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하지만 건강해지셨죠. 이런 격무를 충분히 소화할 정도로 말입니다.”
브로드가 껄껄 웃었다. 자신이 모시던 요하임이 건강해진 모습이 그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웃는 얼굴을 지우고 자못 심각하게 말했다.
“피에 대한 욕구는 어떠십니까.”
“괜찮네. 나도 많이 걱정했는데 욕구랄 것도 없어. 그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군것질을 하고 싶은 정도의 욕구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정도더군. 정말로 남의 피를 조종하지만 않으면 되는 모양이야.”
요하임이 검지를 깨물어 상처를 냈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손가락을 타고 슬금슬금 흘러 내렸다.
그러나 핏줄기가 별안간 방향을 틀더니 허공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그러더니 사방으로 퍼져 핏방울이 되어 이리저리 움직였다.
“언제 봐도 신기한 능력이군요.”
“조종하는 나도 그렇다네.”
그것이야말로 ‘블러디 베슬’의 능력인 ‘피의 지배’였다.
“많이 능숙해지신 것 같습니다.”
“나도 내 몸 하나 지킬 능력 정도는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 피를 조종하는 건 부작용이 없다 하니 틈틈이 연습하고 있었지.”
“비장의 한 수를 가지고 있는 건 나쁘지 않죠. 아니, 오히려 좋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피의 욕구에 먹힐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를 처리하러 무서운 지크 님이 오실 거고.”
요하임의 너스레에 심각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브로드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렇죠. 무서운 지크 님이 오시겠죠. 그분은 지금쯤 영지를 벗어나셨을까요.”
“모르지. 자유롭게 지내는 사람이니 더 머물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일찌감치 벗어났을 수도 있고.”
“생각해보면 정체는 끝까지 밝히지 못했습니다.”
“굳이 알 것 있나. 우리 영지를 구원해준 은인. 드라큘 영지에서 그분의 신분은 그거 하나면 족하네.”
“그도 그렇군요.”
“그나저나….”
지크의 얘기를 하며 훈훈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요하임이 신중한 얼굴을 했다.
“그놈들의 정체는 파악했나?”
“아쉽게도….”
브로드가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요하임은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살롬이 안에서 협력하고 있었다 해도 백작가의 그 누구도 눈치 못 채게 움직인 놈들이야. 이렇게 빨리 파악됐다면 오히려 함정이 아닐까 의심해야겠지.”
드라큘 백작가는 사태를 수습하는 이 와중에도 한 가닥 여력을 남겨 암살자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제대로 된 추적은 어려웠다.
“일단 영지의 회복이 먼저네.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초조해할 필요는 없어. 그 은발의 여성도 마찬가지고.”
마지막에 나타나 바곳 부인을 죽이고 홀연하게 사라진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인. 그녀도 백작가가 흔적을 쫓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백작가에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진 않고 오히려 시내로 도망치던 바곳 부인을 처리해준, 은인이라면 은인인 여자였지만 그녀가 수상하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보고할 사항은?”
“없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게.”
요하임은 다시 산처럼 쌓인 서류와 결투를 벌여야 했다. 브로드가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요하임은 서류산의 맨 꼭대기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의 성격상 아무리 업무가 과중하다고 해도 대충 넘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류의 첫 줄부터 읽어내리기 시작한다. 그의 눈동자가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나 다섯 줄 정도를 읽었을까. 요하임이 서류를 내려놨다.
옆을 본다. 창틀 사이로 얼굴을 내민 둥근 달이 보였다.
‘보름달에 괴물로 변하는 그런 건 없는 모양이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고는 다시 달을 쳐다봤다.
예전에 달을 올려다봤을 때와는 처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약한 몸을 이끌고 가문에서 나와 떠돌아다닐 막연한 미래만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건강한 몸을 가지고 헤쳐나가야 할 위기는 많지만 엄연한 귀족가의 주인이 됐다.
‘지크 님 덕이 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비욤 혹은 살롬의 손에 죽었거나 암살자의 꾐에 넘어가 괴물로 변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으면 갚아야겠지.’
그게 언제가 되든, 은혜를 저버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 혼자만의 맹세를 하고, 요하임은 달에서 눈을 떼고는 다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지크도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환하게 피워진 모닥불의 빛이 필사적으로 덤볐지만 달빛의 은은함은 그 세력을 잃지 않았다.
드라큘 영지에서 벗어난 지도 이미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길 따위는 버려둔 채 오로지 산속으로만 주파하는 정신 나간 일정.
하지만 지크는 별 고생한 기색 없이 달을 감상하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그건 지크의 경우일 뿐이었다.
“으….”
“으아….”
모닥불 옆에 널브러져 있는, 간간이 흘리는 신음소리로만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있는 한스와 스녹.
쿠우….
스녹의 등에 있는 노웸마저 축 처져 있다. 누가 보면 일어나기 전의 좀비인 줄 착각할 만한 모양새였다.
지크는 혀를 찼다.
“역시 오스프린에서 너무 놀게 내버려뒀었나? 다음에는 쉴 때라도 기초 체력 정도는 시켜야….”
“괘, 괜찮습니다!”
한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스녹도 노웸을 껴안고는 앉아서 허리를 뻣뻣하게 세웠다.
지금까지 땅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녀석들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반응속도다.
지크가 피식 웃었다.
“누워 있어. 농담 한번 해본 거니까.”
한스와 스녹이 슬슬 눈치를 본다. 하지만 히죽이는 지크의 입꼬리를 보면 농담이란 소리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그렇게 살 떨리는 농담을 하냐는 불만을 속으로 억누르고 둘은 다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주 얼굴에 불만이 팍팍 드러나는데?”
