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방 안에 마치 서리라도 내린 것 같다.
한스와 스녹, 루벨라는 물론 현재 명백하게 지크보다 강한 와이그와 교황조차 일순 얼굴이 굳었다.
와이그의 손이 슬그머니 허리춤의 검의 손잡이를 더듬었다.
그 정도로 지크가 뿜어낸 살기는 강했다.
“홀홀홀! 무척 무섭군요. 지크 님이 얼마나 분노하고 계신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살기는 거둬주시지 않겠습니까. 오늘내일하는 늙은이의 심장에 무리가 가는군요.”
“이런. 잠시 감정이 격해졌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지크가 살기를 거뒀다. 한스와 스녹, 루벨라의 표정이 조금은 편해졌다. 하지만 바로 원상태로 회복하진 못했다.
교황이 말했다.
“이해합니다. 저도 아끼던 친우들과 기특한 후배들을 밸리드 놈들에게 잃었죠. 그놈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죄악인 녀석들입니다. 그러니 단 한 명도 놓치지 말아야죠.”
지크처럼 직접적인 살기를 뿜진 않았지만 교황의 기세도 매서웠다.
한스와 스녹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동네 옆집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을 뽐내던 교황에게서 거대 세력의 수장이 내뿜는 위엄을 그제서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크 님의 원수가 컬룬 트리슬로와 추기경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가 갈릴 정도로 악독한 놈이죠. 놈을 인간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강합니다. 와이그 경만큼 강하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카르위먼의 최상급 신관 정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걸로 추측됩니다.”
자신이 트리슬로와와 비교되는 것이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와이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교황은 물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루벨라조차도.
와이그는 조금 서글펐다. 예전의 순진했던 루벨라가 잠깐 그리워졌다.
“지크 님은 그 나이 대에 비해서는 무척 강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놈보다 강하다고 생각되진 않는군요.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공격을 시작할 때 저도 안에서 움직일 겁니다. 양동은 될지언정 여러분의 방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생각을 바꾸시지 않겠다는 거군요.”
루벨라가 지크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하지만 지크의 굳은 결심을 이해한 것인지 별말은 하지 않았다.
교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은 무척이나 은밀히 진행될 겁니다. 해충들이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가면 안 되니까요. 외부는 물론 내부에도 정보 통제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지금 모이고 있는 병력들도 자신들이 밸리드 공격을 위해 모이고 있다는 건 모릅니다.”
“주변 나라들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사람들은 카르위먼의 병력이 움직이는 것에 불안감을 느낄 텐데요.”
“다른 미끼 정보를 뿌려놨습니다. 우리가 병력을 움직이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니까요. 토벌이 끝나면 그때 사실을 말해주려 합니다. 불쾌감을 표하는 나라도 있겠습니다만, 밸리드 토벌은 모든 나라에서 인정한 우리 카르위먼의 권한이니까요. 문제 없을 겁니다.”
그러나 교황의 말처럼 아무 문제가 없진 않을 것이다. 특히 북부 총지부가 있는 황야를 영토로 가지고 있는 나라와 영지는 더더욱.
하지만 교황은 작전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이건 토벌전이자 외교전이다. 그리고 교황은 모든 카르위먼 신도의 경외를 받는 존재인 동시에 카르위먼이란 집단의 수장. 당연히 이런 속고 속이는 전략에도 익숙했다.
무인인 와이그와 순수한 신관인 루벨라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가볍게 성호를 그어 신께 용서를 빌었다. 한스와 스녹도 교황의 말에 놀랐다.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이건 분명 사람들을 속이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역시 한 집단의 수장은 수장이야.’
그저 ‘허허!’ 웃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는 이 거대 집단을 이끌어 나갈 수 없다. 그리고 카르위먼은 그만큼 밸리드를 증오한다.
‘뭐, 이런 성향 때문에 여기다 꼰지른 거긴 하지만.’
지크는 만족했다.
“하니 세 분도 정보 은폐에 특히 주의해주십시오.”
“출진 전까지 신전에 머무르도록 하죠. 교황께서도 그 편이 더 안심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죠.”
