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카르위먼과 밸리드의 전투는 치열했다.
카르위먼은 계속해서 호수를 건너기 위해 공세를 감행했다. 하지만 벨리드의 저항도 극렬했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카르위먼은 호수 너머 교두보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격렬한 전투 사이에 지크의 두 종은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다.
한스는 소로의 전투에 투입돼 전방에서 밸리드의 성기사들과 싸웠다. 실력은 상대보다 떨어지지만 그는 나름 전투에서 활약을 하고 있었다.
지크에게 받은, 변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훈련이 이번에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앞에서 싸우고 있는 카르위먼의 성기사들 사이로 잠깐 드러난 틈을 이용해 그는 밸리드의 성기사 한 명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큭!”
카앙!
교묘하게 사각으로 들어오는 공격에 밸리드의 성기사가 급히 한스의 검을 쳐냈다.
충격에 손아귀가 짜르르 울린다. 그러나 한스는 검을 놓치지 않고 급히 물러났다.
콰직!
“커억!”
자세가 무너진 채 적을 맞이한 밸리드의 성기사는 카르위먼의 성기사에게 칼을 맞고 쓰러졌다. 한스는 다시 틈을 찾기 시작했다.
‘몸이 거의 자동으로 움직여.’
이런 집단전은 고작해야 얼마 전 드라큘 영지의 오스프린에서 처음 경험해본 게 다였다.
그런데 고작해야 두 번째 전투만에 자신의 몸은 능숙하게 집단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정말로 지크 님의 훈련은 혀가 내둘러진다니까.’
한스는 이게 전부 지크의 훈련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크가, 그가 가장 인정하는 인물인 그렌 제너드와 맞먹는다고까지 생각했던 한스의 재능. 그것이 지크의 엄청난 훈련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스녹도 많은 활약을 펼쳤다.
호수 중앙의 한 징검다리에 서서 그는 연신 대지의 권능을 쏘아댔다.
쿠웅! 쿠웅!
소로의 옆을 막고 있는 동굴 벽에서 커다란 기둥들이 튀어나온다. 밸리드의 성기사들은 그것들을 검으로 후려쳐 부쉈다.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기둥들이 그들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소로를 붕괴시키면 전부 처리가 가능한데.’
스녹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오히려 공격 경로를 늘려야 할 판에 원래부터 있던 길을 붕괴시킬 수는 없었다.
‘역시 힘이 부족해서겠지?’
노웸의 힘을 안정적으로 끌어낼 순 있게 됐지만 모든 힘을 끌어낼 순 없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일단 이 동굴의 천장을 무너뜨려 호수부터 매웠으리라.
‘아, 그러면 동굴 붕괴의 위험이 커서 지크 님에게 혼나려나?’
아니, 노웸의 힘을 전부 끌어낼 수 있다면, 어쩌면 이 동굴의 지지기반을 전부 없애도 오직 그의 힘만으로 동굴을 지탱할 수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녹은 흘끗 한스를 쳐다봤다.
그보다 먼저 지크의 종으로 들어온 선배.
노웸 같은 특별한 존재가 붙어 있는 게 아니면서도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점점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
‘나도 열심히 해야지.’
한스는 창피해 하지만, 지크의 충고를 들으며 영웅을 목표로 하는 길을 걷는 그의 모습은 스녹에게 은은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나도 선배처럼 하면 언젠가는….’
샘과 마주 앉아 상기된 목소리로 꿈에 대해 말했던 어릴 적 추억이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스녹은 밸리드의 공격을 맞고 기울어지기 시작한 말뚝 몇 개를 권능을 사용해 바로 세우면서 계속해서 밸리드를 공격했다.
공방은 계속됐다. 누가 밀리는 기색 없이 서로의 희생만 강요하는 시간만이 흐른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는 법. 공방에 변화가 생겼다.
콰앙!
“뭣!”
“어?”
밸리드의 결계로 보호받고 있던 곳. 그 가장 가장자리에 있던 밸리드 신도들에게 카르위먼의 빛 공격이 적중했다.
카르위먼도 밸리드도, 적아를 불문하고 놀랐다. 하지만 두 집단의 지휘관 모두 눈치가 빨랐다.
“결계가 줄었다! 당장 결계 바깥으로 나와 있는 놈들을 공격해라!”
