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헉! 헉!”
트리슬로와가 거친 숨을 몰아쉰다.
잘려나간 팔의 단면에서 계속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고 근육은 마치 빨래 짜듯 쥐어짜이는 것 같다.
텅 빈 성력은 밸르에게서 버림받은 듯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났다.’
의식의 방 근처에 비밀 통로가 있던 게 다행이었다.
물론 신전의 비밀 통로를 그보다도 더 자세하게 아는 놈이 있어 안심이 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벨리 와이그까지 그 정보를 공유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안심하지 않고 트리슬로와는 신전을 벗어나는 것을 우선했다.
혹시 지크가 급습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신전을 빠져나온 그는 카르위먼의 신도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였다. 다행히 그들의 신경은 신전에만 쏠려 있었다.
신전의 뒤로 돌아간 그는 동굴 벽면의 움푹 들어간 구멍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곳에는 무척이나 작은 틈새가 있었다. 아래로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호수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다.
“크윽!”
트리슬로와는 틈새에 몸을 욱여넣었다. 비좁아 몸 이곳저곳이 바위에 쓸린다. 하지만 간신히 틈새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첨벙!
물소리가 났다. 트리슬로와는 혹여나 적의 귀에 들어갈까 가슴이 서늘해졌다. 다행히 적이 눈치챈 낌새는 없었다.
그가 떨어진 곳은 신전 호수에서 신전 뒤편까지 이어져 있는 작은 수중 동굴이었다.
그는 물속으로 조용히 전진했다.
한쪽 팔이 없어 헤엄치기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물의 악신인 밸르를 신봉하는 자들답게 밸리드 교도는 모두 상당한 수영 실력을 자랑한다.
힘들긴 해도 트리슬로와는 어떻게든 수중을 유영했다.
동굴을 빠져나와 헤엄치길 얼마. 호수 벽면에 또 다른 수중 동굴이 나타났다.
크기는 무척이나 작다. 그는 또 한 번 그 동굴에 몸을 욱여넣었다.
성인 한 명이 몸을 눕혀 간신히 들어갈 만한 크기. 울퉁불퉁한 벽면에 몸이 이리저리 부딪쳤다. 머리를 박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푸핫!”
숨을 참기가 한계에 도달했을 즈음, 그는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는 물 밖으로 나왔다.
나온 곳은 완만한 경사를 그리고 있는 작은 통로였다.
그제야 트리슬로와는 한숨 놓을 수 있었다.
‘놈이 어디서 신전 비밀통로의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만큼은 모를 거야.’
이 통로를 알고 있는 건 자신뿐이다. 예전에 우연히 발견한 걸,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 들어찬 성력으로 일단 절단된 팔을 대충 치료한 그는 경사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통로는 상당히 길었다. 카르위먼의 병력들이 주변을 이 잡듯 뒤질 수 있으니 지금은 차라리 통로가 길어 신전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게 좋았다.
통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새어 들어오는 빛이 붉은 걸 보니 이미 석양이 지는 시간대인 것 같다.
빛을 보자 울컥 감정이 솟았다. 몸에 난 상처의 고통이 새삼 느껴졌다.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건 지금의 상황이었다.
밸리드 북부 총지부는 날아가고 ‘사각뿔의 원혼’은 박살났으며 밸리드 신도들 중 살아남은 건 그뿐이었다.
그의 생은 물론이고 긴 밸리드 역사상 이런 피해를 입은 건 손에 꼽을 만할 것이다. 당장이라도 목숨을 밸르에게 바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복수를 해야 해!’
지부를 없앤 카르위먼 놈들, 자신을 개처럼 몰아붙였던 벨리 와이그, 다음 대 성녀라던 아이네 루벨라, 그리고….
‘그 개자식!’
분명 지크라고 불렸었다. 이름도 목소리도 똑똑히 기억한다.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트리슬로와는 비밀 통로를 나왔다. 통로의 입구는 조그만 협곡의 구석에 위치하고 있었다.
협곡의 좁은 출구를 눈에 담으며 트리슬로와는 절벽을 주먹으로 쳤다.
