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커다란 신전 첨탑 위에 달린 종이 울렸다. 세상을 떠난 자에게 마지막으로 보내는 인사말이다.
그 소리를 들은 영혼은 이승에서의 모든 은과 원, 미련을 떨치고 신의 나라로 가, 신에게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아버지와 형님은 천국에 가진 못하시겠죠.”
서서히 멎어가는 종을 바라보며 요하임이 말했다.
근처에 있던 가신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원래라면 부정을 해야 맞다. 영지의 주인과 그 아들이 대상이 아닌가.
하지만 영지의 비사를 모두 안 지금, 그들도 드라큘 백작을 옹호할 순 없었다. 비욤 드라큘이야 워낙에 성격이 개차반이었으니 옹호할 건덕지도 없었고.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 브로드가 입을 열었다.
“…속죄하실 겁니다. 그럴 각오는 하셨을 거고요.”
“속죄라…. 하셔야죠. 그 어떤 고통과 고난이 뒤따르더라도요. 하지만 먼저 희생자들에게 사과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실 겁니다. 꼭.”
드라큘 백작과 비욤 드라큘은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 지금은 그들의 장례식.
백작과 그 후계자의 합동 장례식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규모가 작다 못해 초라할 지경이었지만 영지의 상황과 백작의 치부 때문에 커다란 장례식을 치를 수 없었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크 님.”
참석한 적은 수의 문상객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던 요하임이 지크의 차례에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규모가 작은 터라 정말로 필요최저한의 인원만 부른 이 장례식에 지크가 참석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요하임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참석해야죠.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두 분에게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요하임은 지크의 옆에 서 있던 한스와 스녹에게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아, 아니요! 괘, 괜찮습니다!”
“아, 그, 며, 명복을 비, 빕니다!”
각각 귀족가의 종, 광산의 광부였던 그들에게 이런 귀족가의 장례식에 참석해 후계자에게 인사를 받는 상황은 무섭기까지 한 상황이다. 서로 당황해 허둥지둥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귀족의 눈으로 보면 어색하다 못 해 무례하기까지 보이는 행동.
하지만 요하임은 물론이고 문제를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지크의 한심하다는 눈빛이 쏟아질 뿐이었다.
“세 분은 이제 떠나신다고요.”
“드라큘 영지에는 여행 중에 잠깐 들렀을 뿐입니다. 예기치 않은 사건에 조금 오래 머물렀을 뿐, 슬슬 움직여야죠.”
“정말로 우리 백작가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대우는 최고를 보장하겠습니다.”
요하임은 영지를 재정비하면서도 꾸준히 지크를 스카우트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가 보여준 빠른 상황판단과 수많은 지식, 강력한 무력, 그리고 영지를 위해 세운 수많은 공은 그를 영입 대상 1순위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젊기까지 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크는 단호했다.
“전 한 곳에 메이는 걸 싫어해서 말입니다.”
언제나와 똑같은 답이 들려왔다. 이미 요하임도 반쯤 포기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많이 실망하지는 않았다.
“제가 없더라도 드라큘 영지는 별 문제 없을 겁니다. 브로드 경 같은, 공자님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아, 이젠 공자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군요. 곧 새로운 드라큘 백작님이 되실 테니까요.”
“아직 그 칭호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왕가에서 인정받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 겁니다.”
“백작님의 그것을 공표할 생각입니까?”
그것. 두루뭉술한 지칭어였지만 여기서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 가신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요하임에게서는 그 어떤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아무리 영지를 위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아버지가 한 일은 너무 했습니다. 이제라도 고쳐 봐야죠. 속죄를 하고 보상을 하고 당시 그 일을 계획하고 찬성한 가신들을 축출해서 말이죠.”
“힘든 일이 될 겁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영지를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저지른 그 잘못은 결국 페스트란 존재의 탄생까지 이어져 오히려 영지를 망쳐버렸으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말이죠.”