안 그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교황은 냉큼 지크의 제안을 받았다.
“최고 수준의 손님 대접을 하겠습니다. 절대 불편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이후 몇 번의 대화가 더 오고 갔다. 구체적인 협력 방법은 어느 정도 작전의 얼개가 짜여진 후에 하기로 하고 사람들은 자리를 파하기로 했다.
“아, 그런데 혹시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크가 일어나기 전 물었다. 교황은 흔쾌히 대답했다.
“지크 님은 카르위먼의 은인이시니 조금 무리한 부탁이라도 최대한 들어드리겠습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명예 성기사의 직위. 제게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제가 듣기론 와이그 경이 명예 성기사를 권유했을 때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때는 별로 필요하지 않아서요.”
“지금은 필요한 일이 생기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거부할 이유가 없군요. 지크 님 같은 분을 명예 성기사로 받아들이는 건 카르위먼에게도 무척 좋은 일이니까요. 공도 충분하다 못 해 넘치도록 세우셨고 말이죠. 바로 발급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벨라와 와이그의 안색이 밝아졌다. 안 그래도 지크를 명예 성기사로 임명하고 싶어하던 둘이니 이 상황이 퍽 흡족했다.
“그런데 명예 성기사의 자격이 필요한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아, 지크 님이 어떤 이유를 말하시건, 그게 혹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도 제가 말을 번복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제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니까요. 말하기 어려우시다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이 물었다.
지크가 웃었다. 아까 와이그가 본능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갈 정도의 살기 어린 웃음은 아니었지만 이번 웃음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는 내심이 훤히 보이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 소년이 죽은 후 생각을 했죠. 어떻게 해야 트리슬로와 그놈이 더 열이 받을까. 어떻게 해야 그놈이 더 미쳐 날뛸까. 그렇게 생각하며 계획을 세우다 보니 명예 성기사 자격을 갖고 있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뿐입니다.”
교황을 포함한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지크와 한스, 스녹이 방을 나가고 방에는 교황과 루벨라, 와이그만이 남았다.
“생각 이상으로 개성적인 사람이군.”
교황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성격이 조금 저래도 행동은 똑 부러집니다. 오히려 저런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착한 일을 하려 애쓰고 있으니 더더욱 평가받을 만하죠.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로서 분명 부끄러움 없을….”
교황의 웃음이 더 커졌다. 이제는 숫제 방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말을 하던 와이그가 입을 다물었다.
“아, 미안하네, 미안해. 자네를 비웃을 생각은 없었네. 그저 자네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는 사람을 루벨라 외에 처음 봐서 말이야.”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와이그는 멋쩍어했다. 괜히 테이블의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루벨라? 자네도 와이그 경과 비슷한 생각인가?”
“네. 지크 님의 성격이 더러운 건 확실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황이 다시 웃었다.
“큭큭큭! 그 루벨라가 내 앞에서 ‘성격이 더럽다’ 운운하다니. 예전의 자네였으면 그런 속된 말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텐데.”
너무 말을 함부로 한 것 같다.
루벨라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지.”
루벨라를 돕고 강단을 갖게 해줬으며 밸리드에게 한 방 먹이고는 악독한 의식의 해결 방법까지 전해줬다. 그리고 이번엔 밸리드의 거점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만큼 정체불명의 사람인 것도 사실이란 건 인정하지?”
루벨라와 와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크가 그들에게 엄청난 도움을 줬기에 전적으로 신뢰를 하는 것뿐이지, 그가 여러모로 수상한 자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너무 고민하지 말게. 고작해야 수상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도 없는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자네들은 계속 그를 믿게나. 하나 나는 그를 의심해야겠어. 그건 한 집단을 이끄는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네.”
교황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 통쾌하게 웃던 모습과 완전히 상반되어 지금은 그 나이 대의 노인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교황이란 것도 할 게 못 돼. 카르나 님의 가르침과 속세의 법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니.”
“그런 성하를, 적어도 저는 존경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도예요!”
카르위먼 최강의 성기사와 곧 성녀가 되는 것이 확실시되는 성녀 후보의 말.
