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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100화 (100/628)

제100화

의식의 방으로 향한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던 듯 지크는 자기가 도망쳐 온 길을 역순으로 되짚어갔다.

퍼엉! 퍼엉!

뒤에서 성기사에게 업힌 트리슬로와가 연신 성력을 쏘아냈다. 흔들리는 등에서 정신을 집중할 새도 없이 쏘아내는 성력의 위력은 보잘것없기 마련이지만 과연 추기경씩이나 되는 인간은 달랐다.

‘짜릿하네.’

등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 성력이 벽에 부딪쳐 크게 구멍을 내는 광경은 지크도 충분히 위협을 느낄 만했다.

하지만 지크는 오히려 웃었다.

‘크! 전투 때는 이런 맛도 있어야지.’

다시 한번 날아오는 성력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지크는 계속 전진했다.

곧 의식의 방에 도착했다.

콰앙!

지크가 문을 발로 차 부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본 밸리드 신도들은 다시 한번 분노했다.

의식의 방은 기도실과 같이 이 신전의 최중요 장소인 것이다.

그들은 지크를 따라 방 안으로 진입했다. 지크가 부순 문의 파편이 밟혀 다시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도 잠시.

방 안의 참상을 확인한 밸리드 신도들은 얼어붙듯 멈춰 섰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성기사의 등에서 내린 트리슬로와가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성기사가 급히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도 눈앞의 참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도축장 같다. 밸르의 석상을 중심으로 아름답고 신묘하게 그려져 있던 의식의 진이, 새빨간 피로 덮여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피가 흥건한지 그게 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누군가 실수로 엎어뜨린 붉은 색의 염료 같다.

그러나 이 정도는 충격받을 일이 아니다.

여기 있는 건 세계에서 해악으로 소문 난 밸리드의 신도들 중에서도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 전부 직접 눈앞과 같은 피바다를 만든 경험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피바다에 잠겨 있는, 밸리드 신관복을 입고 있는 시체들은 그들의 경험에도 별로 없었다.

아니, 그걸 과연 신관복이라고 불러야 할까.

옷에는 이미 밸리드 특유의 푸른색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처럼 온통 시뻘건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형태도 마찬가지. 걸레로도 쓰지 못할 정도로 난도질 된 옷들은, 입고 있는 게 아닌 그저 걸려 있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신관들의 시체를 보면 신관복 정도는 애교에 불과했다.

여기저기 난도질되고 잘려나간 고깃덩이들이 피 웅덩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그곳에 인간이었을 적의 모습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들을 죽인 인간이 얼마나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있었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이…! 이…!”

결계가 사라진 걸 알고 의식의 방에 있는 신관들이 전부 죽었다는 사실을 예상한 트리슬로와였지만 직접 보는 건 또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누가 봐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

무엇보다 이들은 모두 밸리드 교단에서도 수위에 들어가는 고위 신관이었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른다면 여기서 다음 추기경이 나온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는 자들.

트리슬로와조차 한때 의식을 행하는 신관이었을 정도로, 의식을 행하는 신관들은 엘리트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의식의 백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강력한 결계를 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들이 전부 죽었다.

정말로 머리털이 거꾸로 서는 기분이었다.

“어때, 위대한 밸리드의 추기경 씨? 이 광경을 보고 뭔가 느끼는 게 있어?”

밸르의 조각상에 기대 삐딱하게 서 있던 지크가 말했다. 트리슬로와가 그를 노려봤다.

“…이 꼴을 만들어 놓은 놈들은 어디 있나.”

“글쎄?”

지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사람들이야 이미 지크가 알려 준 비밀 통로로 빠져나갔겠지만, 그 사실을 트리슬로와에게 알려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참 깔끔하게도 해놓고 갔네.’

지크도 눈앞의 참상을 훑었다.

복수에 눈이 뒤집혀 자기가 밸리드 놈들을 의식의 방으로 끌고 올 때까지 시체를 난도질하고 있으면 어쩌나 생각도 했었지만 그들은 훌륭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하고 사라졌다.

‘아니, 이 정도 했으면 충분히 분풀이는 한 걸려나?’

지크의 충고 때문이 아니라 복수심이 충분히 충족되어서 물러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 정도로 그들의 복수는 잔혹했다.

“말해.”

트리슬로와의 낮은 목소리가 지크를 위협한다. 하지만 지크에게 위협만큼 의미없는 것도 없다.

“이 광경을 보고 화가 난 거야? 이해해. 나도 네가 소년에게 그 짓을 해놓은 걸 보고 화가 났었으니까. 너는 그 분노를 너희들이 제물이라고 부른 사람들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조금 이 상황의 책임 소재에 대한 얘기를 해 보자고.”