“페스트는 원래부터가 본성이 썩어빠진 미치광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바곳 상회에 전염병을 퍼뜨리기 전까지는 그저 상회의 평범한 안주인에 불과했습니다. 또 모를 일이죠. 전염병이 그녀의 가족을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생애 끝까지 자신의 본성을 모르고 좋은 부인, 엄마로 남았을지도요.”
“페스트의 죄까지 떠맡을 생각이군요.”
“그게 내가 드라큘 백작가를 잇는 가장 큰 이유니까요.”
가시밭길이 될 게 뻔한 길이다. 하지만 요하임은 기꺼이 그 길을 가기로 자청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크 님처럼 가문을 나와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난데없이 가문을 잇게 되다니. 세상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온 드라큘가 가신들의 절대 지지를 받으면서 말이다. 백작가의 짐덩이로서 취급받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
“그러면 혈액 공포증이 많이 방해가 되겠군요.”
“…열심히 극복해 봐야죠.”
하지만 요하임의 안색은 벌써부터 핼쑥해 보였다.
“다행히 저번 전투 때 많은 피를 봤어도 어찌어찌 견딜 만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자마자 쓰러졌다고 들었습니다.”
요하임이 멋쩍어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일이었다. 요하임이라는 인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개차반 성격을 갖고 있는 비욤의 자리가 흔들리지 않았던 건 비욤이 적통이라는 이유와 더불어 요하임의 좋지 않은 건강과 혈액공포증이라는 단점 때문이지 않았던가.
“이걸 한번 사용해보시겠습니까?”
지크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요하임의 눈이 동그래졌다. 본 적 있는 물건이다. 그건 암살자 대장이 요하임을 유혹하며 꺼내놓았던 붉은 구슬이었다.
“블러디 베슬.”
“땅 속에서 우연히 찾았죠.”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지크의 모습이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
그의 종인 한스와 스녹, 특히 스녹이 뭔가 굉장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정체나 기원, 제작자 같은 걸 물으신다면 모릅니다.”
“그럼….”
“하지만 능력과 부작용은 알죠.”
회귀 전 요하임에게 들었으니 정확하다.
“…정말로 지크 님은 묘한 것들을 많이 알고 계시군요.”
“그것들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어 정말로 기분이 좋습니다.”
정보의 출처는 알려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요하임은 깊게 캐묻지 않았다.
“능력은 뭡니까?”
“당신의 육체를 건강하게 해주고 혈액공포증을 낫게 하며 무엇보다 ‘피의 권능’이란 걸 얻게 될 겁니다.”
“피의 권능이라. 좋게 들리는 표현은 아니군요.”
“말 그대로 주변의 혈액을 마음대로 움직일 있는 능력이죠. 아주 강력한 힘입니다.”
그 능력 하나로 ‘힘의 마왕 지크 모어’의 측근으로 올라갔으니 그 강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피를 다룬다는 말에 요하임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피의 권능이란 건 그렇다 치고 다른 두 개는 확실히 매력적으로 들리는군요. 그러면 부작용은 무엇입니까?”
“피에 미치게 됩니다.”
“…….”
요하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주변의 사람들도 지크를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별로 긍정적인 의미는 아닌 것 같지만 무척 추상적인 설명이군요. 조금 더 풀어서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쉽게 비교를 하자면 뱀파이어처럼 변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피를 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하는 괴물이 되는 거죠.”
솔직히 지크는 요하임의 그 쓸데없는 혈액 성애가 그가 타고난 취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만난 과거의 요하임은 분명 멀쩡한 상식을 갖고 있는 인간이었다. 아니,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피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렇다면 회귀 전 요하임이 말한, 지크는 헛소리라고 단정지었던, 블러디 베슬을 흡수하고 나서 그의 혈액 성애가 시작됐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뭔가 방법이 있겠죠?”
요하임이 물었다. 지크를 신뢰하기에 여전히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였지만 만약 지크가 아무런 생각없이 ‘블러디 베슬’을 권한 거라면 화를 낼 게 분명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 녀석을 흡수한 초기에는 피를 갈구하는 욕구는 크지 않습니다. 아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욕구가 커지는 거군요.”
