장이 멎은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털썩!
트리슬로와의 고개가 옆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충격을 알려주듯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일그러져 있었다.
“후!”
지크가 숨을 토했다. 그리고 옆에 놓아둔 유골함을 보고 말했다.
“만족했냐? 이래 봬도 상당히 공들여 한 복수다. 그러니까 이것 보고 편안하게 좋은 데로 가라.”
* * *
전투는 끝났다. 결과는 당연히 카르위먼의 압승. 이걸로 밸리드 북부 총지부는 괴멸했고 밸리드는 뼈아픈 타격을 입었다.
밸리드 신도 중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항복을 한 자도 없고 항복했다고 해도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믿음을 갖고 있는 자들의 충돌은 보통 이런 식으로 끝나는 법이다.
와이그는 일단 밸리드 신전 안에 본부를 차렸다. 밸리드 놈들의 건물을 쓰는 것이 더럽게 찝찝했지만 그래도 밖에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이건 엄연히 카르위먼이 점령한 전리품이 아닌가.
콰드득!
물론 신전 안에 있는, 밸르의 상이나 문양 같은 것들은 철저하리만치 찾아 부쉈다.
한 곳에 부상 병동을 만들어 치료를 시작했고 다른 쪽에는 순교한 자들을 조용히 모셨다.
그렇게 대다수의 일을 처리하니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저, 와이그 님.”
혹시 또 뭔가 놓친 게 없나 루벨라와 같이 신전을 돌던 와이그에게 한스와 스녹이 찾아왔다.
“혹시 지크 님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아니요. 저는 못 봤습니다.”
“저도 전투 이후로는 못 봤어요.”
“그렇습니까?”
와이그와 루벨라가 부정하자 한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스녹을 돌아봤다.
“아마도 조금 오래 걸리실 것 같으니까 우리는 우리대로 잠 잘 곳을 찾아보자.”
“…걱정 안 하시나요?”
지크가 보이지 않는데도 너무나 태연한 한스와 스녹의 모습에 루벨라가 물었다.
두 사람이 눈을 깜빡이고 루벨라를 본다. 마치 자신이 말을 잘못한 것 같아 루벨라가 몸을 움츠렸다.
“아, 아아. 걱정! 그렇죠!”
그제야 걱정이라는 단어를 안 것처럼 한스가 말했다.
“걱정이란 단어가 지크 님이랑 정말 안 어울려서 말이죠. 괜찮습니다. 그 지크 님이 아닙니까. 그분이 위험에 빠질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모르겠네요. 그것도 이렇게 다 이긴 싸움을요. 아마도 본인의 원래 목적을 이루러 가셨을 겁니다.”
“원래의 목적. 복수 말입니까?”
비슷한 생각을 했던 와이그가 물었다. 한스가 흐릿하게 웃었다.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인간은 적어도 곱게 죽진 못했을 겁니다.”
“…….”
“…….”
그 단언에 와이그와 루벨라는 입을 다물었다.
아예 걱정이란 개념을 상실한 듯한 한스의 태도는, 말은 않았지만 적잖게 지크를 걱정하던 둘에게 조금 충격이었다.
‘이 정도로 신뢰를 쌓다니. 정말 대단하군.’
그 정도로 지크가 이들에게 보여준 게 많았을 것이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지크 님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와이그가 말하며 한스와 스녹의 뒤 쪽을 쳐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누군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지크였다.
턱!
지크는 순식간에 그들의 옆에 도착했다.
“지크 님!”
“오셨습니까.”
스녹과 한스가 그를 맞았다. 지크가 주변을 둘러봤다.
“전쟁은 잘 끝난 것 같네.”
“지크 님 덕에 쉽게 끝났습니다. 피해도 예상보다 적었고요.”
와이그가 말했다.
후방에서 소란을 피운 것, 트리슬로와를 신전에 잡아 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결계를 깨뜨린 것. 이번 전쟁에서 가장 활약한 자를 꼽자면 역시 지크였다.
“그런데 어딜 다녀오셨나요?”
아까 별다른 설명도 없이 볼일을 본다고 사라진 것이 못내 궁금한 듯 루벨라가 물었다.
“역시 복수 때문인가요?”
“뭐, 그렇죠.”
지크가 마법 상자에서 트리슬로와의 시체를 꺼내 땅바닥에 내던졌다.
와이그는 침음을 흘렸다.
트리슬로와가 죽은 건 분명 기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트리슬로와가 극단적인 방법을 썼다고는 해도 눈앞에서 놓쳤던 와이그로서는 조금 허탈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결국은 지크 님께서 잡으셨군요.”
“이놈이 어디로 도망갈지 알고 있었거든요. 혹시 몰라 잠복하고 있었죠.”
정말로 끊임없이 나오는 정보력이다. 와이그는 그 정보의 출처가 정말로 궁금했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겠지.’
“이 시체는 어찌 하실 겁니까? 만약 괜찮으시다면 목을 베서 저희 대신전 앞에 효수해 두고 싶습니다만.”
“죄송하지만, 저도 이 시체를 쓸 곳이 있어서요.”
카르위먼의 명성을 더욱 드높일 수 있는 방법이 거절당한 것에 조금 씁쓸해했지만 트리슬로와는 분명 지크의 전리품. 와이그도 더 이상 부탁하지 않았다.
다만 궁금하긴 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다 사용할지 알 수 있을까요?”
“복수를 마무리 지어야죠. 이놈의 시체를 불에 태운 다음 셀록블럼 산봉우리에 뿌려 버릴 겁니다.”
밸리드의 장례 절차를 잘 알고 있는 와이그와 루벨라는 지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죽은 자에게까지 복수를 멈추지 않는다는 거군.’
지크의 실력이나 세운 공과는 별개로, 와이그는 웬만하면 지크와 적대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