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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102화 (102/628)

제102화

트리슬로와가 부수기 힘들다고 했었으니 검에는 마력을 잔뜩 주입했다. 검 끝에 모인 마력이 날카로운 절삭력을 어김없이 발휘했다.

처음에 분명 상당한 반발력을 느꼈다. 그러나 지크는 마력을 더욱 집중해 말 그대로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었다.

푸욱!

‘사각뿔의 원혼’을 검이 꿰뚫었다.

“아, 안 돼애애!”

트리슬로와가 절규했다. 그가 신전이 침범당하는 상황에서 전장에 나가지 않은 것도, 의식의 방의 신관들이 죽는 것을 무릅쓴 것도, 벨리 와이그와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도, 오로지 성물을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지금, 그 모든 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콰지지직!

지크가 꿰뚫은 성물의 표면에 무수한 금이 갔다. 안에서 밸르의 기운이 줄기줄기 새어 나왔다.

지크의 옆에서 호기심 섞인 눈으로 성물의 파괴를 구경하고 있던 루벨라가 대놓고 인상을 쓰고 지크에게서, 정확히는 밸르의 기운을 내뿜고 있는 성물에게서 거리를 뒀다.

스윽!

지크가 검을 빼자 흘러나오는 밸르의 기운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곧 모든 기운을 뿜어냈는지 그 양이 점점 줄었다.

사르륵!

흘러나오는 밸르의 기운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사각뿔의 원혼’이 가루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크의 손가락 사이로 ‘사각뿔의 원혼’이었던 것이 흘러내렸다.

마치 트리슬로와의 허망한 욕망을 드러내듯 ‘사각뿔의 원혼’은 그렇게 사라졌다.

밸리드 성기사들과 트리슬로와는 마치 넋이 나간 듯 보였다. 벨리 와이그를 눈앞에 두고도 경계를 할 의지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크의 발치에 쌓여 있는, ‘사각뿔의 원혼’이었던 걸 하염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상당히 안타까움을 느낄 만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밸리드라면 자비를 느끼지 않는 루벨라, 와이그와 애초에 자비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을까 싶은 지크였다.

서걱! 서걱!

마치 밭에 잘 익은 밀을 수확하듯 와이그가 넋을 잃은 밸리드 성기사의 목을 베어냈다. 동료 몇이 죽자 그제야 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금까지의, 수세에 몰리는 와중에도 목표를 노리겠다는 기세는 없었다. 모든 희망이 잿더미가 된 느낌이었다.

“루벨라 님.”

“왜 그러시나요, 지크 님?”

“잠시 볼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만나죠.”

“네? 그 무슨…!”

뜬금없는 소리다. 이미 전장은 카르위먼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와이그가 트리슬로와와 그 무리를 섬멸한다면 이제 전장은 수습상태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 할 일이 있다니.

“지크 님? 지크 님!”

루벨라가 지크를 불렀지만 지크는 제대로 된 답은 주지 않고 손만 흔들어 준 후에 방 밖으로 자취를 감췄다.

‘정말로 바람 같은 사람이라니까.’

루벨라는 지팡이를 들어 올려 성력을 집중했다.

후웅!

그녀의 몸 근처에 반투명한 장벽이 세워졌다.

‘유사시에 날 지켜줄 지크 님도 없어졌으니 내 몸은 스스로 지켜야지.’

정말로 만약에 밸리드 성기사들이 와이그를 일순간이라도 따돌린다면 자신이 인질로 잡힐 가능성이 있다.

카르위먼 성녀 후보의 가치는 포르티에서 질리도록 깨달은 터였다. 게다가 지금은 성녀까지 단 한 걸음 남겨 놓은, 거의 유일한 성녀 후보가 아닌가.

‘밸리드 토벌이 성공 일보 직전인데 거기다 찬물을 끼얹을 순 없지.’

루벨라가 장벽을 세우자마자 몇몇 밸리드 성기사와 트리슬로와의 눈빛이 실망으로 물든 건 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리라.

콰아앙!

와이그의 검이 휘둘러진다.

분명 그가 든 검이 명검이긴 하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론 검이다. 밸리드 성기사들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하지만 그 위력은 무슨 신전 기둥뿌리를 뽑아서 휘두르는 것 같았다.

