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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96화 (96/628)

제96화

“이…자식…이…!”

음절을 자근자근 끊어대며 말을 하는 걸 보니 보통 화가 난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지크는 오히려 기뻐했다. 트리슬로와의 분노는 그의 기쁨일 따름이었다.

“왜 그리 흥분하는 거야? 내 말이 틀린 게 있나? 네가 그 소년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어. 그럼 전부 너 때문인 게 맞잖아?”

“이 개자식이이이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트리슬로와가 손을 흔들었다.

퍼어엉!

기도실 호수의 수면이 미친 듯이 출렁였다. 호수의 물이 쉽사리 밀고 올라와 지크를 덮쳤다.

탓!

지크는 뛰어올랐다. 손가락을 벽에 박아 넣어 매달렸다.

“이것 참! 그 소년에게 손수 책임감이라는 걸 가르쳐준 너라면 당연히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그 생선 대가리 밸르가 너희들은 책임감이라는 걸 가질 필요가 없다고 알려주던? 하긴, 그 편이 그 생선 대가리답긴 하네. 너희는 어째 그런 걸 신이랍시고 섬기고 있냐?”

“죽어어어어!”

콰아앙!

물기둥이 지크가 있는 곳을 가격했다. 하지만 지크는 벽을 얼마 더 오르는 것으로 공격을 쉽사리 피했다.

“이봐.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 마. 이게 잘못되면 어쩔 거야?”

지크를 향해 달려들던 밸리드의 신도들이 일제히 움찔거리며 발을 멈췄다. 트리슬로와의 공격도 주춤했다.

“카르위먼의 공격이 무섭긴 무서웠나 봐? 이걸 기도실 한가운데에 떡하니 방치하고 말이야.”

트리슬로와는 앓는 소리를 냈다.

카르위먼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방심한 건 사실이었다. 완성을 위해서는 계속 제단 위에 둬서 안정을 시켜야 한다지만 저것을 지키기 위해 조금 더 수준 높은 방어병력을 뒀어야 했다.

‘설마 내가 자리를 비운 그 짧은 시간에 저걸 탈취당할 줄은.’

그렇지만 어쩔 수 없기도 했다. 당장 카르위먼의 최정예가 바로 앞까지 진군했는데 이곳에 얼마나 수준 높은 병력을 배치한단 말인가.

“이거 분명 그거지? 몬스터들을 조종하는 아티팩트. 보자, 분명 이름이 ‘사각뿔의 원혼’이었던가?”

“…네놈이 그걸 어떻게?”

소년과 만났던 마을 근처에 갑자기 몬스터가 들끓은 이유를, 지크는 이 녀석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회귀 전, 밸리드가 엄청나게 세계를 휘저은 적이 있었다. 여러 나라와 연합한 카르위먼조차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한동안 후퇴를 거듭했을 정도로 밸리드는 압도적이었다.

당시 밸리드가 그렇게 거침없는 진격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부린 여러 고위 몬스터에 있었다.

고블린이나 오크 같은, 깊은 산 속을 좀 뒤지면 나오는 그저 그런 몬스터가 아닌, 정말로 한 지역의 전설로까지 내려오는 그런 강하디강한 몬스터들.

그 몬스터들을 조종할 수 있던 아티팩트가 바로 이 ‘사각뿔의 원혼’이었다.

‘아마 이 ‘사각뿔의 원혼’을 가진 트리슬로와가 그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몬스터들도 녀석을 따라 움직인 거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녀석이라 저급 몬스터들만이 무의식적으로 근처를 배회하게 되는 정도였겠지만, 완성되면 회귀 전의 그것처럼 엄청난 성능을 뽐낼 게 분명했다.

‘소년을 가지고 논 것도 즐기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걸 완성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

‘사각뿔의 원혼’은 이름에 ‘원혼’이란 글자가 들어가는 물건답게 상당히 끔찍한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필요한 건 여러 가지지만 가장 중요한 건 순수한 영혼의 부정적인 감정. 그리고 보통 그 감정을 얻어낼 때 놈들이 즐겨 쓰는 짓이 바로 소년에게 했던 짓들이다.

“내가 조금 아는 게 많아. 어때? 이제 조금 위기감이 들어? 자칫하다간 너희들이 애지중지 만들어온 이게 부서질 거라고.”

“흥! 고작 그걸 믿고 난동을 부리던 것이냐! ‘사각뿔의 원혼’은 그리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지크가 대놓고 방패로 사용하려고 한 것에 잠시 움찔했을 뿐, ‘사각뿔의 원혼’은 그 능력답게 무척 튼튼한 물건이기도 했다.

트리슬로와는 다시 물기둥을 들어 올렸고 다른 밸리드의 신도들도 공격태세를 갖췄다.