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살갗이 터져 피가 줄줄 흘렀지만 트리슬로와는 개의치 않았다.
‘반드시 죽여주마! 아니,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내려 주마! 그놈의 가족, 연인, 친척, 아니, 그놈이 만난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어라? 굉장히 복수심에 불타는 얼굴인걸?’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트리슬로와는 바로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챘다.
방금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 목소리니 모를 수가 없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너…, 너…!”
“왜 그래? 유령이라도 보는 것처럼. 어디 아픈 거야?”
팔장을 낀 채 절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지크를 트리슬로와가 발견했다. 붕어처럼 그가 입을 뻐끔뻐끔 벌린다.
“어, 어떻게 여기를….”
“뭘 새삼스럽게 그래. 너희 신전 비밀 통로도 전부 알고 있던 나인데 이제 와 이런 통로 하나 더 알고 있다고 뭔가 달라지는 게 있나?”
회귀 전 밸리드의 북부 총지부를 완전히 박살냈을 때, 지크는 트리슬로와를 놓쳤었다. 호수로부터 바깥으로 이어진 작은 통로가 하나 있고, 트리슬로와가 그쪽으로 도망쳤다는 건 후일 알았었다.
‘그때는 정말 열 받았었는데, 그 정보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지크는 트리슬로와를 관찰했다. 그의 얼굴에 증오와 공포가 번갈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팔은 잘려나가고 온몸엔 상처가 가득했으며 신관복은 여기저기 찢겼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지크는 이 상태의 트리슬로와를 노리고 있었다.
“도망가려고 했었지? 그럼 안 되지. 밸리드 북부 총지부를 관리하고 있던 분께서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려 하다니. 신도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크윽!”
트리슬로와가 지크에게 멀쩡한 손을 겨눴다. 그리고 성력을 쏘아보냈다.
하지만 지크는 코웃음 쳤다. 검도 빼지 않고 주먹에 마력만 담은 채 성력을 후려쳤다.
퍼엉!
너무도 쉽게 트리슬로와의 성력은 사라졌다. 지크가 트리슬로와에게 다가갔다. 가볍게 복부를 쳤다.
퍼억!
“커억!”
트리슬로와의 몸이 꺾였다.
“컥! 우웩!”
토악질을 해댄다. 위장에 든 걸 모두 쏟아낼 기세로 트리슬로와는 꺽꺽거렸다.
“더럽게.”
혹시나 토사물의 일부라도 튈까 봐 지크는 거리를 벌렸다. 과장스럽게 코를 막고 손을 휘저었다.
“헉! 헉!”
간신히 토악질을 멈춘 트리슬로와가 지크를 노려봤다. 하지만 다 죽어가는 몸에 입으로는 침과 함께 토사물의 일부가 질질 흐르고 있어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트리슬로와는 결심을 굳혔다. 이 몸 상태로 여기서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하다.
‘죽을 땐 죽더라도 밸리드의 신도로서 자랑스럽게 죽는다! 그리고 가능하면 저놈도 길동무로 삼겠어!’
“응? 눈빛이 같이 죽기라도 할 셈이네? 아서라. 난 널 별로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지크에게서 뜻밖의 말이 들렸다.
“…날 죽일 생각이 없다고?”
“내 목적은 너한테 고통을 주는 거거든. 그런데 죽어버리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잖아? 그건 자비지.”
“그럼 어째서 여기에 기다리고 있었지?”
“네 그 꼴을 보려고.”
지크가 품평을 하듯 트리슬로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슥 훑었다.
“대단한 권력을 자랑하던 밸리드 북부 총지부의 책임자가 패잔병이 돼서 거지꼴로 도망치는 모습. 평생을 살면서도 보기 어려운 구경거리잖아. 안 그래?”
키득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트리슬로와의 머리를 댕댕 때렸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지치고 부상당한 그가 지금의 지크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후회할 거다.”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어리석은 짓이었다.
지크가 그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도저히 말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울화통이 터져 그대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후회는 안 하는 주의니까 걱정 마. 다만, 이것만 명심하고 살아가라. 밸리드 북부 총지부가 멸망하고, 거기에 있던 모든 밸리드 신도들이 죽고, 네가 이렇게 비참하게 도망치는 이유는 말이야.”
