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창날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움직인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은 날카롭고 팔에 장착한 방패는 두텁다.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대한 전투마들이 앞말의 꼬랑지를 따라 줄줄이 이동했다.
마치 하늘에서 보낸 사도처럼 보이는 기사들의 물결.
뒤에는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로브를 입고 긴 지팡이를 든 사람들이 짐말이 이끄는 수레에 타 따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앞으로의 전투에 대해서 아군에게는 용기와 수호를, 적에게는 심판과 철퇴를 기원하는 신관들의 기도.
그들의 옷에는 전부 공통적인 문양 하나가 박혀 있었다. 바로 카르위먼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그들은 밸리드와의 전투를 위해 전진하는 카르위먼의 병력들이었다.
주변에 다가가기만 해도 살을 에는 것 같은 날카로운 분위기가 몰아친다.
전쟁에 임하는 그들의 각오는 말 그대로 성전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것이었다.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육신을 벗고 카르나의 곁으로 가 영원의 행복을 누릴 거라는 믿음은 그들을 공포를 모르는 막강한 병력으로 재탄생시켰다.
가장 앞에서 전진하던 와이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병력이 일순간 멈춰 섰다.
고삐를 잡고 와이그는 전면을 주시했다. 얼마 전에 봤던 황야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옆으로 말을 숨겨뒀던 협곡이 보였고, 조금 더 멀리 밸리드의 소굴로 이어지는 동굴의 입구 위에 서 있는 바위가 보였다.
“저깁니다.”
와이그가 손가락으로 바위를 가리키자 주변에 있던 카르위먼의 사람들의 시선이 그것에 쏠렸다.
“저 아래 지저동굴로 통하는 입구가 있습니다.”
“드디어 시작되는군요.”
와이그의 옆에 있던 루벨라가 고삐를 꽉 잡았다.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네. 드디어 시작입니다. 빌어먹을 밸리드 놈들에게 내려줄 심판의 시간이 말이죠.”
곧 있을 전쟁에 와이그도 적잖이 흥분한 상태였다. 눈에는 벌써부터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건 다른 병력도 마찬가지였다. 크든 작든 앞으로의 성전에 마음속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한 명. 지크만은 지극히 침착했다. 아니, 마음속으로 갈아댄 칼이 뿜어대는 냉기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는 상반되는 차가움으로 표출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지크가 고삐를 놓고 말에서 내렸다. 지크는 먼저 신전에 잠입을 하기로 이미 합의를 본 상태였다.
“조심하십시오.”
“조심하세요.”
와이그와 루벨라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적진에 몰래 잠입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게다가 잠입할 곳이 그 밸리드의 북부 총지부가 아닌가.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잡혀도 아는 정보는 별로 없습니다.”
카르위먼은 지크에게 병력의 상세사항을 알려주지 않았고 지크도 의도적으로 그 정보를 피했다. 이미 그것도 협의된 사항이었다.
루벨라가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조심하죠. 그래도 많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확신이 있어서 들어가는 거니까요. 밸리드 놈들 따위에게 잡히는 수치스러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지크가 루벨라의 옆 쪽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말에 탄 한스와 스녹이 있었다.
“저 둘을 잘 부탁드립니다.”
지크는 둘을 놓고 가기로 정한 상태였다.
아무리 지크라도 저 짐덩이 둘까지 데리고 밸리드의 신전을 돌아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내 잘 보호….”
아무리 지크가 원했다 해도 지크를 위험에 몰아넣는 것 같아 입안이 쓴 와이그는 둘의 안전을 책임짐으로써 지크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어 주려 했다.
하지만 와이그의 의도는 지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아뇨. 저 녀석들을 확실하게 부려먹도록 부탁드리는 겁니다. 보호는 필요 없고 최전선에 밀어 넣어도 괜찮습니다.”
한스와 스녹이 동시에 신음했다. 지크는 역시 지크였다.
“그 정도의 교육은 베풀었습니다. 자기 몸 하나는 간수 할 겁니다.”
“난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까지 저 녀석들을 제 품에 두고 있을 순 없죠. 서서히 혼자서 날갯짓을 하는 법을 배워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땅에 떨어져 죽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한스와 스녹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크 없이 거센 전쟁에 뛰어든다는 생각에 암담함을 느꼈다. 그러나 놀랍게도 긴장감은 있을지언정 몸을 얼어붙게 할 정도의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에 지크가 행한 고된 훈련 때문임이 분명했기에 둘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지독하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크의 의견은 와이그도 익히 동의하는 바였다. 그도 검 하나를 들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기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지크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곧 바위 아래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와이그와 루벨라, 한스는 묵묵히 지켜봤다.
“…정말 괜찮을까요?”
루벨라가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성공 가능성을 그리 높게 잡진 않습니다.”
와이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루벨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하지만 지크님이 아닙니까. 그가 보여준 믿기지 않을 일들을 생각한다면 이번에도 충분히 믿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저들을 보십시오.”
와이그가 한스와 스녹을 가리켰다. 그들은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거나 어떻게 싸울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지크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저들도 걱정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저건 지크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믿고 있을 뿐이다. 지크에게는 별다른 일이 없을 거라고.
이미 둘은 지크의 걱정이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도달해 있었다.
“…그렇군요.”
“지크님이 성공하는 편이 전쟁도 수월해집니다. 그러니 모두를 위해 지크님을 믿어 봅시다.”
와이그가 다시 손을 들었다가 앞으로 쭉 폈다. 신호를 받은 병력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지저 동굴에 있는 밸리드의 신전. 목적은 밸리드 신도들의 몰살이었다.
* * *
지크는 빠른 속도로 지저 동굴을 지나고 있었다.
‘카르위먼이 온 건 들켰을 거야.’