밸리드 신도들은 그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아니, 그걸 막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와이그의 공격 한 번당 밸리드 성기사의 목숨 하나씩을 바꿔가는 것에 불과했다.

“예하!”

트리슬로와의 곁에 있던 성기사가 외쳤다.

“예하만이라도 피하셔야 합니다!”

이미 이곳에 지켜야 할 것은 없다. 모든 희망이 부서졌다.

그렇다면 적어도 밸리드에 꼭 필요한 인재를 살려 보내야 한다. 그 성기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허! 내가 그놈을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나?”

푸슉!

와이그의 검 끝에서 빛이 쏘아졌다. 트리슬로와에게 충고를 하던 성기사의 머리가 말 그대로 사라졌다.

목에서 폭포수 같은 피를 뿌리며 그 성기사가 쓰러졌다. 그러나 밸리드 성기사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목숨을 포기했다.

“예하! 도망치셔야 합니다!”

“부디 저희들의 복수를 해주십시오!”

하나같이 트리슬로와에게 간청한다. 트리슬로와가 이를 악물었다.

“그대들의 희생은 잊지 않겠네!”

“그러니까 안 보내준다니까! 벌레 새끼는 보일 때 처리를 해야지, 안 그러면 음습한 곳에서 또 새끼를 깐단 말이야!”

화아악!

빛이 와이그의 검을 휘감았다.

이지러지는 빛이 마치 불꽃이 이는 것도 같았다. 지금까지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 올 거라는 게 자명했다.

“달라붙어라아아아!”

와이그와 가장 가까이 있던 성기사가 와이그에게 뛰어들며 외쳤다. 몇 명의 성기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달려들었다.

와이그의 공격을 몸으로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콰아앙!

와이그의 공격이 그들을 강타했다. 검을 곧추세우고 성력을 최대한 불러 일으켜 어떻게든 공격을 버틴다.

검이 박살나고 갑옷이 찌그러지고 살과 피와 뼈가 흩날려도, 다른 성기사가 말 그대로 산산히 분해되어도 그들은 악착같이 버텼다.

그걸로 정말 피 같은 잠깐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끄륵!”

“꺼억!”

나머지 성기사들이 거품을 물더니 전부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서 푸른색의 기운이 새어나와 트리슬로와의 몸에 스며들었다.

“같잖은 짓을!”

와이그가 검을 날렸다.

콰앙!

놀랍게도 트리슬로와가 펼친 장벽이 그의 공격을 막았다.

“성기사들의 생명력과 성력을 흡수했어.”

루벨라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트리슬로와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입가에 피를 흘리고 안색은 창백하다. 흡수한 생명력과 성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몸은 실시간으로 망가지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일시적으로 흡수한 생명력과 성력을 소모해야 했다.

트리슬로와가 손을 폈다. 막대한 기운이 그의 손아귀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향하는 곳은 루벨라가 있는 쪽이었다.

루벨라가 장벽을 펴고는 있지만 그녀는 아직 미숙하다. 저 기운은 루벨라의 장벽이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쯧!”

아쉬워하면서도 와이그는 루벨라와 트리슬로와의 일직선상에 섰다.

콰아아아아아!

수십 가닥의 물줄기들이 뿜어진다. 마치 채찍처럼 휘어져가는 물줄기들이 사방으로 퍼졌다가 곧 루벨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와이그가 몇 걸음 더 뒤로 걸어 루벨라에게 바짝 붙었다.

쿵! 쿵! 쿵! 쿵!

물줄기들이 하나둘씩 쇄도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루벨라를 꿰뚫기 전 전부 와이그의 검에 걸렸다.

과연 성기사들의 생명력과 성력을 전부 흡수해 날린 공격이라 그런지 와이그도 상당한 무게감을 느낄 만한 공격이었다.

그 틈을 타 트리슬로와가 움직였다.

문으로 갈 생각도 않는다. 가장 가까운 벽까지 일직선으로 달렸다. 벽을 부술 셈이었다.

‘그렇겐 안 되지.’