지크가 웃는 낯은 유지한 채, 그러나 시선은 날카롭게 갈아 말했다.
“전부 너 때문이란 걸.”
“크윽!”
트리슬로와가 몸을 떨었다. 하지만 지크는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뭐 하고 있어? 어서 가. 가서 날 후회하게 만들어줘야지.”
“…….”
트리슬로와가 몸을 돌렸다. 지크의 얼굴을 짓이기고 싶은 욕구를 어떻게든 억눌러가며 비틀대며 걸었다.
‘죽인다.’
마음속에서 울화가 치솟았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그저 자기 위안에 불과한, 지금은 아무런 효용을 나타내지 못하는 저주. 하지만 트리슬로와는 계속 그렇게 되뇌었다.
‘어떻게든 후회하게 해주겠어! 반드시 복수해주마! 미래 영겁 불타는 지옥불에 처박아…!’
콰직!
“아아아악!”
트리슬로와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발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하, 함정?’
그가 밟은 지면에 작은 구덩이가 있었고 거기에 뾰족한 말뚝이 숨어 있었다. 말뚝에 꿰뚫린 발에는 피가 샘솟았다.
“어때? 상당히 잘 됐지?”
지크의 목소리가 들린다.
“딱딱한 지면을 파서 함정을 만드는 게 조금 어렵긴 했는데, 그래도 꽤 마음에 들게 완성됐어.”
“보, 보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라? 왜 그래? 내 마음이 바뀌었을까 봐 걱정되는 거야? 걱정 마. 보내줄 거야.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거든. 그런데 너무 쉽게 보내주면 또 그렇잖아. 명색이 대 밸리드 북부 총지부 책임자이신데.”
지크가 마법 상자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모래시계였다.
“그러니까 게임을 하자고. 룰은 간단해. 이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떨어질 때까지 이 협곡을 벗어나면 돼.”
협곡의 출구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크가 꺼내든 모래시계는 상당히 커 안에 든 모래가 그렇게 빨리 떨어질 것 같지도 않다.
룰만 보면 무척이나 쉽다.
“물론 협곡의 입구까지는 내가 설치해둔 함정이 조금 더 있을 거야. 그거 모두 헤치고 나간다면 네 승리야. 어때, 간단하지?”
“그, 그런 일을…!”
“자, 시작!”
트리슬로와의 항의 따윈 가볍게 씹어버리고 지크는 모래시계를 돌렸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익!”
트리슬로와가 급히 협곡 입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발을 다쳐 걸음이 쉽진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지크가 바짝 따라가며 구경했다.
“아악!”
얼마 못 가 또다른 함정에 걸렸다. 방금 걸린 것과 같은 부류의 함정이다.
발의 상처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고통에 끙끙대고 있을 시간이 없다. 바로 뒤에서 크게 들리는 조롱 섞인 웃음을 꾹 참고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얼마 안 되는 협곡까지의 거리가 마치 지평선 너머의 끝자락이라도 된 것 같다.
“크악!”
또 다른 함정에 걸렸다. 그러나 트리슬로와는 그 함정도 뿌리쳤다.
점점 심해지는 부상과 고통 속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의 함정을 뚫고 계속, 그저 계속 걸었다.
턱!
결국 그는 협곡의 입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몸을 돌려 지크를 쳐다본다. 지크의 얼굴에 어린 똥씹은 표정과 아직 모래가 다 떨어지지 않은 모래시계를 보고 그는 웃었다.
“내가 이겼다!”
“그래, 네가 이겼어.”
지크는 순순히 손을 들어 인정했다.
트리슬로와는 그 모습에 더욱 기뻤다. 지크와 처음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그를 곤란에 빠뜨린 것이다.
하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끝내자.”
푸슉!
웃던 와중, 트리슬로와는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고개를 떨궈 자신의 가슴에 꽂혀 있는 지크의 검을 바라봤다.
웃는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트리슬로와를 향해, 지크가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아, 그런데 고백할 게 하나 있어. 나 거짓말 잘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