들키지 않을 리가 없다.
지크가 보기에도 카르위먼의 정보 통제는 상당했다. 병력도 눈에 띄지 않도록 분산시켜 보내 적어도 이 근처에 오기까지 밸리드가 눈치챘을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본거지 앞에서 저렇게 병력이 모이면 얘기는 다르지.’
부랴부랴 신전의 방어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역시 동굴에는 병력이 없군.’
아마 커다란 지형적 이점을 지닌 지저 호수를 방어선 삼아 전쟁을 치를 생각일 것이다.
전국의 주요 지부에서 병력을 차출한 카르위먼과 아무리 북부 총지부라고 해도 하나의 지부 병력밖에 없는 밸리드. 우위는 당연히 카르위먼에 있다.
지크가 한스와 스녹을 이번 전쟁에 참여시킨 것도 그 이유다.
‘이렇게 수적, 질적 우위에다 기습의 이점까지 있는 전쟁은 얼마 없으니까.’
탓!
지크는 호수 앞에 도착했다. 밸리드의 신전에 다급한 움직임이 보였다.
지크는 옷과 갖고 있는 물건들을 마법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호수에 조심스럽게 뛰어들었다.
조그만 파문이 일고 지크의 몸이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
지크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호수를 건너기 시작했다.
* * *
카르위먼의 병력이 본격적으로 동굴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바위 아래 입구가 작아 병력이 모두 진입하려면 한세월이 걸릴 것 같다.
그에 대한 와이그의 대응은 간단했다.
콰아앙!
황야에 거친 폭음이 일었다. 와이그의 칼질 한 방에 오랜 세월 황야에 서 있던 바위와 그 근방 지면이 통째로 날아갔다.
흙먼지가 걷히자 원래 입구의 수십 배는 될 것 같은 새로운 입구가 떡 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척! 척! 척!
마치 지옥을 정벌하기 위해 지하로 진군하는 천사들의 행렬 같다.
그들은 햇빛이 들지 않는 동굴의 칠흑 같은 어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했다.
곧 카르위먼의 병력은 호수 앞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황야 아래에 있는 대형 동굴에 한 번 감탄했고 그들의 앞에 있는 커다란 지저 호수에 또 한 번 감탄했다.
그리고 호수 건너편에 보이는 밸리드의 신전을 보며 살기를 뿜었다.
호수 너머에서도 카르위먼의 병력이 당도한 것을 확인했는지 움직임이 더 격해졌다. 신전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는 게 보였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카르위먼과 밸리드가 대치했다.
엄청난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살기와 긴장감이 실로 손에 잡힐 것처럼 진하게 흘렀다.
그렇게 서로를 견제하느라 그 누구도 호수에서 누군가 몰래 나와 밸리드의 신전 옆으로 숨어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어디 보자. 이 근처 아니던가.’
카르위먼에 쏠린 밸리드의 시선을 이용해 무사히 호수 너머로 올라선 지크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들어 살금살금 움직였다.
물론 여기가 밸리드의 거점이니만큼 모든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간간이 눈에 띄긴 했다.
서걱!
“컥!”
물론 지크를 발견한 불행한 신자의 운명은 죽음이었다.
숨이 끊어진 신자를 마법 상자에 넣고 지크는 계속 움직였다.
‘역시 괜찮은 검이야.’
지크가 백작가에서 갖고 나온 검은 예전, 웬 정체불명의 마법사와 싸울 때 망가졌다.
지금 그가 사용하는 것은 카르위먼이 지급해준 검이었다.
백작가에서 갖고 나온 검보다 훨씬 좋은 상태의 검이라 지크는 썩 만족했다.
그는 계속 움직였다. 신전의 벽을 따라 쭉 들어갔다.
‘있다!’
그의 눈에 작은 문이 보였다.
웅장한 분위기와 거대한 크기의 정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문은 문. 지크가 들어가기에 충분하다.
문 건너편에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크는 문을 열었다.
안은 어두컴컴했다. 온갖 상자들과 물품들이 쌓여 있는 걸 보니 창고인 모양이었다.
‘역시 같군.’
지크는 씨익 웃었다.
그는 신전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건축의 조예가 있어 겉모습만 보고 내부를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여기는 내가 정말 자근자근 조각냈으니까.’
당시 카르위먼만큼이나 밸리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지크는 이곳을 함락한 후 아주 건물을 해체시켜 버렸다.
그것도 부하들은 손도 못 대게 하고 자기 혼자서.
부수고 부수고 부수고 부수고 또 부쉈다.
얼마나 철저하고 꼼꼼하게 부쉈는지 그때의 구조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사소한 건 잘 잊어버리는 지크의 성정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비밀 통로나 방 같은 것도 많이 찾았고 말이지.’
밸리드 신자들이 알면 분노에 뒷목을 부여잡을 일이다.
지크는 창고를 벗어났다. 밸리드 신자들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지크는 그 사이사이를 귀신같이 지나갔다. 대부분의 시선이 호수 너머 카르위먼에게 쏠려 있는 터라 지크의 침입을 눈치채긴 힘들었다.
‘트리슬로와 녀석은 밖에 있겠지?’
이 총지부를 책임지는 녀석이니 당연히 지휘를 위해 밖에 나가 있을 터.
‘불러들여야지.’
지크가 이렇게 사건을 크게 만든 이유가 무엇이던가. 오직 트리슬로와 녀석을 끝장내겠다는 생각 하나로 벌인 일이 아니던가.
양동 작전을 위해서도 그를 끌어들이는 편이 좋았다. 게다가 그 편이 녀석을 괴롭힐 기회를 잡기도 수월했다.
‘녀석을 카르위먼에게 양보할 수는 없으니까.’
지크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