물줄기들을 요격하는 와중 와이그가 트리슬로와의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사악!

소름끼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날 형태의 빛이 쏘아졌다.

“크윽!”

트리슬로와가 장벽을 쳤다. 빛과 장벽이 충돌했다.

파직!

불길한 소리가 장벽에서 나고는 바로 장벽이 깨졌다. 빛이 트리슬로와를 덮쳤다.

“끄아아아아악!”

끔찍한 고통이 느껴진다. 새하얀 빛이 시각을 물들이기 무섭게 팔뚝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트리슬로와는 비명을 질렀다.

고통이 느껴지는 곳의 아랫부위에는 고통은커녕 아예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잘렸다. 빛에 잠시 눈이 멀었어도 그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젠장!”

욕지기를 내뱉으며, 그래도 장벽 덕에 와이그의 공격을 팔 하나로 끝낼 수 있던 것에 안도하며 트리슬로와는 벽에 주먹질을 했다.

콰앙!

성력으로 강해진 육체는 신관인 트리슬로와에게도 괴력을 부여했다.

벽이 부서져 나갔다. 빛 때문에 잠시 멀었던 시력이 슬슬 되돌아온다.

트리슬로와는 잘려나간 팔뚝을 부여잡고 방을 탈출했다.

쿵!

마지막 물줄기마저 막아낸 와이그가 그를 따라나섰다.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검을 휘두르려 들어 올렸다.

그러나 트리슬로와는 이미 가장 가까운 모퉁이를 돌고 있는 상태였다.

콰앙!

와이그의 공격이 모퉁이를 박살냈다. 그러나 트리슬로와는 모통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와이그가 급히 트리슬로와를 쫓았다. 그가 사라진 모퉁이를 돌았다. 긴 복도가 펼쳐졌다.

그러나 트리슬로와의 흔적은 없었다.

‘…기척도 사라졌군.’

아마 흡수한 생명력과 성력을 사용해 기척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이곳저곳을 뒤져가며 트리슬로와를 찾아볼까 했지만 그는 이 신전의 구조를 잘 모른다.

‘놓쳤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와이그 님!”

한발 늦게 루벨라가 달려왔다.

“트리슬로와는요?”

“놓쳤습니다.”

루벨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루벨라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책임소재를 따지자면 그곳까지 루벨라 님을 데려간 제 잘못입니다.”

루벨라를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와이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팔 하나를 떨궜으니 도망가다가 우리 신도들에게 발견될 수도 있고, 설혹 완전히 놓친다고 해도 북부 총지부를 괴멸시켰으니 실패는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풀 죽지 마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실수입니다.”

“네.”

루벨라를 안정시키고 와이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루벨라의 곁에 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크 님은 무슨 볼일이 있다고 했었죠.”

“네. 어디 가냐고 물었는데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고 가버렸어요.”

서운했는지 루벨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와이그가 웃으며 루벨라를 달랬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원래 그런 사람이잖습니까. 혹시 압니까? 지크 님이 도망간 트리슬로와를 잡아 올….”

와이그가 입을 닫았다. 손을 턱에 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왜 그러세요, 와이그 님?”

“분명 지크 님의 목표는 켈룬 트리슬로와였죠?”

“그렇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런 지크 님이 바로 앞에 트리슬로와를 두고 다른 일이 있다고 가신 게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네요. 그럼 다른 볼일이 대체 뭘까요?”

“생각을 바꿔봅시다.”

와이그가 말했다.

“지크 님의 볼일이 다른 일이 아니라 여전히 트리슬로와의 처단을 뜻한다고 말입니다.”

“그럼 다른 볼일이 있다고 자리를 뜰 이유가 없지 않나요? 트리슬로와는 와이그 님이 상대하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놓쳤죠.”

그제야 루벨라도 와이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차렸다.

“…설마 지크 님은 이걸 다 예상하고 미리 트리슬로와가 도주할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던가….”

“지크 님은 트리슬로와에게 굉장한 증오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봐 온 지크 님의 성격상 복수는 자기 손으로 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고요.”

“전부 계산된 거였다고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추측이 맞다면.”

와이그가 허탈하게 말했다.

“트리슬로와를 놓친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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