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밸리드란 종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은 대부분 같다.
세상에 대한 해악.
카르위먼이 그토록 강성한 세를 자랑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밸리드를 주적으로 삼고 발견하는 족족 퇴치해서이기도 했다.
카르위먼의 교황조차 밸리드의 토벌을 위해서라면 나라들을 속이는 짓도 마다않고 외교적인 불만을 표할지언정 다른 나라들도 이해해줄 거라 대놓고 말할 정도로 밸리드는 온 나라의 공적이었다.
그러나 보통 이런 종교가 그렇듯 밸리드는 온 세상의 핍박 속에서도 어둠 속에 숨어들어 계속 세를 이어갔다.
정말로 해충이라는 별명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종교였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나라, 다른 영지, 다른 세력,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축에 속하던 밸리드가 이번엔 완전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놈들의 병력은 얼마나 되느냐!”
이 총지부의 수장인, 밸리드의 추기경 켈룬 트리슬로와가 호수 건너편의 카르위먼을 죽일 듯 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옆에 있던 신관이 급히 대답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족히 천은 넘을 듯합니다!”
천. 분명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병력. 실제로 지금 총지부에 있는 밸리드 신도의 숫자도 그 정도는 된다.
하지만 질이 다르다.
“전부 성기사 아니면 고위신관이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총지부인 이곳을 치러 움직였다면 당연히 정예를 끌고 왔을 터. 그리고 카르위먼 정예부대 천이면 어중이 떠중이의 숫자만 많은 병력 따위 순식간에 쓸려나갈 것이다.
“젠장! 대체 어떻게 여길 알아차렸지!”
트리슬로와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메마른 황야 아래에 있는 거대한 지저 호수. 이 거대한 기적을 봤을 때 밸리드의 선조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온갖 곳에서 핍박받는 형제들이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밸르가 내려준 기적이라고.
그리고 그들의 믿음대로 지부가 세워진 후 이곳은 북부의 지부를 총괄하는 믿음직한 거점이 됐다.
그러나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 외부인, 그것도 그들의 가장 큰 적인 카르위먼이 병력을 이끌고 들이닥친 것이다.
‘지원군을 부르기엔 너무 늦었어!’
적들은 이미 지저호수 앞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리고 곧 호수를 건너기 시작할 것이다.
“트렘블 형제.”
트리슬로와는 자신의 바로 아래 직위에 있는 고위신관을 불렀다.
“네!”
“자네가 병력을 지휘해 카르위먼 놈들이 호수를 건너오는 걸 막아주게!”
“네!”
여타의 의문없이 트렘블은 트리슬로와의 명령을 따랐다. 그가 목소리를 높여 병력을 정돈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트리슬로와는 신전으로 향했다.
‘일단 그것부터 챙겨야 해.’
혹시나 이 지부의 모든 인간들이 몰살당한다 해도 그것만은 지켜내야 한다.
그렇게 지크의 예상과는 다르게 트리슬로와는 오히려 신전 안으로 움직였다.
* * *
지크는 신전 안을 속속들이 뒤졌다. 천하의 지크라도 미숙한 현재 상태로 밸리드 안에 잠입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바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지크는 일단 신전 안이 자신의 기억과 모두 동일한지 확인했다.
‘음, 전부 똑같군.’
또 한 명의 신관의 목을 비틀어버린 후 확인한 방도 기억 속의 그것과 같았다. 지크는 이번엔 지하로 내려가봤다.
내려가자마자 지독한 냄새가 훅 풍긴다. 복도를 중심으로 창살이 다닥다닥 붙은 감옥이 지크의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도 같고.’
감옥 안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그게 제물이든 실험체든 아니면 노리개든 적어도 죄를 지어 그 심판을 위해 가둬 놓은 자들은 아닐 것이다.
살짝만 봐도 감옥 안의 사람들은 무척 쇠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당장은 그들을 꺼내 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저들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크는 조용히 다시 지하에서 나와 아직 확인하지 못한 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가보자고.’
신전은 신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 당연히 신전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기도실이다.
‘분명 신전 중앙에서도 조금 뒤쪽에 있는 커다란 방이었지.’
아니, 그걸 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일반 가정집 몇 채 정도는 너끈하게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공간. 그곳이 이 신전의 기도실이었다.
