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메마른 바람이 대지 위를 지난다.
황량한 광야의 모래가 바람에 휘날려 훅 솟았다.
그대로 허공에 뱅글뱅글 돌며 이동하다 일부는 이름 모를 곳에 떨어지고 일부는 우뚝 솟은 바위에 부딪쳤으며 일부는 키 작은 관목에 내려앉기도 했다.
녹음이라고는 고작해야 관목 몇 개가 점점이 보이는 대지.
농사가 불가능하고 사냥감도 극히 적어 사람들의 관심이 닿지 않는 황야로 말을 탄 두 사람이 보였다.
지크와 와이그였다.
얕은 언덕의 꼭대기까지 올라온 와이그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는 앞을 쳐다봤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야 저 너머로 지평선이 아스라이 보인다. 그 광대한 모습에 와이그는 저도 모르게 감탄의 말을 흘렸다.
“세상이란 건 정말로 사람의 인지를 초월하는군. 설마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천하의 와이그 님도 이런 광경은 처음 보시는 모양입니다.”
지크가 와이그의 옆에 서며 말했다.
“루벨라 님을 보호하거나 이단들을 숙청하는 게 내 일이니 느긋하게 세상을 돌아볼 시간은 없지. 물론 나도 꽤 세상을 봤다고 자부는 했네만 아무래도 나도 오만했던 모양이야. 신께서 만드신 세상을 내 잣대대로 재려고 했다니.”
와이그가 경건하게 성호를 그었다.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런 감상을 갖는군요.”
“자네가 카르나 님을 믿게 된다면 나와 비슷한 감성을 가질 걸세. 어떤가? 카르위먼의 문은 언제나 자네에게 열려 있다네.”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지크는 와이그의 포교를 여느 때와 같이 가볍게 거절했다. 와이그도 생각나서 한 번 찔러본 것뿐이라 실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말이야, 지크. 여기에 밸리드의 북부 총지부가 있다는 게 정말인가?”
지크와 와이그가 이 황량한 곳까지 온 이유는 북부 총지부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루벨라와 와이그는 지크를 믿었지만 이건 신뢰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정말로 밸리드의 북부 총지부와 전투를 하기 위해선 교단 차원에서 움직여야 한다. 아무리 그 아이네 루발라와 벨리 와이그가 지크의 말을 신뢰한다 해도 직접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그걸 위해 지크와 와이그가 이 황폐한 곳까지 온 곳이었다.
“자네를 의심하는 건 아니네. 하지만 여긴 밸리드 놈들이 신전을 세울 만한 곳이 아닌 것 같아.”
밸리드가 모시는 신 밸르는 물의 신이다. 때문에 밸리드에는 신전을 세울 땅을 고를 때 절대적인 원칙 하나가 있었다.
바로 물이었다.
그게 강이든 호수든 바다든 밸리드의 신전은 무조건 물 근처에 세워져야 했다. 게다가 세우려는 신전의 규모와 중요도가 크면 클수록 끼고 있는 물의 규모도 커야 했다.
그래서 카르위먼도 밸리드의 신전을 수색할 때 일단 주변에 물이 있는지부터 파악하곤 했다.
지금 그들이 찾고 있는 건 밸리드 북부의 모든 지부를 총괄하는 북부 총지부. 당연히 그 중요도상 엄청난 양의 물이 근처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곳은 많은 물이 있을 것 같은 환경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이 극도로 부족해, 밸리드 놈들은 근처에도 안 올 것 같은 환경을 갖고 있었다.
“겉보기로는 그렇죠. 그리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그놈들을 찾지 못한 거고요.”
“확실히 일리는 있는 말이네만.”
이 근처에 밸리드의 신전이 세워져 있는 게 사실이라면, 이 메마르고 황폐한 환경은 물을 중점적으로 밸리드의 신전을 찾아다닌 자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장이 되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지크는 말의 고삐를 당겨 출발시켰다. 와이그도 기대를 품고 지크의 뒤를 따랐다.
얼마 안 가 그들은 깊은 협곡의 입구에 다다랐다. 양옆으로 가파른 절벽이 끝 간 데 없이 서 있었다.
“여기다 말을 숨기죠.”
지크와 와이그는 절벽에서도 푹 파인 곳을 찾아 말을 맸다. 건초 몇 더미를 앞에 던져주고 그때부터 걷기 시작했다.
