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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98화 (98/628)
  • 제98화

    다른 이들에게 지크를 찾으라 수색 명령을 내린 트리슬로와는 생각에 잠겼다.

    ‘그놈이 양동 작전을 펴는 거라면 가장 먼저 뭘 노릴까.’

    이럴 땐 상대가 뭘 노릴지 예측하고 역순으로 추적해 들어가는 게 좋다.

    일단 신전 안에서 소란을 피워 일정 병력을 신전 안에 묶어 놓고, 전선에서 싸우는 밸리드 신도의 사기를 떨어뜨려 놓는 게 첫 번째일 것이다.

    ‘그건 성공했지.’

    이가 갈릴 일이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현 밸리드 북부 총지부의 책임자이자 최대 전력인 트리슬로와 자신이 신전에 묶여 있고 그 외 성기사 오십여 명마저 추가로 묶였다.

    그리고 일단의 성기사들이 후방으로 빠지는 걸 보고 의문을 안은 자들이 분명 전장에 있을 것이다.

    그런 의문이 의심이 되면 사기가 떨어질 수 있다.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침입자를 최대한 빨리 잡아야 했다.

    ‘성물을 계산하지 않고 잠입했다면 놈은 가장 먼저 뭘 노렸을까.’

    바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결계.’

    지금 전력이 달리는 밸리드를 카르위먼과 백중세까지 끌어 올린 일등 공신.

    ‘의식의 방으로 간다.’

    트리슬로와는 급히 움직였다. 그는 곧 의식의 방 문 앞에 도착했다.

    기도실의 입구와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문의 화려함이 이 방이 신전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트리슬로와가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방 중앙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밸르의 조각상이었다. 지크가 생선 대가리라 칭하는 독특한 형태의 머리가 오연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밸르의 조각상을 중심으로 바닥에는 복잡한 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규모는 커 기도실보다 조금 작은, 그러나 매우 커다란 건 변함없는 방의 바닥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 위. 밸르의 조각상을 둘러싸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수많은 신관들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신전의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의식이었다.

    신관들의 주변에는 성기사 두 명이 호위로서 배치되어 있었다.

    의식 때 신관들은 그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하고 오로지 결계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때문에 호위는 필수였다.

    하지만 카르위먼의 급습이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해 지금 의식을 호위하고 있는 성기사는 고작해야 둘.

    호위라고 해도 민망한 숫자였다.

    자신에게 인사를 하려는 성기사들을 손으로 멈추고 트리슬로와는 벽면에 기대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신관인 그에게 성기사 같은 기척 감지 기술은 없다. 하지만 기척을 숨길 순 있다.

    그의 성력이 차츰차츰 그를 감쌌다. 주변에 흐르는 밸르의 기운에 동화되어 점점 그 기척을 죽였다.

    기척을 감지해 공격하는 기사들이 적극적으로 사냥감을 사냥하러 들어가는 포식자라면, 그는 주변 상황에 동화되어 사냥감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급습하는 포식자였다.

    철컥!

    누군가 의식의 방의 문을 열었다.

    트리슬로와의 눈동자가 또르륵 굴렀다. 문을 연 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트리슬로와가 웃었다.

    날카롭고 살기어린 웃음.

    콰아아아!

    트리슬로와의 손에 모여 있던 성력이 바로 쏘아졌다.

    수분을 조종하는 밸리드 특유의 능력은 아니지만 트리슬로와는 밸리드 신도 중 수위에 꼽히는 추기경이다. 그저 성력을 쏘아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다.

    콰앙!

    “크으윽!”

    ‘됐다!’

    트리슬로와가 희열에 찼다. 자신의 막강한 성력에 피를 뿌리는 쥐새끼가 보였다.

    “쫓아라!”

    트리슬로와가 크게 외쳤다. 의식을 수호하고 있던 신관들이 그를 쳐다봤다.

    “의식의 호위는 당분간 미루고 당장 지금 도망간 놈을 쫓아!”

    “하지만…!”

    “당장 쫓지 못해!”

    내키지 않아 하던 성기사들을 향해 트리슬로와가 윽박질렀다. 성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지크를 쫓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성물을 확보하는 게 먼저다. 저놈을 잡는 걸 우선해야 해!’

    혹 다른 침입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움직이지 못하는 의식의 방의 신관들은 딱 좋은 사냥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길 빌어야지.’

    간신히 잡은 기회다. 여기서 성물 회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숫자가 충분했다면 적더라도 호위를 남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 호위는 둘 뿐. 상대가 제법 실력이 있는 것 같으니 둘 모두 동원해야 했다.

