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한스와 스녹이 각자의 상념을 안고 생각에 잠길 때, 지크는 예전 전투를 떠올리며 정보를 정리했다.
‘일단 그 암살자 놈들이 마인을 만드는 건 확실해졌어. 그것만으로도 이번 사건은 의미가 있었어.’
놈들에게 다가갈 실마리가 잡혔다.
앞으로 마인이 생기는 곳을 뒤져보다 보면 놈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고, 그렇게 하나하나 꼬리를 잡아가다 보면 본체에 닿을 기회가 올 것이다.
‘그 순간에 물어뜯어야지.’
본체가 얼마나 클지는 모르지만 지크도 왕년에 ‘힘의 마왕’이라 불린 자다. 이빨은 자신이 있다.
가죽을 뚫고 근육을 찢고 내장마저 토막 내서 향기로운 내장의 냄새를 맡을 것이다.
‘그놈들은 대충 어떻게 할지 비전이 섰는데 말이야.’
생각이 다음 화제에 이른 순간, 지크도 조금 골치가 아팠다.
그를 또렷하게 ‘지크 모어’라 부른 은발의 여성.
‘회귀 전의 나를 안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알게 됐을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여자도 회귀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도, 겉으로 보이는 나이에 비해 높은 실력을 가진 것도, 가진 실력에 비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보인 것도 전부 맞아떨어진다.
‘그럼 누구지?’
지크는 회귀 전에 그 은발의 여성과 비슷한 능력과 생김새를 가진 인간이 있는지 떠올렸다.
‘일단 생김새로 떠오르는 사람은 없어.’
비인간적을 넘어 비상식적이라고까지 생각되는 그 미모를 생각하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말이 안 된다.
‘능력적으로는 ‘마도의 마왕’과 비슷한 것 같긴 한데….’
‘마도의 마왕’. 마인 시대 후반에 지크와 같이 공포의 존재로서 군림한 마왕 중 한 명이다.
마도의 마왕이라는 칭호답게 온갖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존재로 지크와도 몇 번을 부딪쳤었다.
‘하지만 아니야. 그 녀석은 남자였어.’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쭈글쭈글한 영감탱이. 그게 ‘마도의 마왕’의 모습이었다.
지크가 본 은발의 여성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뚜렷하게 생각이 나는 녀석이 없네. 결국 내가 만나지 못한 인간이라는 건데.’
모든 마인을 아는 것도 아니고 마인이 아닐 수도 있으니 지크가 모른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일단 이 여자에 대해서도 미뤄 놓을까.’
정보가 너무 없다. 다만 마인을 만들고 다니는 암살자 집단보다도 더 우선순위에 둬야겠다고 지크는 생각했다.
‘그 여자도 회귀를 했다면 ‘운명을 비트는 열쇠’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자신에게 ‘운명을 비트는 열쇠’를 이식한 자가 그 여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기억과 인식을 뒤틀어버린 것도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억측의 영역이다.
‘좋아. 여기까지.’
지크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회귀한 이유나 방법에 대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생각을 끝으로 지크는 일단 은발의 여성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하지만 모든 고민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럼 나 말고 회귀자가 있을 수도 있단 거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지크 자신이 죽을 때 곁에 있었던 용사 파티.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루벨라는 아니야.’
루벨라가 회귀 전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면 밸리드와의 싸움에서 그렇게 한심한 모습을 보였을 리 없다. 오히려 그녀가 직접 나서 밸리드의 숨통을 끊어놨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의 루벨라는 아니지.’
지크도 막 태어났을 때로 회귀한 게 아니다. 루벨라도 시간이 지난 후 미래의 의식이 깨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 은발 여자가 회귀를 한 것이 맞다면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회귀도 있을 수도 있고.’
지크는 자신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결국 이것도 확실한 건 없군.’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늘어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갖고 있는 정보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뭐, 됐어. 인연이 있다면 알게 되겠지. 끝까지 모른다면 어쩔 수 없고.’
중요한 건 지크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뿐.
‘다른 회귀자들이 있다고 해도 별 상관없잖아? 그놈들은 놈들의 삶을 살아가면 되고 나는 내 삶을 살아가면 되니까.’