협곡을 벗어나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사람 키보다 네다섯 배는 더 커보이는 바위는 메마른 바람이 연신 때려대는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황야에서 서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바위가 아니었다. 그 바위가 언제부터 얼마나 이 가혹한 환경을 견뎌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크가 볼일이 있는 것은 바위 아래에 있는 구멍이었다.
“여깁니다.”
구멍의 크기는 꽤 컸다. 사람 한 명이 서서 걸어들어갈 수 있는 정도.
와이그가 무릎을 꿇고 땅을 살폈다. 모래 위로 드러난 돌바닥이 미세하지만 닳아 있었다.
“분명 뭔가가 나다녔군.”
“여기부턴 조심해야 합니다. 놈들의 본거지니까요.”
“왜, 두렵나?”
와이그가 농담조로 물었다. 지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렵습니다. 놈들이 들켰다는 걸 눈치채고 습격 전에 도망칠 상황이 말이죠.”
“확실히 그건 두려운 상황이군.”
와이그는 동의했다.
둘은 바위 아래 구멍으로 들어갔다.
구멍은 동굴로 이어져 있었다. 규모는 굉장히 컸다.
설마 이런 광야 아래 이렇게 커다란 지하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는 몰라 와이그는 감탄했다.
“여러모로 견문이 넓어지는 여행이야.”
“와이그 님이 여행자가 되신다면 더 신비로운 세계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내가 자꾸 카르위먼으로 권유한 것에 대한 복수인가? 한방 먹었군.”
둘은 계속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벗어나자 곧 빛 한 점 없는 세계가 펼쳐졌지만, 마력을 사용해 시야를 밝힐 수 있는 둘의 걸음은 느려지지 않았다.
동굴은 길었다. 울퉁불퉁하고 미끄러운 동굴을 거의 세 시간가량 걸었을 때였다.
불빛이 나타났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바위를 찾아 그 뒤에 몸을 숨겼다.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군.”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커다란 지저호수였다. 그 규모는 굉장히 방대해, 호수 건너편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 규모의 호수정도면 밸리드 놈들이 충분히 중요한 신전을 세울 수 있어.’
그들이 목격한 불빛은 호수 건너편에서 흘러오고 있었다.
거리가 무척이나 멀었지만 그 불빛은 뚜렷하게 보였다.
와이그가 웃었다.
‘정말 있었군!’
호수 건너편에 많은 횃불이 빛을 내고 있었고 그 사이로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다. 높이는 커다란 동굴의 천장까지 닿을락 말락 할 정도였고 보이는 전면의 크기만 해도 웬만한 대신전에 버금갔다.
무엇보다 와이그를 반갑게 한 것은 건축물 위편에 뚜렷하게 박힌 밸리드의 표식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건축물 안팎을 왔다갔다 하는 모습도 보였다. 마력으로 높아진 와이그의 눈에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뚜렷하게 보였다.
‘복장도 밸리드의 것이야!’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이곳은 지크의 말대로 밸리드의 중요 거점이 틀림없었다.
“이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와이그 님?”
와이그가 지크를 향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돌아가자마자 카르위먼의 최고 병력을 준비하지!”
* * *
지크와 와이그는 총단으로 귀환했다.
와이그는 교황을 찾아가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황야, 동굴, 지저호수 그리고 밸리드의 신전까지.
외부인인 지크와 교단 최고의 성기사인 와이그의 말은 그 무게가 다르다.
당장 교황의 주도하에 밸리드 토벌을 위한 병력이 구성되기 시작했다.
각 주요 지부에 있는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모여들었다. 물자가 쌓이고 병기가 전해졌다.
증오스러운 밸리드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다.
카르위먼은 철저했다. 그리고 은밀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계획이 밸리드 놈들의 귀에 들어갈까 위장계획까지 꾸몄다.
그렇게 카르위먼이 닥쳐올 전쟁을 준비할 때, 지크는 굉장히 높은 신분의 인물을 만나게 됐다.
비쩍 곯은 노인이었다. 얼굴에 주름은 자글자글하고 소매 아래로 보이는 팔뚝은 깡말랐다.
하지만 그 인상만은 서글서글한 것이 자애로운 할아버지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일국의 왕이나 황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크라고 합니다.”