    트리슬로와도 얼른 지크를 쫓아 방을 나섰다. 남은 건 방에서 일어난 소란에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계속해서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신관들뿐이었다.

    텅!

    트리슬로와까지 나가고 의식의 방의 문이 닫혔다.

    방의 바깥에서는 계속 소란이 일었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지크가 상당히 잘 도망치고 있는지 추격 소리는 계속 났다.

    지크를 수색하고 있던 성기사들이 속속 소리가 나는 쪽으로 움직였다. 의식의 방 앞으로도 몇 명의 밸리드 성기사가 달려갔다.

    지크를 추격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멀어졌다. 어느새 의식의 방 앞에서는 상당히 아릿하게밖에 들리지 않게 됐다.

    그리고 기도실과 마찬가지로 두텁게 만들어진 의식의 방의 문은 그 작은 소리마저 차단해 버렸다.

    그렇게 소란이 지나간 듯 보였다.

    끼익!

    방의 문이 다시 열렸다.

    저벅!

    잔잔한 물가에 작은 돌이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열린 문 사이로 발소리가 났다. 무척이나 가벼운 발소리다.

    하지만 거기에 맺혀 있는 원한은 무엇보다도 무거웠다.

    문이 활짝 열리며 열댓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누더기 같은 옷과 온갖 오물이 묻어 있는 피부, 깡마른 몸. 산발의 머리와 덥수록한 수염. 눈빛은 날카롭고 들고 있는 칼은 섬뜩하다.

    그들은 신전의 감옥에 갇혀 있던 자들이었다.

    그중 한 명인 르완 사우스는 그들의 눈앞에서 의식을 하고 있는 증오스러운 밸리드의 신관들을 보며, 아까 있던 일을 떠올렸다.

    * * *

    “복수?”

    고문과 기아에 시달려 의식이 반쯤 사라져 있는 상태에서도 사우스는 지크의 말에 반응했다.

    복수. 꿈에서도 그리던, 자신의 남은 인생을 모조리 바친다 해도 아깝지 않을, 이곳에 끌려온 후 언제나 목마름에 부르짖던 그 황홀한 단어.

    “네, 복수!”

    지크는 관심 갖는 사람이 있자 고개를 끄덕여 확인해줬다.

    “저는 여러분을 구하러 왔습니다. 밖에서는 지금 카르위먼이 밸리드를 토벌하러 와 있죠.”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돌았다.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여러분을 피신시킬 통로와 장소 모두 마련된 상황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제 말에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에서는 이곳을 그냥 나가는 것에 불만을 가지실 분이 있지 않나 싶어서요.”

    “…복수.”

    사우스가 입을 열었다. 하도 오랫동안 제대로 된 말을 하지 않아서 혀가 제대로 돌지 않아 발음이 조금 뭉개졌다. 고통에 지른 비명 때문에 목도 성치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묵은 증오의 감정을 표현하기엔 그런 목과 혀로도 가능했다.

    “복수가 가능한가?”

    “가능하죠.”

    “밸리드에 대한 복수?”

    “밸리드에 대한 복수.”

    마치 막 단어를 깨우친 아이에게 눈높이 교육을 해주는 것처럼 친절하게, 짜증내지 않고 지크는 그의 말을 반복해줬다.

    “관심 갖는 분이 있으니 바로 설명해드리죠. 전 여러분을 피난시킬 겁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분들 중에는 밸리드 놈들을 찢어발기고 싶은 분들도 많을 겁니다.”

    많다라는 지크의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정신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눈에 살기를 품었으니까.

    ‘많다’가 아니라 ‘모두 다’였다.

    “그러니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복수의 기회를 말이죠.”

    * * *

    사우스는 칼 자루를 꽉 쥐어봤다.

    밸리드 놈들에게 힘줄이 잘려나가 제대로 주먹조차 쥐지 못하던 얼마 전까지의 손이 아니다.

    여기에 잡혀 오기 전, 몬스터들에 대항해 대검을 휘두르던 그때와 비슷한 손이었다.

    ‘힘줄이 잘린 후 꽤 시간이 지났었데 그걸 치료해버리다니.’

    자신들을 구해준 그 구원자가 말하길 그가 사용한 포션은 카르위먼에서 만든 포션 중에서도 최고급의 포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심각한 상처가 나아진 것도 이해가 갔다.

    ‘게다가 어느 정도 기력도 돌아왔어.’

    상처와 더불어 제대로 먹지 못해 쇠약해졌던 몸에 어느 정도 힘이 붙었다. 물론 예전의 멀쩡했던 몸 상태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적어도 저 놈들을 죽여버릴 정도는 되니까.’

    사우스가 검을 치켜 들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신관에게 다가갔다.