순간적으로 늙어 보였던 교황의 얼굴이 제 혈색을 찾았다.
“…홀홀!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군. 그래. 뭐가 문제겠는가. 내 편이 적어도 둘이나 있거늘.”
그가 두 사람과 눈을 맞추었다.
“아마 이번 전쟁은 무척이나 치열한 전쟁이 될 게야. 긴 카르위먼의 역사상에도 이 정도 규모의 밸리드 지부를 공격한 적은 없으니까. 자네들은 그 선봉에 서야 하네. 자신은 있는가?”
최강의 성기사와 확정적인 다음 대 성녀. 카르위먼 최고의 패를 아깝다고 숨겨둘 수는 없다.
“물론입니다. 애초에 이 건은 지크 님이 저희에게 가져오신 것. 게다가 루벨라 님이 성녀가 되기 전 세울 마지막 공으로 이것만큼 좋은 것도 없죠. 무엇보다 이건 성전이 아닙니까.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마지막 공 운운만 뺀다면 저도 와이그 님의 의견과 같아요.”
“그럼 됐네.”
교황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방에서 모이고 있는 성기사들과 신관, 거기에 자네들까지 합한다면 능히 밸리드의 지부를 토벌할 수 있겠지.”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입맛을 다셨다.
“제너드 경도 부를 수 있다면 좋았는데 말이야.”
“저번에 명예 성기사의 칭호를 부여받은 사람 말인가요?”
루벨라가 물었다.
“그래. 무척이나 인품이 뛰어나고 실력도 그 나이에 비해 굉장히 강하지. 그러고 보니 지크 님과 비슷한 면도 있군그래.”
젋고 실력이 뛰어나며 선행을 베풀고 살고 있다. 물론 성격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
“연락이 닿지 않는 게 아쉬워. 하지만 어쩌겠나. 명예 성기사는 우리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닌 것을.”
“제너드 경인가요.”
“뭔가 문제가 있나?”
그 루벨라가 조금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을 보이자 교황이 놀라 물었다.
“아니요. 문제는 없어요. 그저 만날 때마다 무슨 고민 같은 건 없는지 은근슬쩍 물어봐서요.”
“제너드 경이 루벨라 님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입니다.”
와이그가 껄껄 웃었다. 젊은이들의 연애사를 듣고 즐거워하는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루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르나 님을 모시는 자로서 연애나 결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전부 알면서 그러시나요?”
“그것참, 루벨라 님을 사모하는 남자들의 눈에 피눈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자꾸 그러시면 저도 전력으로 와이그 님의 혼처 자리를 주선해보죠.”
“전 나이가 많습니다.”
“원래 그 나이 대에 이뤄지는 사랑이 더 로맨틱한 것 아시죠?”
루벨라를 놀리려다 본전도 못 찾았다. 와이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암묵적인 패배선언이었다.
“얘기가 다른 곳으로 흘렀네요. 저에게 호감을 가진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요. 뭔가 탐색을 하는 눈빛이랄까요.”
“흠. 앞으로 성녀가 될 루벨라 님을 떠보는 걸 수도 있겠군요. 루벨라 님이 불쾌하게 느끼신다면 제가 한마디 해놓겠습니다. 의도가 좋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불쾌감을 느낀다면 지양해야 하니까요.”
“아뇨, 괜찮아요. 근래에는 그러지 않더라고요.”
“호기심이 사라졌나 보군요. 하지만 만약 뭔가 불쾌한 일이 있다면 저나 성하께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잘 중재를 해볼 테니까요. 성하도 분명 그러하실….”
와이그가 말을 흐렸다.
교황이 루벨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두근두근 기대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그 근간에는 장난기가 잔뜩 끼어 있었다.
“…왜 그러시죠?”
루벨라도 교황의 시선을 눈치채고 의아하게 물었다. 교황이 대놓고 실망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는 혼처 자리 주선해준단 소리 안 하나? 그렇게 와이그 경만 챙기면 무척 섭섭하네.”
잠시간의 침묵. 루벨라가 당황했고 와이그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