지크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긴장감을 애써 내리누르며 그의 신분을 호칭했다.
“성하.”
“홀홀! 만나서 반갑습니다!
가볍기 그지없다. 인자한 미소가 걸린 얼굴에는 모든 걸 포용할 것 같은 후광마저 보일 것 같다.
어른이라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띄우고 아이라면 옷자락에 매달려 해맑게 뛰어 놀 것 같은 분위기를 두른 노인.
바로 교황이었다.
‘죽겠네.’
지크에게 회귀 후 루벨라와 와이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긴장감이 몸을 타고 흘렀다.
‘루벨라 이전의 좀비 메이커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될 줄이야.’
심지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 인사까지 하고 있다.
회귀 전, 카르위먼과 심심찮게 충돌했던 지크에게 교황은 엄청나게 까다로운 적이었다.
루벨라가 그렌 제너드와 여행을 하며 본격적으로 경험을 쌓기 전, 카르위먼의 최고, 최강의 신관은 그였던 것이다.
‘농담 아니고 정말 죽을 뻔했지.’
지크의 악명이 끝 간 데 없이 높아지자 한 번은 교황이 손수 지크를 처리하기 위해 카르위먼의 정예들과 나온 적이 있었다.
지크는 그때 단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죽을 뻔했다.
‘적이 정말 뒤지질 않았어.’
후방에서 성기사들을 보호하고 회복시키며 지원 공격까지 한다.
물론 지크도 이를 악물고 죽기살기로 저항하여 결국 승리할 순 있었다.
하지만 승리라곤 해도 그들이 태세를 정비하려 물러난 것뿐이었다. 지크도 뚜렷한 전과는 없었다.
그리고 그 후, 지크는 한동안 카르위먼과 직접적인 충돌을 피했다.
물론 지크가 더욱 강해져 ‘힘의 마왕’이란 칭호를 받았을 때 붙어본 적은 없다. 이미 교황은 그 전에 수명으로 죽었었으니까.
하지만 그 압도적인 성력은 지크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 뒤의 분들은 지크 님의 종이라고 하셨죠?”
교황이 묻자 지크의 뒤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던 한스와 스녹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네! 지크 님의 종인 한스라고 합니다!”
“스, 스녹이라고 합니다! 이, 이 애는 노웸이고요.”
“홀홀홀! 기운찬 분들이군요.”
한스와 스녹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카르위먼의 교황이 누구인가. 어쩌면 일국의 황제나 왕보다도 만나기 힘든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이 그 카르위먼의 교황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제 종들이 예의가 없는 것에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저 또한 카르나 님의 종인 것을,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까다롭게 예의를 따진단 말입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의 정도면 충분합니다.”
소소하고 털털하다. 교황은 옆에 있는 테이블에 앉을 것을 권했다.
교황과 지크가 마주 앉고 교황의 옆에 루벨라, 와이그가 지크의 옆에 한스, 스녹이 앉았다.
“일단 먼저 밸리드 그 잡것들의 은신처를 알려주신 것에 대해 카르위먼의 대표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리 인자하고 소탈하다 해도 카르위먼은 카르위먼인 것이 밸리드를 부르는 호칭에 그대로 나타났다.
“제가 원하는 게 있어 손을 잡았을 뿐이니 지나친 감사는 받기 힘듭니다.”
“밸리드는 카르위먼의 적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해충이지요. 지크 님은 세상을 위해 무척 대단한 일을 하셨으니 충분히 감사를 받을 만한 분이십니다.”
그러더니 교황은 옅게 웃었다.
“그래도 지크 님께서 쑥쓰러워하시니 이 일은 그만 언급하도록 하죠. 오늘은 감사 인사와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논할 게 있나 해서 찾아왔습니다. 복수를 원하신다고 하셨는데, 당연히 전투에 참여하실 생각이시죠?”
“물론입니다. 단, 여러분과 같이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하면?”
“여러분들이 신전에 공격을 할 때 전 신전에 잠입할 생각입니다.”
“그 소년을 죽인 자를 처리하실 생각이군요.”
이미 대략적인 전후 사정은 들은 바, 교황은 지크의 목적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지크가 웃었다. 섬뜩하고 잔혹하게.
“쉽게 죽이진 않을 생각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