“결계 안으로 들어 와라! 어서!”
두 집단은 상관의 명령에 바로 반응했다.
결계가 줄어들어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밸리드 신도들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피해가 없을 순 없었다.
“크악!”
“아악!”
빛에 맞아 산화하는 밸리드 신도들이 늘었다. 카르위먼 성기사들이 결계가 사라진 곳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태세를 정비해라! 놈들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막아!”
밸리드도 빠르게 대처하며 움직였다.
그러나 소용 없었다. 결계가 점점 축소되고 밸리드 신도들을 보조하던 밸르의 기운도 급히 줄어들더니, 이내 결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주변을 감싸는 밸르의 기운이 사라진 걸 느끼며 밸리드 신도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는 상반되게 카르위먼의 병력은 거세게 함성을 질렀다.
와이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를 압박하던 기운이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지크 님이 성공한 모양이야.’
* * *
“이게 뭐지?”
바로 전까지만 해도 드디어 지크를 잡는다는 생각에 기세등등했던 트리슬로와의 표정이 굳었다.
심상치 않은 진동에 천장을 올려다봤다.
다른 성기사들도 당황해 주변을 살폈다.
쿠웅!
또 한 번의 충격음. 그리고 흔들거림.
천장에서 돌가루가 조금 흘러내렸다.
카르위먼의 공격을 결계가 막아낼 때 종종 폭음이 엄습하긴 했지만 이번 것은 뭔가 달랐다.
무엇보다 폭음만으로 신전이 이렇게 돌가루가 떨어질 정도로 흔들리진 않는다.
불길하다. 밸리드 신도들에게 불안감이 엄습할 때였다.
“별거 아니니까 당황하지 마.”
태연한 목소리가 들린다.
밸리드 신도들이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먼 곳에 시선을 던질 필요도 없었다.
말을 한 이는 지크였다.
이 빌어먹을 놈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트리슬로와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야. 별거 아닌 소리라고.”
지크의 상태가 변했다.
방금까지 부상을 입고 헉헉대며 도망치던, 궁지에 몰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옆구리에 난 상처는 아직까지 피를 쏟고 있었지만 그뿐, 지크는 아까와는 달리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별것 아니라는 태도로, 밸리드 신도들에게는 절대 가볍지 않은 말을 입에 담았다.
“그냥 이 신전을 지키고 있던 결계가 사라져서 카르위먼의 공격에 직격받고 있는 것뿐이야.”
“!!!”
누구 할 것 없이 밸리드의 신도들이 경악했다.
신전을 보호하는 결계는 숫적 질적 열세에 빠져 있는 밸리드를 지탱해주고 있는 중요한 전력이다.
한데, 만약 그런 결계가 사라진 거라면.
“설마 너…!”
그제야 트리슬로와는 지크의 행동이 도망이 아니라 자신과 의식의 방의 남은 호위들을 유인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고 트리슬로와의 생각을 알아챈 지크는 아주 자비롭게 그의 의문을 해결해줬다.
“맞아. 내가 너희들을 유인한 거야.”
지크가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건 트리슬로와와 밸리드 성기사들을 조롱하는 동시에, 자신은 이까짓 상처로는 별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몸짓이었다.
이 정도의 상처 따위 무시하고 움직이는 것쯤, 지크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너 이 자식…! 설마 침입자가 너 말고 다른 놈들이…!”
결국 트리슬로와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 버렸다. 하지만 사건은 그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아니, 침입자는 나 혼자뿐이다. 단, 이곳에도 내 편이 있었거든.”
“개소리! 밸르를 충실히 섬기는 우리 밸리드 신도들이 너 같은 카르위먼의 개에게 협력할 리 없다!”
“나도 밸리드 새끼들이랑 손잡을 생각은 없어. 내가 손을 잡은 상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지크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이 아래 있던 사람들.”
“…제물들?”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던 터라 트리슬로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곧 더욱 큰 분노가 일었다.
“그러니까…우리의 형제들이…고작해야…제물들에게 죽었다…고?”
그들에게 카르위먼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면 제물들은 잘 쳐줘봐야 도축용 가축이나 장난감일 뿐이다.
그런 하등한 부류에게 결계를 유지한다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고위 신관이 죽었다니.
“안 됐네. 애도를 표할게.”