그놈들이 존재한다면 회귀의 호기심을 풀어볼 생각은 있다.
지크가 회귀자들에게 품은 생각은 그게 다였다. 단, 그놈들이 만약 지크 자신을 방해한다면….
‘뭐 있나. 들이받는 거지.’
회귀자든 아니든, 지크의 대응은 어디까지나 공평할 것이다.
* * *
지크 일행은 이동하면서도 간간이 마을에 들를 때마다 착한 일을 실행했다.
고아들을 돌보는 신전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배를 곯는 사람들에게 사냥감을 나눠주기도 했으며 노동력이 필요한 일에 힘을 빌려주기도 했다. 위험한 동물이나 몬스터를 솎아내주는 건 예사였다.
그리고 그들의 착한 일은 한 마을에 도착해서도 계속됐다.
폴른이라고 불리는 마을은 농사일을 하며 먹고사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마을의 규모는 중간 정도. 넓게 펼쳐진 평원이 펼쳐져 있고 토양도 비옥해 상당히 여유가 있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도 걱정거리는 있었다. 그중 하나는 마을 근처에 있는 산에서 내려오는 맹수들과 간간이 나오는 몬스터들이었다.
콰직!
땅에서 솟은 뾰족한 돌기둥이 늑대를 꼬치처럼 꿴다.
켕!
늑대가 비명을 질렀다. 네 발을 허우적대지만 돌기둥에 꿰여 들어 올려진 터라 땅이 발에 닿지 않는다.
피거품을 물며 발광하다 늑대는 절명했다.
나머지 늑대 무리가 놀라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지크 일행은 녀석들을 놓치지 않았다.
퍽!
한스가 마력을 실은 돌을 던지자 늑대 한 마리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한스는 바로 또 하나의 돌을 던졌다.
콰직!
이번엔 빗나갔다. 애꿎은 나무가 돌에 맞아 꺾여 쓰러졌다.
한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돌을 던졌다.
퍼억!
이번엔 명중. 엉덩이 아래쪽을 돌에 맞은 늑대가 바닥에 뒹굴었다.
골반 아래가 터져 두 뒷다리가 아예 몸통에서 떨어졌다. 내장이 질질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미 지크의 고된 훈련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저 정도로 마음에 상처를 입진 않는다.
말 그대로 사람 죽이는 연습까지 마친 것이다.
퍼억!
다른 돌덩이가 늑대를 찢어발겼다. 그 옆으로 솟아난 돌기둥이 다른 늑대를 꿰어버렸다.
그렇게 늑대 무리는 순식간에 전멸했다.
“끝났네.”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 앉아 하품을 하며 앉아 있던 지크가 일어섰다.
“네! 놓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좋아. 이동하자.”
죽어 나자빠진 늑대들을 마법 상자에 집어 넣고 지크는 더 깊은 수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한스와 스녹이 따랐다.
“흐음.”
앉아 있을 때와는 다르게 지크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 숲을 살폈다. 나무의 흠집은 물론 땅의 상태도 놓치지 않았다.
한스와 스녹도 지크를 따라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타고난 재능과 지크의 지도, 그리고 경험의 농후함 때문에 실력은 몰라보게 올라갔지만 무력 외에는 아직 아마추어 태가 나는 둘이었다.
앞서 걷던 지크가 멈춰 섰다. 그의 눈이 땅바닥에 못 박혔다.
“…정말이었군.”
한스와 스녹이 지크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물기를 머금어 진창처럼 변해버린 흙에 어떤 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리저리 뭉개져 있긴 하지만 발자국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단, 사람의 것이라기엔 너무 컸다.
“봐, 노웸. 정말로 오크가 있었던 모양이야.”
스녹이 노웸을 앞으로 내밀어 그 발자국을 보여줬다.
그들이 산속을 헤매는 이유는 오크를 찾기 위해서였다.
마을에 사는 사람 중 한 명이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갔다 오크를 목격했다는 말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맹수보다 더 위험한 것이 몬스터다.
사람들은 벌벌 떨었고 영주에게 도움을 청할까 아니면 용병이나 모험가를 고용할까 회의를 하다가 당시 마을에 머무르고 있는 지크 일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리가 통째로 옮겨 온 걸까요?”