지크는 몰래 기도실 안으로 숨어들었다. 카르위먼의 습격 때문에 기도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방 끝 벽에 밸리드의 표식이 수놓아진 커다란 천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 단이 높게 쌓여 있었다.
중앙에는 방의 절반 이상을 인공 호수가 차지하고 있었고 호수 위로는 가로, 세로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길이 호수 중앙에서 교차되고 있었다.
‘저건?’
지크가 눈을 빛냈다.
두 개의 길이 교차되는 지점에 높게 쌓아 올려진 제단 위에 어떤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주먹만 한 삼각뿔 형태의 그건 매끈한 표면에서 주변 빛을 반사해 은은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게 여기서 만들어지고 있었어?’
생각도 못 한 존재의 발견에 놀란 것도 잠시. 지크가 미소지었다.
저것만 있으면 트리슬로와도 전투보단 지크를 잡는 걸 우선할 게 분명했다.
* * *
트리슬로와는 성큼성큼 걸었다. 기도실로 가 그것을 챙긴 뒤 밸르께 앞으로의 전쟁에서 승리의 가호를 내려주기를 빌 생각이었다.
그건 그가 기도실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였다.
“추기경님!”
복도에서 신관 한 명을 만났다. 그의 얼굴에 급박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기, 기도실에…!”
퍼억!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트리슬로와는 신관을 밀쳤다. 신관이 벽에 부딪친 후 땅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트리슬로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겐 무엇보다 더 다급한 일이 있었다.
‘설마…!’
지금 상황에 기도실에 문제가 생겼다면 카르위먼과 관련되어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기도실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기도실 안으로 들어왔다.
누군가 단 위에 앉아 있는 게 보인다. 몇 명의 성기사와 신관들이 단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주변엔 죽어 나자빠진 성기사와 신관 몇 명의 모습도 보였다. 단 위에 앉아있는 자가 쥐고 있는 칼에 피가 흠뻑 묻어 있는 걸로 봐서 그가 죽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호수 위 교차로에 있는 제단 위에 있어야 할 그것이 없었다.
그건 단 위에 앉아 있는 정체불명의 인간의 손에 들려 있었다. 트리슬로와의 눈이 험악해졌다.
트리슬로와가 제단에 접근했다. 단을 포위하고 있던 성기사와 신관들이 그가 들어올 틈을 만들어 주었다.
트리슬로와는 단 아래에 섰다.
단 위에 있는 자, 지크와 트리슬로와의 눈빛이 마주쳤다.
트리슬로와가 주변 성기사와 신관들에게 손짓을 하자 그들이 두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포위망은 성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트리슬로와가 신호를 준다면 바로 지크를 토막내기 위해 달려들 기세였다.
지크가 말했다.
“어라? 생각보다 빨리 왔네? 전장에 있는 게 아니었어?”
“네놈은 누구냐. 카르위먼의 개냐?”
트리슬로와가 분노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시선이 지크와 지크가 들고 있는 물건을 번갈아 쳐다봤다.
“댁한테 악감정이 있는 인간이야.”
“밸르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르지 않는 어리석은 놈이었군.”
“견해의 차이가 있네. 난 밸르 같은 생선대가리를 신이랍시고 모시는 놈들이 사리분별 못 하고 정신이 흙바닥 어디쯤을 기어다니는 해충들과 비슷한 놈들이라고 생각하거든.”
단을 포위하던 자들이 울컥하는 기세가 느껴진다.
트리슬로와의 살기도 강해졌다.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까딱거릴 뿐이었다.
“…너 같은 놈한테….”
“아, 잠깐. 내가 먼저 물어볼 게 있어.”
트리슬로와의 말을 지크가 끊었다.
“이봐. 밸리드의 추기경 켈룬 트리슬로와.”
지크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에 트리슬로와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게 적대이건 협력이건 밸리드와 접점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트리슬로와를 알고 있었다
그만큼 트리슬로와는 밸리드의 유명인이었다.
“혹시 얼마 전에 어떤 마을에서 목책 밖에 사는 자들을 가지고 논 적이 있지 않아? 한 꼬마에게는 죽지도 못하는 성법까지 펼쳐가면서 말이야.”
“설마 복수랍시고 쳐들어온 건가.”
트리슬로와는 진심으로 어이없어 했다.