    그 구원자의 말처럼 신관은 그가 바로 지척에 섰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히죽.

    사우스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밸리드의 신관복을 입고 마치 엄숙한 제사라도 지내듯 기도를 하고 있는 꼬라지가 가증스러웠다.

    그리고 이제 곧 그놈들이 고래고래 비명을 지를 거라고 생각하니 웃겼다.

    사우스가 손을 까딱였다. 그의 동료들이 움직였다.

    감옥에 갇혀 있던 모든 자들이 복수를 꿈꿨지만, 그 이상으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많았다.

    위험부담을 지기 싫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탈출했다.

    여기 있는 자들은 그때 탈출보다도 복수를 선택한 자들이었다. 설혹 위험부담을 지더라도 어떻게든 밸리드 놈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하고 싶은 자들.

    그들은 4인 1조로 뭉친 뒤 마음에 든 신관에게 접근했다.

    물론 그 ‘마음에 든다’라는 표현에 호의 같은 감정은 손톱만큼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 둘에 일제히 꽂는다.”

    지크가 만약을 위해 마법 상자에 넣어뒀다가 그들에 지급한 검은 명검은 아니었지만, 고작해야 신관복을 입고 있는 사람의 신체에 꽂아 넣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검을 역수로 잡고 신관의 사지 하나하나에 검 끝을 겨냥했다.

    사우스가 숫자를 셌다.

    “하나… 둘!”

    푸욱!

    검끝이 살갗을 찢는 피육음이 일제히 들렸다.

    “아아아악!”

    “아악! 아아악!”

    사지에 검이 꿰뚫리고도 계속 의식을 할 수는 없었는지 신관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목소리가 의식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다른 신관들은 여전히 의식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들의 비명은 의식의 방의 두꺼운 문에 막혔다.

    그 누구도 그들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사지가 꿰뚫려 무력화된 신관들은 그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그것도 증오스러운 고깃덩이.

    “조져.”

    푸욱! 푸욱! 푸욱!

    “끄아아아아아악! 끄에에! 끼에, 끼아아아으으윽!”

    마치 고기를 해체하는 도축업자처럼 그들은 신관의 몸에 연신 칼을 꽂았다. 신관들이 반항을 했지만 고작해야 일반인 정도의 근력과 체력만 있는, 사지를 쓰지 못하는 그들의 반항이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상대는 허약해졌다고 해도 네 명이라는 숫자에 칼까지 들고 있었다.

    “그만!”

    사우스가 외치자 그들은 검을 찔러넣기를 멈췄다.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들의 눈에는 더할 나위없는 만족감이 차 있었다.

    “자, 동료들. 그럼 어서 다음 작업에 들어가자고.”

    사우스가 볼에 튄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직 즐길 거리는 무척 많으니까.”

    이제는 완벽한 고깃덩이가 된, ‘신관이었던 것’을 대충 발로 치우고 그들은 다음 목표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 * *

    트리슬로와는 지크를 쫓고 있었다. 성기사의 등에 업혀 지크를 몰아대는 폼이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그의 곁에는 그가 소리쳐 모은 성기사들이 잔뜩 있었다. 트리슬로와에게 가호를 받아 육체 능력이 상승한 그들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지크를 잡으려 쫓았다.

    그에 비해 지크는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옆구리를 손으로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폼이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지크는 나름 속도를 내 추격을 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위태위태한 그의 도주는 금방이라도 끝날 것처럼 보였다.

    “큭!”

    지크가 신음을 내며 급히 옆쪽으로 방향을 튼다. 저 맞은 편에서 또 다른 밸리드의 성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 몰아라! 몰아! 놈이 쥐새끼 흉내를 냈었으니 응당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줘라!”

    트리슬로와가 외쳤다. 당장이라도 지크를 잡을 것 같은 상황에 그는 흥분해 있었다.

    곧 성물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샘솟았다.

    아무리 이 신전이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는 법.

    지크는 결국 막다른 길에 몰렸다.

    “아주 잘도 도망치더구나!”

    트리슬로와가 성기사의 등에서 내려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하지만 결국 네놈의 운명은 이런 것이다. 자, 성물을 내 놓아라. 그렇다면 내 자비를 베풀어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을 내려주마.”

    거짓말이다. 트리슬로와는 지크를 절대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괴롭히고 괴롭히고 괴롭히고 괴롭혀, 아주 질릴 때까지 그를 난도질할 계획이었다.

    지크는 침묵했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려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암담한 상황에 절망한 것 같기도 했다.

    트리슬로와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그럴 시간도 없다. 그가 성기사들에게 지크를 죽이고 성물을 회수하라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다.

    쿠우웅!

    신전에 충격이 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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