“자신의 피를 다루는 정도라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피는 많이 흘리면 죽죠. 때문에 피의 지배는 다른 이의 피를 다뤄야 그 효용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남의 피를 다루면 다룰수록 피를 갈구하는 욕망에 휩싸일 겁니다.”
“어느 정도까지 심해집니까?”
지크는 회귀 전의 요하임을 떠올렸다.
“아마도 사람들을 잔뜩 죽여 뽑아낸 피로 목욕을 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군요.”
주변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공포스러운 시선으로 지크가 들고 있는 ‘블러디 베슬’을 쳐다봤다. 몇몇은 마른침을 삼켰다.
요하임은 고민에 빠졌다. 리스크와 리턴을 머릿속의 저울에 걸고 눈금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생각했다.
“…만약 제가 피를 갈구하게 된다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테죠.”
“혹시 자신이 욕망에 물들어 세상에 피해를 끼치는 게 걱정이십니까?”
“걱정이 안 될 수야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 마시죠. 저는 이래 봬도 제가 권한 일의 뒤처리를 나몰라라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무슨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요하임이 기대를 담아 물었다.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한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크의 답변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닐 거라는 걸.
“공자님이 타락한다면 제가 직접 죽여드리러 오겠습니다.”
엄청나게 과격한 말이다. 지크의 곁에 서 있던 한스와 스녹이 경악해 지크를 쳐다본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장본인은 옅게 웃었다.
“후후후! 그렇군요. 당신이라는 확실한 대비책이 있었군요.”
놀랍게도 요하임은 별 기분나빠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블러디 베슬’에 머물렀다.
“좋습니다. 지크 님의 호의를 받아보죠.”
그렇게 요하임은 회귀 전의 그처럼 ‘블러디 베슬’을 흡수하게 됐다.
하지만 그가 회귀 전처럼 자신의 권능을 마구 휘두르며 세계에 해를 끼칠 미래가 될 가능성은 무척 적을 것이다.
그를 ‘뱀파이어’로 이르게 했던 과거의 길이 지크에 의해 뒤틀렸으니까 말이다.
* * *
얼마 후, 요하임은 정식으로 드라큘 영지를 이어받을 것임을 선포했다.
거기까지는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뒤이어 한 발표와 그에 따른 행동은 영지는 물론 왕국 전체를 들썩였다.
전대 백작인 그의 아버지가 한 일을 요하임이 모두 밝힌 것이다.
당연히 온갖 비난과 비판이 쏟아졌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그러나 드라큘 백작가는 허둥대는 일 없이 덤덤히 그러나 확실하게 해야 할 일을 해나갔다.
“후우!”
드라큘 백작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요하임이 한숨을 내쉬었다.
들고 있던 서류를 놓고 잠시 천장을 쳐다봤다.
그의 옆에는 서명된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훨씬 더 많은 미처리된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똑! 똑!
“들어오게.”
아직 말을 놓는 것에 익숙지 않아 작게 투덜거리며 요하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문을 열고 서류를 한아름 더 들고 들어온 브로드를 보고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침대에 누워 눈 한 번 깜빡이면 다음날 오후에 깨어날 자신이 있네.”
“그래도 영주님이 정하신 일이 아닙니까.”
“새삼 되새겨줄 필요는 없어. 그걸 아니까 군말 없이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후후!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거 정말 효과가 있었군요.”
요하임은 머리에 손을 올려다봤다.
적잖은 피로가 느껴졌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지금, 그런 피로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이미 침대에 쓰러져 있었겠지.”
“건강해진 주군의 모습에 전 무척이나 기쁩니다.”
“계속해서 일을 시킬 수 있는 게 기쁜 건 아니고?”
“부정 못 하는 이 불충한 가신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브로드는 들고 온 서류를 미처리 서류더미 위로 올렸다.
서류산의 해발이 더 높아지자 요하임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병약할 때가 그리워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