설마 그딴 만용으로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그래. 있다. 마을에 식료를 구하러 갔다가 웬 꼬마 놈과 눈이 마주쳤지.”
“그래서 죽였어?”
“어차피 빈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벌레 같은 놈들이다. 그런 놈들 따위 세상에서 사라진들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지. 무엇보다 우리는 장차 밸르의 크신 은혜를 입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자들. 세상의 주인이 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죽임을 당했으니 그놈들도 죽어서 영광으로 생각할 거다.”
“꼬마를 고문하며 전부 꼬마 탓이라고 했다던데.”
“사실이었으니까.”
트리슬로와는 킬킬댔다.
“그저 충동적인 일이었어. 그 꼬마가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녀석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 녀석의 가족과 이웃집 놈들을 죽인 건 그 덤에 불과해. 그러니 그 말이 맞아. 그건 전부 꼬마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트리슬로와 자신이 생각해도 무척 설득력 있는 말이다. 주변에 있는 밸리드 신도들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고 있었다.
저게 바로 밸리드의 기본적인 인식이었고, 때문에 밸리드는 전 세계에서 사교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흐음, 그래. 그런 인식이란 말이지.”
자신의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트리슬로와의 말.
지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쿠우우웅!
그때 저 멀리서 폭음이 들렸다. 건물까지 은은하게 흔들린다.
카르위먼과 밸리드의 전투가 시작된 게 분명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 트리슬로와는 지크를 공격하고 그가 들고 있는 것을 빼앗으려 했다.
지크가 다시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나보고 카르위먼의 개냐고 물었지? 카르위먼이 날 이곳에 어떤 이유로든 잠입을 시켰을 거라고 보는 것 같은데.”
“아닌가?”
“전혀. 완전히 틀렸어.”
지크가 검지를 세워 좌우로 흔들었다.
“인과가 반대야. 카르위먼이 날 잠입시킨 게 아니라 내가 카르위먼을 불렀어.”
“…뭐?”
예상치 못한 말에 트리슬로와가 당황했다.
“이 비밀스러운 장소가 왜 카르위먼에게 틀켰을까? 아마 너흰 엄청 당황했을 거야. 거점을 잡은 뒤로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곳이니까. 실제로 카르위먼도 몰랐어. 너희들을 잡으러 전 세계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지만, 설마 메마른 황야 아래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누가 알까. 자, 그럼 카르위먼이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됐을까?”
지크가 웃었다. 언제나 상대방의 감정을 벅벅 긁어대던 그 웃음이었다.
“나야. 내가 알려줬어.”
“…뭐?”
“우연찮게 이 지부를 알게 됐거든. 그리고 여기에 너, 켈룬 트리슬로와가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말이야. 그래서 잽싸게 일러바쳤지.”
“이 새끼가!”
이 은밀한 지부가 왜 들켰는지 알게 되자 트리슬로와는 분노했다. 당장이라도 지크의 목을 꺾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지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왜 카르위먼에게 일러바쳤을까? 너희를 싫어해서? 너희 밸리드 놈들이 구제받을 수 없는 해충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싫어하긴 하지만 그건 아니야. 카르위먼을 좋아해서? 적대하긴 싫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같은 편 먹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럼 왜일까?”
그건 무척 사소한 이유다.
“네가 내가 아끼던 소년을 죽였으니까.”
그것도 온갖 고통을 주면서.
“정리를 해보자고. 카르위먼이 이곳에 온 이유는 내가 이 장소를 일러바쳐서야. 내가 일러바친 이유는 너희에게 분노했기 때문이고. 내가 분노한 이유는 네가 그 소년을 고통스럽게 죽였기 때문이지.”
평소에 적에게 자주 사용하던 문구, ‘잠깐의 희망은 달콤했어?’라는 문구를 지크는 이번엔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엔 그것보다 더 사용하고 싶은 문구가 있었다.
“소년에게 말했지? 부모와 이웃집 사람들이 죽은 이유는 전부 너 때문이라고. 그럼 지금 이 밸리드 북부 총지부 바로 앞까지 카르위먼의 병력이 밀려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분노로 한껏 일그러진 트리슬로와를 보며 지크가 키득대며 말했다.
“켈룬 트리슬로와. 전부 너 때문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