지크는 고개를 돌려 밸르의 조각상을 쳐다봤다.

“위대한 밸르시여! 이 잔혹한 참상을 직접 보셨겠지요. 그럼 가르쳐 주십시오. 이 참상은 대체 누구 때문입니까!”

지크가 조각상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밸르라도 되는 듯 목소리를 낮고 거칠게 만들어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모든 책임은 트리슬로와에게 있다. 그는 어느 한 마을에서 굳이 필요도 없는 소년을 죽이면서 갖고 놀았지. 그래서 평소 그 소년을 아끼던 한 청년이 분노를 했고 그는 트리슬로와에게 복수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런 끔찍한 참상이 일어났지. 모든 건 밸리드의 추기경 트리슬로와 때문이다.”

지크가 조각상의 뒤에서 고개만 살짝 뺐다.

툭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트리슬로와와 성기사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들었지? 밸르께서 그러시네.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해.”

그리고 지크는 트리슬로와를 보며 그 말을 내뱉었다.

“전부 너 때문이야.”

* * *

결계가 깨진 후, 전장은 카르위먼이 승기를 잡아갔다.

압도적인 빛의 폭격이 밸리드의 진영 곳곳에 내리꽂혔다.

밸리드의 신관들이 어떻게든 장벽을 쳐 버티려 했지만 애초에 신관의 질 자체가 다르다.

후방에서 날아가는 빛의 성력이 밸리드의 진영을 어지럽히자 계속 진전되지 않고 있던 뗏목 다리와 말뚝 징검다리가 슬슬 완성되기 시작했다.

턱!

드디어 다리를 건넌 카르위먼 성기사들이 호숫가로 내려섰다. 그들은 망설임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밸리드의 병력을 쳤다.

챙! 채챙!

호숫가에서도 성기사들끼리의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결계가 사라져 밸르의 기운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밸리드 성기사들은 카르위먼 성기사들에게 너무도 쉽게 쓰러져 갔다.

그러나 그들은 열심히 저항했다. 승산은 희박해졌지만 그래도 뒤에 있는 신전을 곱게 내줄 수 없는 것이다.

콰아아아앙!

헛수고였다.

거대한 성력을 휘감은 칼이 휘둘러지자 폭풍 같은 검기가 사방을 휩쓸었다.

사정권 안에 들어간 모든 것이 난도질됐다. 성기사고 신관이고, 갑옷이고 신관복이고를 가리지 않았다.

“오셨군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에 혀를 내두르면서 한 성기사가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 호숫가로 발을 디뎠다.

“결계도 사라졌겠다. 나를 얽어매는 밸르의 더러운 기운도 사라졌겠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필요가 없지.”

“지휘는 완전히 놓으신 겁니까?”

“이미 전세는 정해졌어. 이제부터는 지휘가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이 하면 되네.”

교황에게서 직접 하사받은 칼을 어깨에 툭툭 치며 다가오는 자는 바로 와이그였다.

“지휘가 중요하지 않다뇨. 이번 토벌군 사령관께서 어찌 그런 무책임한 말씀을 하십니까.”

“아, 내가 실언을 했군.”

와이그는 씨익 웃으며 성기사에게 말했다.

“이제는 사령관 벨리 와이그보다 카르위먼 최강 기사인 벨리 와이그가 더 중요해졌다는 걸세. 뭘, 걱정은 말게나. 지휘가 조금 어긋난다고 해도 내가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광오하기 이를 데 없는 말. 그러나 얘기를 나누던 성기사는 고개를 한 번 저을 뿐,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벨리 와이그란 자는 저 터무니없는 말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자였다.

그때 뗏목 다리에서 누군가 또 건너 왔다.

얘기를 나누고 있던 성기사는 또 다른 성기사가 왔겠거니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얼이 빠졌다.

“…루벨라 님이 왜 여기에….”

“내가 불렀네.”

성기사가 와이그를 쳐다봤다. 미친 것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루벨라 님도 이런 상황은 가까이서 피부로 느껴봐야 하네. 그래야 경험이 생겨.”

“맞아요. 그리고 저도 원한 바니까 너무 놀라지 마세요.”

루벨라가 웃자 어두운 동굴이 일순 환해지는 것 같다.

성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와이그 님은 평소에는 루벨라 님을 손녀처럼 아끼시다가도 어쩔 때 보면 정말로 자비없어 보일 만큼 몰아치신다니까.’