“그, 그럴 리가요!”
“네, 네! 저희는 아무 불만 없습니다!”
파리한 안색으로 둘은 부인했다. 지크가 낄낄거렸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잖아. 이번에 전투를 해보고 깨달았을 텐데.”
지크의 말대로 둘은 정말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한스는 지크의 옆에서 활약을 펼쳤고, 암살자 대장을 상대한 스녹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아직은 부족하지만.”
지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적어도 저번에 본 암살자 대장 놈들을 상대할 실력 정도는 갖춰야지.”
“저, 전 그 사람 이겼는데요.”
쿠!
스녹이 소심하게 자기주장을 해봤다. 노웸도 스녹의 말을 거들었다.
실제로 이번에 암살자 대장을 혼자 멋지게 퇴치한 경력이 있다 보니 자신감이 조금 생긴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다음에 그놈과 비슷한 놈을 만나면 너한테 양보해 주마. 대신 그때는 땅속이라는 유리한 환경은 없을 거다.”
“…….”
스녹이 입을 다물었다.
“지하실을 통째로 주저앉힌 다음 싸우면서도 겨우겨우 이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말은 지상에서 맞닥뜨렸을 때도 꺾을 수 있을 때에나 쓰는 거다.”
스녹은 자신의 모포에 고개를 처박았다. 스녹을 따라 노웸도 스녹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지크의 화살은 스녹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한스, 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스녹에게 노웸이라는 반칙 같은 존재가 붙어 있다고 해도 나한테 배운 기간은 스녹보다 길잖냐. 후배한테 벌써 따라잡힐 생각이냐?”
자존심을 살살 긁어 경쟁심을 끌어낸다.
한스도 후배랍시고 챙겨준 녀석이 자신보다 먼저 치고 올라간다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을 터.
그러나 지금 한스는 그것보다도 더 궁금한 점이 있었다.
“지크 님.”
“왜? 묻고 싶은 거라도 있어?”
“예전에 하신 말씀 말입니다. 오스프린보다는 바곳 부인의 처리를 우선하겠다는 말씀이요.”
“그게 궁금했냐?”
지크는 한쪽 무릎을 굽혀 팔을 올렸다. 타닥타닥 튀기는 모닥불의 불똥이 어둠을 살짝 쫓아냈다가 사라졌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냐?”
“…….”
한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크는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내 말이 맞다고 생각은 하지만 감정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상태지? 이해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미래의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고 해도 눈앞의 희생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지. 하지만 말이다, 한스.”
평소와 다르게 지크는 조롱 하나 없이 담담히 말했다.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눈앞에 선택지가 존재한다면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 특히 영웅이 되고 싶다면 더더욱.”
“여, 영웅이라면 어떤 희생도 없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철없다. 세상물정을 모른다.
답답할 만도 하건만 지크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네가 되고 싶은 건 영웅이냐? 아니면 신이냐?”
그 대단한 ‘힘의 마왕 지크 모어’조차 원하는 대로 이루는 삶을 살진 못했다. 그리고 그건 지크를 쓰러뜨린 ‘태양의 용사 그렌 제너드’도 마찬가지일 터.
“초천재인 나조차도 내가 원한 모든 걸 이루진 못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건 어떤 대단한 작자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어.”
“…….”
“뭐, 바로 받아들일 순 없겠지.”
한스의 침묵을 지크는 이해했다.
“천천히 생각해 봐라. 하지만 우물쭈물대며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지는 말도록.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것보다도 결정조차 내리지 못하는 게 더 최악이니까.”
“…지크 님은 정말로 제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지크는 한스의 꿈을 갖고 간간이 놀릴지언정 정말로 영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처음엔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지크의 태도는 가벼울지언정 진심이 담겨 있었다.
“몰라.”
조금은 생겨난 한스의 기대감을 지크는 시큰둥하게 즈려밟았다.
그러나 지크가 이렇게 현실적으로 영웅이 될 가능성에 대해 말한 것도 처음인지라 한스는 귀를 기울였다.
스녹도 어느샌가 고개를 들고 둘의 대화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되고 싶다며? 하고 싶으며 해야지. 삶의 방식을 정하는 건 자신이야. 다른 인간들의 눈치 따위 볼 필요 없어. 영웅? 해. 네가 내 종인 이상,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와주마.”
“…그럼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뭔데?”
혹시 그렇게 말해줬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냐며 불벼락이 떨어질 각오를 하고 한스는 입을 열었다.
“지크 님이 말하신 결단에 대해서 말입니다.”
“응.”
한스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지크는 별 반응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조금이라도…, 그저 조금이라도 사람들을 더 구할 방법은 없을까요?”
“있지.”
한스와 스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단한 이야기야. 왜 널 보고 신이 되고 싶었냐고 물었을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신의 능력이라면 간단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역시 어떤 위기를 타파하려 할 때 필요한 건 능력이다. 네 능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네가 구할 수 있는 인간도, 해결할 수 있는 사건도 많아져.”
“그러니까 지크 님의 말씀은….”
“내가 하는 훈련 잘 받으라고.”
툭!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살펴보니 얘기를 듣고 있던 스녹이 다시 모포에 얼굴을 처박은 것이었다. 그의 등에 노웸이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웃겼다.
한스도 지크의 그 고문 일보 직전의 훈련을 떠올리고 안색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러나 한스도 스녹도 앞으로 있을 고된 훈련에 절망하면서도 지크가 한 말을 가슴 한편에 고이 보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