지금의 지크로는 이기지 못한다. 다른 놈들은 둘째 치고 트리슬로와는 정말로 손에 꼽히는 강자다.

하지만 지크는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흐음. 이 구도라면 확실히 내가 밀리네.”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거냐! 하지만 늦었다. 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게 죽여주마!”

“아하하! 불가능한 꿈을 꾸는 꿈 많은 사람이 늘었네. 그래도 괜찮아. 난 응원해. 사람은 꿈이 있어야 살아가는 법이니까!”

콰아앙!

또다시 날아온 물 포탄을 피했다.

“힘의 차이가 확연하게 나는데도 정면승부는 고집하는 건 미련한 짓이지. 일단 도망쳐볼까?”

“웃기지 마라! 네가 여기서 어떻게 도망친단 말이냐!”

밸리드의 성기사와 고위 신관이 포위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곳에는 트리슬로와 자신이 있었다.

입구라곤 멀리 떨어진 출입문 하나뿐인 상태에서 그의 탈출은 불가능했다. 그래 보였다.

“어디로 도망치긴.”

지크가 벽에 박아넣었던 손을 크게 움직여 몸을 띄웠다.

얼마 이동하진 않았다. 그가 매달려 있던 곳보다 조금 옆으로 떨어진 단 아래에 착지했을 뿐이다.

“흥! 고작 그것 움직이고 도망 운운했단 말이냐. 확실히 어울리긴 하는구나. 쥐새끼같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이 말이다.”

“그럼 기대대로 정말 쥐새끼처럼 움직여볼까?”

지크가 점프해 사람 키의 두 배쯤 되는 곳에 있는 벽면 세 곳을 동시에 쳤다.

덜컥!

벽으로 위장되어 있던 문이 열렸다.

“!!!”

트리슬로와는 물론 다른 밸리드의 신도들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 그, 그건…!”

트리슬로와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댔다. 설마 기도실에 저런 게 있을 줄은 몰랐다.

“반응이 이상하네? 설마 이거 너희들도 잊어먹은 비밀 통로였어?”

“네, 네가 어떻게…!”

“아, 그건 알 거 없고.”

지크는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밸리드의 신도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쥐새끼는 쥐구멍으로 도망가 볼게.”

자랑스레 ‘사각뿔의 원혼’을 마법 상자에 넣고 얼빠진 트리슬로와를 쳐다보며 지크가 소리냈다.

“찍! 찍!”

“!!!”

누가 봐도 조롱의 소리.

붉으락푸르락해지는 트리슬로와를 뒤로 하고 지크는 비밀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잡아아아아!”

트리슬로와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기도실을 뒤흔들었다.

* * *

지크가 신전 안에서 쫓고 쫓기는 놀이를 즐기고 있을 때, 바깥에서는 본격적으로 카르위먼과 밸리드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펑! 퍼엉!

호수 너머로 카르위먼의 성법 공격이 연신 날아간다. 성력으로 이루어진 빛이 어두운 동굴 안을 환하게 물들이며 곧장 밸리드의 진영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밸리드의 진영은 강한 결계가 방어하고 있었다. 신전에서 뿜어지는 밸르의 기운이 호수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퍼엉! 퍼엉!

밸리드 쪽에서도 반격이 왔다. 호수가 출렁대며 물줄기들이 쏟아졌다.

카르위먼의 신관들이 장벽을 펼쳤다.

쾅! 콰앙!

물줄기들이 빛의 방벽에 막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다시 빛이 쏘아졌다.

한동안 그런 탐색전이 계속됐다.

먼저 변화를 준 건 역시 공격 측인 카르위먼이었다.

카르위먼 진영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던 와이그가 호수 바로 앞까지 걸어 나왔다.

그가 검을 빼들었다. 청량한 금속성이 울렸다.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러나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와이그의 검에서 뻗어나간 빛의 칼날이 결계와 충돌해 엄청난 폭음이 일었다. 동굴이 흔들리고 결계가 심하게 출렁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카르위먼 병력은 기대를, 밸리드 신도들은 불안을 안고 결계를 쳐다봤다.

결계는 깨지지 않았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아앙!

와이그가 검을 몇 번 더 휘둘렀다.

그때마다 결계는 계속해서 출렁거렸다. 그러나 끝끝내 깨지지 않았다.

카르위먼 병력은 아쉬움을, 밸리드 신도들은 안도감을 느꼈다.

“이걸론 끝이 안 나겠군.”

“아무래도 신전 안에서 어떤 의식으로 결계를 펴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식의 탐색전으로는 우리가 더 소모가 클 거예요.”

루벨라가 말하자 와이그는 결정을 내렸다.