하지만 바로 그런 면이 루벨라를 차기 성녀에 가장 가까운 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루벨라님도 강단 하나는 대단하시고.’

저 루벨라가 성격이 유약하다며 비판받던 사람이라고 대체 누가 생각할 것인가.

성기사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자신은 칼이나 휘둘러 밸리드 놈들을 하나라도 더 도륙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다시 전선에 뛰어들었다.

“우리도 가보죠. 밸리드의 숨통도 끊고, 지크 님도 찾아야죠.”

“괜찮으시겠죠?”

루벨라가 걱정했다.

“그 지크 님이 아닙니까. 충분히 잘 해내고 계실 겁니다.”

루벨라를 다독인 와이그는 카르위먼 신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를 따르라!”

소설에나 나올 법한 고함을 지르며 와이그가 밸리드 진영에 뛰어 들어갔다.

카르위먼의 병력이 함성을 지르며 와이그를 따랐다. 루벨라도 자신의 지팡이를 꽉 쥐고는 전장의 열기에 섞여들어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전 밖 싸움은 완전히 카르위먼에 승기가 넘어갔다.

* * *

카르위먼의 성기사들이 신전 안으로 물밀 듯이 들어갔다. 남은 밸리드의 신도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계속적으로 밀렸다.

그 소리는 의식의 방에서 대치하고 있는 자들에게까지 도달했다.

“이제 도망쳐야 하지 않아? 곧 카르위먼의 병력이 들이닥칠 텐데. 거기에는 ‘밸리드 도살자’인 벨리 와이그도 있다고.”

밸리드 도살자. 처음 들었을 때는 명색이 성기사가 무슨 놈의 저런 살벌한 별명만 붙어 있냐고 생각한 지크였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입에 착착 감겼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이젠 명령도 없다. 트리슬로와가 지크를 가리키자 성기사들이 덤벼들었다.

‘물러설 생각은 없나 보네.’

통로가 아닌 넓은 방이다 보니 지크는 순식간에 포위됐다.

밸리드 성기사들이 검을 날려 왔다. 지금까지의 원한이 잔뜩 깃든 공격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하지만 지크는 끝까지 그들을 농락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가장 먼저 날아오는 검을 피한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검이 날아왔다. 그에 대한 지크의 대응은 밸르의 석상에 바짝 붙는 것이었다.

“큭!”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것 같은 살기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급히 공격에 힘을 뺐다. 지크와 같이 밸르의 조각상까지 손상시켜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크는 그 검을 손쉽게 쳐냈다.

그런 광경은 계속됐다. 성기사들이 계속 공격을 날려봤지만 지크가 밸르의 조각상 뒤로 숨거나 옆으로 바짝 붙거나 하면 공격의 기세를 끝까지 잇지 못했다.

‘광신도 놈들이 제들 신 조각상을 함부로 할 수 있겠냐.’

게다가 이 조각상은 일반 조각상이 아니라 자그마치 이 신전을 지켰던 의식의 중심에 있던 조각상이다. 더 특별한 의미를 둘 수밖에 없었다.

밸리드 성기사들은 약이 바짝 올랐다. 이제는 아예 밸르의 조각상과 어깨동무까지 하면서 깐족대는 지크의 모습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콰앙!

갑자기 밸르의 조각상이 폭발했다. 지크는 낌새를 눈치채고 피해 별 부상이 없었지만 밸르의 조각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성기사들이 놀란 눈으로 조각상을 공격한 트리슬로와를 쳐다봤다.

“죄는 내가 갖고 가겠네, 형제들이여. 지금은 그저 저놈을 죽일 생각만 하세나.”

추기경이 희생했다. 그렇게 생각한 성기사들은 깊이 감동받았다. 그리고 그만큼 지크를 죽이겠다 맹세했다.

지크는 주위를 둘러봤다.

조각상도 사라지고 포위도 당했다. 이 방에도 비밀 통로는 있지만 그건 의식의 방의 신관들을 죽인, 감옥에 갇혀있던 자들이 사용한 것이라 쓰면 안 됐다. 그들까지 추적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누가 봐도 막다른 길이다. 하지만 지크는 겁먹지 않았다.

‘그럼 어디 한 번 본격적으로 붙어볼까.’

지크는 신전에 잠입한 뒤로 처음으로 정면으로 맞붙을 결심을 굳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했지, 뭐.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현재는 지크가 불리하지만 시간은 지크의 편이다. 카르위먼의 병력이 도달하는 게 먼저일지 아니면 지크의 죽음이 먼저일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병력을 보며 지크는 검을 꽉 부여잡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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