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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91화 (91/628)

제91화

루벨라는 오늘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새하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신성해 보였다.

감겨 있던 두 눈이 떠졌다. 꼭 모은 손을 풀며 그녀가 일어섰다.

오랜 시간 꿇어 앉은 무릎에서 조금 통증이 느껴졌지만 루벨라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 기도실의 입구로 향했다. 기도실 전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성물이 마치 그녀의 등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끼익!

“어머?”

두꺼운 문을 열자 바로 보이는 와이그의 얼굴에 루벨라가 놀랐다.

와이그가 루벨라를 보고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기도는 잘 올리셨습니까, 루벨라 님.”

“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보아하니 용건이 있는데 자신이 기도를 올리는 중이라 기다린 것 같았다. 와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운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반가운 친구요?”

“지크. 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루벨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지크 님이 오셨다고요?”

“저와 루벨라 님을 보겠다고 찾아왔더군요. 바쁘시면 저 혼자 보겠습니다만….”

“당장 가죠!”

루벨라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정숙을 유지해야 하는 신전이기에 뛰지 않을 뿐, 그녀의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온 와이그의 말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움직이시는 거겠죠?”

“…어디 있나요?”

와이그는 피식 한 번 웃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진 루벨라를 데리고는 지크 일행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 * *

“와아!”

스녹이 연신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의 시야가 때 하나 없는 새하얀 방을 훑었다. 자그마한 성물 하나가 유일한 장식물인 방은, 장소가 장소라서 그런지 자체적으로 어떤 성스러움을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한스도 카르위먼 총교단의 웅장함에 적잖게 놀랐다. 그저 지크만이 담담하게 손님용 차를 홀짝였다.

똑! 똑!

“들어 오세요.”

지크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지크와 한스는 익숙하고 스녹은 처음 보는 얼굴이다.

“오랜만이군요, 두 분 다.”

지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인사를 건넸다. 지크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들, 루벨라와 와이그가 반가워했다.

“오랜만입니다, 지크 님.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군요.”

먼저 와이그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옆집 할아버지 같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해왔다.

예전 밸리드 놈들과의 싸움에 공투를 했을 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헤어진 시간 동안 ‘타스니아의 킬링머신’의 웃는 낯이 다시 어색해진 모양이다.

지크는 부들거리는 볼을 애써 참으며 와이그와 악수했다.

“어서 오세요, 지크 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미소띤 루벨라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루벨라에게는 와이그처럼 강렬한 거부감이 일진 않았다.

한스와 스녹도 루벨라, 와이그에게 인사를 했다. 스녹은 자신의 앞에 등장한 사람들의 신분을 듣고는 얼어붙었다.

“루벨라 님은 얼굴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제가 예전에 드린 조언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죠?”

“이를 말인가.”

지크의 질문에 루벨라 대신 와이그가 냉큼 대답했다.

“아주 그놈들은 요새 나나 루벨라 님에게 기를 못 편다네. 애초에 상대도 안 되는 놈들이 질투심에 사리분별 못 하고 날뛴 것뿐이니까.”

그러며 크게 웃는 것이 여간 통쾌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잘 극복하셨군요.”

“지크 님 덕분이에요.”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라 생각하기에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루벨라는 베시시 웃었다. 하지만 와이그는 루벨라의 자랑을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 일 이후에 루벨라 님의 입지는 탄탄해지셨네. 애초에 실력, 성품 그 모든 게 압도적인 분이셨거든. 지금 카르위먼에서 성녀 후보 하면 백에 아흔아홉은 루벨라 님을 떠올리지.”

“와이그 님, 그만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여전히 겸손도 하시지.”

루벨라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와이그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할아버지, 손녀 같은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라네. 솔직히 루벨라 님이 ‘프리멜’이란 이름을 받기까지는 한 걸음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프리멜. 성녀에게 하사되는 미들 네임.

카르위먼의 사람들이 함부로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다. 그것도 와이그 같은 독실한 신도라면 더더욱.

그건 그만큼 루벨라의 성녀 임명이 가까워졌단 뜻이었다.

와이그가 확신에 차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정도로 말이다.

“그 남은 한 걸음을 걷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필요합니까?”

지크가 물었다.

“아무거나.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일세. 솔직히 이제는 그저 명분 쌓기만 남은 거거든. 그저 가벼운 공 하나만 세우면 된다네. 한, 한 달 정도 예전처럼 마을 순회를 해도 될 정도야.”

“그러면서 또 밸리드 놈들이 걸리는 걸 기대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크가 말하자 루벨라와 와이그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포르티의 사건이 떠오른 것이다.

지크도 같이 껴서 웃었지만 그때 없었던 스녹은 어색하게 노웸을 껴안았다. 그리고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는 그저 와이그를 부르러 다리가 부르트도록 달린 것뿐이지만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들은 그 사건을 떠올리고 웃고 있다.

‘저게 대단한 사람들의 배포인가?’

새삼 그들과 자신의 차이가 느껴졌다.

“그래그래. 밸리드 놈들을 또 한 번 토벌할 수 있으면 좋지. 하지만 그런 사건이 또 일어나겠나.”

지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경험 많은 와이그는 그것만으로 지크에게 무슨 생각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찾아온 이유를 묻지 않았군. 자네 성격상 아무런 용건도 없이 우리를 찾아오진 않았을 테고 말이야.”

“루벨라 님이 ‘프리멜’이란 미들 네임을 수여받기까지 한 걸음 남았다고 하셨죠?”

“그렇네.”

“그리고 필요한 건 작은 공이고요.”

“그렇지.”

“카르위먼의 성녀로 인정받게 되는 마지막 공입니다. 작은 것 말고, 크고 화려한 건 어떻습니까?”