“전진합시다.”

호수 건너편으로 통하는 길은 호수의 가를 빙 둘러서 가는 작은 소로뿐이었다. 한쪽은 동굴의 벽으로 막혀 있고 다른 한쪽은 호수로 떨어지는, 진군하기 전혀 적절치 않은 길.

게다가 그 길의 끝에는 이미 밸리드의 성기사들이 틀어막고 있었다.

하지만 와이그는 전혀 망설임 없이 병력을 그쪽에 투입시켰다.

척! 척! 척!

아군에겐 믿음직스럽고 적군에게는 끔찍한 발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웠다. 건너편의 밸리드의 성기사들도 본격적으로 전투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진군 루트는 많으면 많을수록 공격 측에 유리한 법.

와이그는 그 소로만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성기사 몇몇이 호숫가로 나왔다. 그들은 품에서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마법 상자를 꺼냈다.

퍼엉!

마법 상자에서 커다란 뗏목이 튀어나왔다.

단단하고 물에 잘 뜨는 나무로 만들어진 이 뗏목은 평범한 줄 대신 쇠사슬로 나무들을 묶어 두고 있었다.

이어 성기사들이 커다란 쇠말뚝을 꺼냈다.

쾅! 쾅!

망치도 필요 없다. 성기사들은 말뚝을 단단한 호숫가의 지면에 손으로 꽂아버렸다.

말뚝은 땅 깊숙이 꽂혔다.

철컹!

뗏목에서 길게 늘어져 있던 쇠사슬 중 하나를 성기사가 말뚝에 걸쳤다. 그리고 꽉 고정했다.

성기사들은 몇 개의 말뚝을 더 꽂아 거기에 쇠사슬을 더 연결해 뗏목을 단단하게 매었다.

턱!

성기사들이 뗏목에 올라탔다. 뗏목 끝까지 걸어간 그들이 다시 마법 상자를 사용했다.

첨벙!

뗏목 하나가 더 나왔다. 그들은 뗏목과 뗏목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다시 뗏목을 불러 이었다.

그렇게 호수에 뗏목으로 이어진 간이 다리가 완성되기 시작했다.

만들어지는 건 뗏목 다리만이 아니었다.

“저쪽이에요!”

땅에 손을 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스녹이 호숫가 한 군데를 가리켰다.

“저쪽의 수심이 얕아요!”

쿠!

노웸이 동의하듯 소리쳤다.

성기사 몇몇이 스녹이 가리킨 곳으로 접근했다. 그들도 마법 상자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말뚝이었다. 그러나 뗏목 다리를 고정시키려 호숫가에 막아 넣은 말뚝과는 달랐다.

굉장히 컸다.

그건 차라리 기둥이라고 해야 했다. 사람 키의 대여섯 배에 이르는 커다란 말뚝을 성기사 들은 어깨에 걸쳐 맸다.

탓!

한 성기사가 호수 위로 뛰었다. 어깨에 걸쳐 맸던 말뚝을 앞으로 옮겨 껴안듯 잡았다. 그의 몸이 떨어지며 호수 표면 근처까지 접근했다.

후웅!

성기사가 말뚝을 호수 아래로 힘껏 내려쳤다.

콰앙!

도저히 말뚝이 물과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기 힘든 폭음이 일며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었다.

호수 물이 미친 듯 출렁이며 파문이 호수 저편까지 도달했다.

그런 파괴적인 위력에 힘입어 말뚝은 성공적으로 호수 밑바닥에 박혔다.

호수 바닥도 단단한 돌이라 말뚝은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호수 표면 위로 내밀어진 말뚝의 머리 부분은 평평하고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어 수면 위로 상당한 공간을 확보했다.

탓!

말뚝을 꽂은 성기사가 말뚝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곧 성기사가 지나간 곳으로 말뚝을 박아 만들어진 징검다리가 생겼다. 그 옆으로 상당한 수의 징검다리가 계속 만들어졌다.

카르위먼의 정예들은 보통 호수나 강을 넘어 공격하는 일에 능숙했다.

밸리드의 신전들이 강이나 호수를 끼고 있는 경우가 많아 이런 전투를 해본 적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전문적인 훈련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번엔 호수 아래 지형이나 수심을 알려주는 스녹이라는 존재까지 있었다.

아직 호수 밑 지반 전체를 들어 올려 호수를 메워버릴 정도의 큰 힘을 사용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호수 밑의 땅이 어떤 식으로 생겼는지는 느낄 수 있는 스녹이었다.

그렇게 수월하게 전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카르위먼이었지만 와이그는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많은 훈련을 거치고 경험이 많다 해도 물이라는 환경은 밸리드에 압도적으로 이득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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