“이 노오오오옴!”
오늘만 대체 몇 번을 분노하는 것일까.
트리슬로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눈에서 피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다.
“예하! 당장 의식의 방에 가야 합니다!”
한 성기사가 분노한 트리슬로와에게 말했다. 하지만 트리슬로와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다. 카르위먼의 공격이 신전에 직격한다는 소리는 결계가 모두 사라졌다는 소리. 즉, 이미 의식의 방의 신관들은 전부 밸르 님의 곁으로 떠났다는 소리다.”
“크윽!”
성기사가 분노의 침음을 삼켰다.
“지금은 눈앞의 적에 집중해라. 일단 저놈이 빼앗은 성물을 되찾아야 한다. 그게 가장 급선무다.”
“거참, 너무한 상관이네.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도 헤아려주지 않는 거냐? 너희들은 뭐 하러 저런 상관 밑에서 일을 하고 자빠진 거냐?”
지크는 여전히 속을 벅벅 긁었다.
“죽여.”
이를 악물고 트리슬로와가 명령을 내렸다.
성기사들이 움직였다. 잡히면 절대 곱게 죽이지 않는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행동에서 묻어났다.
“이것들은 위해줘도 난리네. 좋아, 기분이다! 내가 직접 너희들을 이끌고 의식의 방으로 가주마!”
지크가 갑자기 주저앉아 땅에다 손을 댔다.
영문을 모를 행동이다.
그때 갑자기 트리슬로와가 공격을 가했다. 막대한 성력이 앞서 달려들고 있던 성기사들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한 성력의 제어였다.
하지만 성기사들로서는 갑자기 옆을 스쳐가는 공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공세가 무뎌졌다.
그러나 트리슬로와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성기사들이 놀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지크가 급히 바닥에서 손을 떼 위로 뛰었다. 트리슬로와의 성력이 바닥을 가격했다.
퍼억!
커다란 소리가 나지도 않았다. 그의 공격은 깔끔하게 신전의 바닥을 함몰시켰다.
“네놈이 또다시 비밀 통로로 도망가도록 내버려 둘 성싶더냐!”
그는 이미 지크가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부터 비밀 통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생각하고 대비를 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크가 비밀 통로를 여는 것 같은 행동을 보이자 바로 차단한 것이다.
“더 이상 비밀 통로를 이용…!”
트리슬로와의 말이 끊겼다.
공격을 피하기 위해 뛴 것으로 보였던 지크가 신전의 높은 천장을 활용해 벽을 차며 그들의 뒤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뭣들 하나! 추격…!”
성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던 트리슬로와는 말끝을 흐렸다.
기세등등하게 지크를 몰아붙여 허튼 도주 따위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 같던 성기사들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트리슬로와의 공격에 균형이 무너진 성기사들이 이제야 자세를 바로잡은 것이다.
탓!
지크는 유유하게 그들의 뒤편으로 내려섰다.
그가 한쪽 발을 축으로 빙글 돌았다.
척!
들었던 발을 과장스레 축이 됐던 발과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비밀 통로? 그런 게 있었어?”
지크가 태연스레 물었다. 트리슬로와가 자기가 공격한 곳을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
그가 공격을 가한 바닥은 커다란 구덩이가 팼을 뿐, 비밀 통로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었다.
또 한 번 놀아난 것이다.
“이야, 내가 파악하지 못한 비밀 통로를 알고 있을 줄이야. 과연 밸리드의 추기경이군. 파악하고 있는 정보가 남달…!”
퍼어엉!
악에 받친 트리슬로와의 공격을 지크가 가볍게 피했다.
“죽여어어!”
이제는 숫제 발악과도 같이 보이는 괴성이다. 성기사들이 트리슬로와를 지나쳐 다시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쫓고 쫓기를 하자는 거지? 난 찬성이야. 그런데 이번엔 목표를 정해보자고.”
지크가 태연하게 등을 돌리며 말했다. 더 이상 궁지에 몰린 것 같은 연극은 필요 없기에 포션을 마셔 상처를 치료했다.
“내가 의식의 방까지 데려다준다고 했지? 이참에 같이 가볼까? 가서 상태를 보자고. 어떤지 나도 궁금하거든.”
지크는 다시 밸리드의 성기사들을 우르르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