“예를 들면?”

“밸리드 북부 총지부의 괴멸이라든가 말입니다.”

* * *

툭! 툭!

와이그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다른 쪽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는 루벨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스, 스녹에 이르러선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들은 지크에게 별다른 말을 듣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까….”

와이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선행을 하던 마을의 사람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는데, 그게 밸리드 놈들의 소행이었다고?”

“네.”

지크는 펜과 종이를 요구하고는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건 비참하게 죽어간 소년의 가슴에 새겨진 상흔이었다. 지크는 그걸 루벨라와 와이그 앞으로 밀었다.

“무슨 표식인지는 아시죠?”

“밸리드 놈들의 개짓 중 하나지. 사람을 죽지 않게 하는 흑마법.”

죽지 않게 한다는 말에 불로불사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이건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사람의 생기를 밸르 놈의 기운으로 물들여 일정 시간 동안 그 어떤 치명상에도 사람들의 목숨을 붙어 있게 하지. 밸르의 기운을 품고 있는 신도들한테는 통하지 않아 보통 적을 고문하는 상황에서 상대가 죽지 않도록 사용할 때가 많고 말이야.”

“그리고 인간을 가지고 놀 때도 많이 사용하죠.”

“…누군가 당했나?”

“네.”

지금껏 환한 접대용 미소를 짓고 있던 지크의 입꼬리에 날카로운 살기가 맴돌았다.

“제가 꽤 귀여워한 녀석이 말이죠.”

“안타까운 일이군.”

와이그가 성호를 그었다. 루벨라도 옆에서 조용히 기도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기 전에 자기를 그렇게 만든 인간의 인상착의를 알려줬습니다.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고 얼굴의 반이 문신으로 뒤덮인 사내였다더군요.”

루벨라와 와이그의 얼굴이 굳었다.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트리슬로와 추기경.”

“흥! 그놈들에게 추기경이란 명칭은 아깝습니다, 루벨라 님.”

하지만 그렇게 말한 와이그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컬룬 트리슬로와. 밸리드 교단의 교황 바로 아래 계급인 추기경 중 한 명으로, 세계에 온갖 해악을 끼치는 자였다.

특히 카르위먼과는 앙숙인 두 종교의 특성상 항상 피로 피를 씻는 충돌을 거듭하는 자였다.

“그놈에게 희생된 카르위먼의 신도들이 한가득이야. 당장이라도 목을 쳐버려야 하는데.”

당연히 카르위먼의 검이라고까지 칭해지는 와이그로서는 당장 살점을 씹어먹고 싶은 놈이었다.

“그놈이 마을에 나타났었다고?”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동 중 마을에 식량을 사러 왔다가 놈들 딴에 ‘재미’를 좀 본 모양입니다. 희생자는 마을 변두리에 사는 빈자들 뿐. 그 정도 희생이면 마을에서도 그렇게 크게 유난 떨지는 않을 테니까요.”

“개자식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그 마을은 넓은 평야로 뒤덮여 있는 곳에 위치합니다. 주변 산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죠. 그런데 그곳에 몬스터가 상당히 많이 나타났었습니다. 오크는 취락까지 만들었더군요.”

“트리슬로와가 나타난 곳에 거기에 있는 게 이상한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단 말이지. 뭔가 냄새가 나는군.”

“분명 뭔가 꾸미고 있습니다.”

와이그는 지크에게 동조했다.

“좋네, 지크. 상대가 밸리드 놈들이라면 난 어떤 전장이라도 달려갈 생각이야.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놈들은 음습한 해충들처럼 움직인다네. 우리도 그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내지 못했지. 자네, 분명히 밸리드 북부 총교단의 괴멸이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럼 그놈들의 북부 총지부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뜻이겠지?”

지크가 씨익 웃었다. 대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아 좋아. 루벨라 님이 성녀로 인정받는 마지막 공이 그 정도라면 아주 조금 남아 있던 불만 섞인 무리도 납득할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밸리드 놈들을 쳐죽이는 건 우리 카르위먼의 의무고 말이야.”

그렇게 말한 와이그가 마치 떠보듯 말했다.

“그런데 자네, 그놈들이 있는 곳의 정보는 어떻게 얻었나? 우리는 물론 다른 나라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정보야. 물론 자네의 친가인 스틸월 백작가도 그렇고.”

이미 지크에 대해 조사를 한 모양이었다.

반쯤 농담 삼아 루벨라에게 백작가를 조사해보라고 먼저 권했던 게 지크였던 만큼 놀랄 일은 아니었다.

“우연찮게 얻었습니다.”

정확히는 회귀 전에 그렇게 얻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얻는 즉시 그곳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초토화시켰었다.

“역시 그런 반응이군. 뭐, 좋네. 나는 자네를 믿으니 더 이상 묻지 않지. 하지만 이건 꼭 대답해줬으면 싶네.”

와이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밸리드의 다른 지부의 장소도 알고 있나?”

“두 군데 정도 압니다. 원한다면 알려드리죠.”

와이그가 박수를 쳤다.

“좋군! 정말 좋아! 역시 자네는 카르나 님께서 엮어주신 인연이 틀림없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지크의 머릿속에 회귀 전 카르위먼과 죽도록 싸웠던 기억이 샘솟았다.

“자네에게 모든 걸 지원하지. 북부 총지부가 목적이라고 했지? 자네 말을 들어보면 그곳이 트리슬로와 놈이 관리하는 곳인가 보군.”

와이그가 목을 내밀어 지크를 쳐다봤다.

“역시 목적은 복수겠지?”

지크가 서늘하게 웃었다.

“그놈 덕에 전 그 아이의 이름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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