한스가 물었다.
“글쎄다. 떠돌이인지 아니면 무리가 옮겨온 건지는 찾아봐야지. 지금은 고작해야 녀석들의 존재를 확정한 것뿐이니까.”
지크는 발자국이 향한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일단 주변에서 발자국을 더 찾아봐야겠어. 놈인지 놈들인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이 흔적 하나로 추적을 할 수 있습니까?”
한스가 놀라 물었다.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난 추적에 관해서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그럼 어떻게 찾을 생각이십니까?”
지크는 씨익 웃으며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켰다.
“걷고, 보고, 듣고, 느낀다.”
한스와 스녹이 암담해했다.
아이의 막무가내 땡깡도 이것보단 계획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스와 스녹도 뚜렷하게 계획이 없는 상황.
지금껏 겪은 지크라면 자신들의 의견이 있다면 들어주고 그게 옳다면 그들의 방식을 채용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도 뚜렷한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지크라고 정말로 그냥 헤매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추적술에 젬병이라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문적인 사람과 비교할 때나 그런 것. 그리고 마왕이라고 불린 지크에게 있어 전문적인 사람이란 그 분야에 있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말한다.
즉, 추적술의 달인들과 비교할 때 젬병이라고 하는 것이지 지크도 기본적으로 흔적을 따라 추적을 할 기술은 갖고 있었다.
게다가 지크는 기척 감지 범위가 넓고 그들의 일행은 산속에서 걸음이 빠르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산을 헤맬거라 생각한 한스, 스녹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들이 오크의 취락을 찾은 건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리고 지크가 나설 것도 없이 한스, 스녹의 활약만으로 오크의 취락은 몰살당했다.
* * *
마을의 유일한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무언가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늘어선 사람들의 표정엔 여러 감정이 재미있게 얽혀 있었다.
대다수의 감정은 호기심이었지만 공포와 혐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적잖게 섞여 있었다.
그들이 보는 건 몇 구의 오크 시체였다. 고블린 같은 소형 몬스터는 몰라도 오크 이상의 몬스터부터는 사람들이 구경하기 힘들다. 그 몬스터를 보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오크들의 시체 옆에는 지크 일행과 이 마을의 촌장이 서 있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들이 저 산에 취락을 만들고 있었단 말이지?”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노인이 오크를 툭툭 건드려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놈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위험할 뻔했습니다. 근처에 인간 마을이 있는 걸 안다면 놈들은 절대 참지 않으니까요.”
“이놈들이 전부인가?”
“증거로서 보여드리는 녀석들일 뿐입니다. 숫자는 더 많았어요. 다만 걱정은 마십쇼. 한 마리도 놓치지 않았으니까요.”
지크의 대답에 촌장은 안도한 눈치였다. 사람보다 훨씬 큰 덩치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오크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다.
이런 녀석들이 떼로 마을을 습격했다면 얼마나 많은 피해가 나올지 몰랐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촌장은 다른 걱정거리가 떠올랐다.
“저…, 그런데…, 수고비라도 좀 챙겨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지크가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지만 그건 고작해야 오크 한 마리 정도가 돌아다니고 있다고 여길 때의 이야기다.
취락 하나를 없애고 증거로 커다란 오크 몇 마리를 끌고 올 정도면 돈을 요구할지도 몰랐다.
거부하려고 해도 저 엄청난 오크를 잡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걸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원래 가까운 주먹이 더 무서운 법이다.
하지만 촌장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돈이 필요 없나?”
“네.”
이런 시골 마을에서 돈을 뜯어내야 할 정도로 지크는 궁하지 않았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마지막 걱정마저 사라지자 촌장은 진심으로 지크에게 고마워했다.
조용한 마을의 난데없는 이벤트가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지크 일행도 숙소로 돌아갔다. 그래도 은인인지라 촌장이 손을 썼는지 숙소에선 상당히 화려한 음식을 일행에게 대접했다.
음식을 먹고 한스와 스녹은 쉬기 위해 방으로 올라갔다. 지크도 자신의 방에서 창을 통해 마을을 내려다보며 쉬고 있었다.
“응?”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 알짱거리는 게 보였다. 지크의 입에 미소가 맺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