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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85화 (85/628)

제85화

“으윽!”

‘고통에도 별 내성이 없어 보이고.’

지크처럼 신관조차 기겁하는 반시체 상태에서 결투를 하는 정신 나간 짓까지 하길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저 정도 전투 센스를 가질 정도로 경험을 가진 자라기엔 너무 고통에 익숙지 않아 보였다.

지금도 검의 파편에 꿰뚫리며 생긴 상처 때문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움직임에 장애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입을 털어볼까?’

솔직히 이미 죽어 나자빠진 바곳 부인보다 그녀가 훨씬 더 지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입을 털기엔 지금 상황은 꽤 본격적으로 위험했다.

‘검만 있었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검을 부수는 공격 덕에 은발 여자에게 꽤 깊은 상처들을 입힐 수 있어 싸움을 대등하게 끌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크의 전투력도 확실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질 생각은 없었다.

“지크 님!”

갑자기 대량의 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 지크를 크게 불렀다.

‘브로드 경이군.’

요하임은 안전한 곳에 뒀는지 브로드가 일단의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거기엔 한스도 끼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지크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그가 외쳤다. 지크는 손을 내저어 괜찮음을 알렸다.

지크의 부상이 심각한 편이 아닌 걸 알고 안도한 것도 잠시. 브로드는 상황 판단에 들어갔다.

상황이 그가 예상하던 것과는 무척이나 달랐던 것이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글쎄요. 무슨 상황일까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황인지 지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일단 여러분의 상황을 먼저 들어도 되겠습니까, 브로드 경.”

“아, 일단 공자님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공자님은 오스프린에 병이 퍼지지 않도록 시민들을 집 안으로 들여보낼 테니 바곳 부인과 싸울 때 최대한 요란하게 싸워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주변 시민들을 먼저 대피시킬 수 있다고요.”

“합리적이군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여자가 바곳 부인을 죽였거든요.”

“바곳 부인을 죽여요?”

지크가 바곳 부인의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체만 덩그러니 남은 괴물의 시체가 조금 떨어진 곳에 쓰레기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바곳 부인의 시체를 본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저 여자가 바곳 부인을 저 꼴로 만들었단 말씀입니까?”

“네. 단 한 방이었죠.”

“그 바곳 부인을 단 한 방에?”

“기습의 이점이 분명 있었습니다만, 그걸 감안해도 놀랍죠. 저 여자는 강력한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라니….”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 정보다. 브로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은발의 여성을 바라봤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일순 넋을 잃을 정도의 여자다. 하지만 ‘바곳 부인을 한 방에 죽여버린 마법사’라는 타이틀은 그녀의 미모를 뇌리에서 가차없이 쫓아냈다.

“상황은 모르지만 저 여자가 적이라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당연….”

지크가 말끝을 흐렸다. 브로드는 물론이고 기사들과 은발의 여성의 시선이 지크에게 쏠렸다.

“…생각을 해보니 제가 먼저 공격을 했군요.”

“네?”

브로드의 어처구니없어하는 시선이 아프다. 은발의 여성조차 동그래진 눈으로 지크를 쳐다본다. 천하의 지크도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워낙에 충격적인 말을 들어서….’

설마 ‘지크 모어’란 존재를 알고 있는 자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저도 모르게 옛날 성격이 나와 버렸다.

하지만 잘 생각을 해보면 저 은발의 여성과 적대를 할 이유는 아직 없었다.

‘바곳 부인을 처리해주기도 했고, 나를 ‘지크 모어’라고 불렀을 뿐이지 적대적으로 나왔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

오히려 선빵을 때린 건 그였다.

지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봐! 확실히 이번 일은 내 실수다! 사과하마!”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서로 오해했으니 화해하고 끝내자!’같이 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수상한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보상을 하라면 하겠지만 일단 네 신분부터 밝혀! 영주성에 무단으로 들어온 너도 충분히 수상한 인간이니까.”

그것도 영주성 내에서 엄청난 음모와 전투가 펼쳐진 판국에 말이다.

그 말을 듣고 기사들이 다시 은발의 여성을 경계했다.

“…….”

“뭐야, 말하지 않을 거냐? 일단 말하지만 내가 사과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사정을 듣지도 않고 공격한 걸’ 말하는 것뿐이다. 보는 대로 난 드라큘 영지의 협력자거든. 네가 계속 정체를 밝힐 수 없다면 나도 다시 무력행사를 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때 넌 확실하게 ‘드라큘 영지의 범죄자’가 되는 거다.”

기사들이 슬금슬금 포위망을 만드는 것이 지크의 말에 신빙성을 더했다.

은발의 여성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나온 건 지크가 원한 대답이 아니었다.

“…저들은 당신의 부하야?”

“지금까지 대체 뭘 들은 거야. 난 협력자라니까. 그리고 일단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원래라면 영주성에 침입한 넌 무조건 체포부터 해야 하는 법이지만, 지금 시기가 미묘하고 무엇보다 네가 저 녀석을 죽여줘서 시내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온건하게 나가고 있는 거란 걸 명심하고.”

‘선빵을 때리긴 했지만.’

그러나 지크로서는 정말로 온화하게 행동하고 있는 게 맞았다.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도 상대가 다른 말을 한다면 그 때는 정말로 실력행사를 할 셈이었다.

하지만 지크의 말에 무언가 놀랄 만한 일이라도 있던 것일까. 은발 여자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시내의 피해를 신경 쓰고 있어? 당신이?”

‘이 자식, 정말로 회귀 전 나를 아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렇게 놀라는 것도 납득이 갔다. 더더욱 그녀에게서 말을 들어야 한다.

지크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브로드가 끼어들었다.

“이 년! 말투가 그게 뭐냐!”

목에 핏대까지 선 것이 브로드는 무척이나 화가 난 것 같았다.

“지크 님은 지금껏 영지를 위해 온갖 선행을 베푸셨다! 음모를 파헤치셨고 많은 사람들을 구하셨지! 거기에 자신의 이득은 돌아보지도 않으셨다!”

비록 오스프린보다 바곳 부인의 처리를 우선하는 매정함을 보이긴 했지만, 지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결단력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분에게 뭐? 시내의 피해를 신경 쓰고 있냐고? 영주성에 침입한 수상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 따위가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브로드의 분노 어린 외침이 은발의 여성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브로드의 분노에 놀란 건 오히려 지크였다.

‘쟤 왜 저래?’

뭘 잘못 먹은 걸까. 그도 아니면 바곳 부인이 뿌린 특이한 병에 걸린 것일까.

지금껏 착한 일이랍시고 한 일에 루벨라, 와이그나 샘에게 감사를 받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대대적인 ‘칭송’을 듣기는 또 처음이다.

하지만 그저 착한 일을 한답시고 한 행동 덕에 지크는 이미 그의 존재를 아는 드라큘 영지의 사람들에게 거의 ‘성자’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지크가 드라큘 영지에 들어온 초기부터 함께 해 온 브로드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지크를 존경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가 해 온 일들을 대부분 보아온 것이다. 오죽하면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지크에게 ‘님’자를 붙이고 존대를 하고 있을까.

게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브로드 한 사람만이 아닌 듯했다. 은발 여성을 보는 기사들의 눈에 경계와 더불어 분노가 스며들었다.

“…당신 정말로 지크?”

은발의 여성은 혼란해 휩싸인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지크다.”

“…성은?”

“그게 뭐가 중요하지?”

스틸월도 모어도 아니다. 지금의 지크는 그냥 지크일 뿐이다.

“네가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생각하는 건 날 가리키지 않아.”

어디까지나 지금의 지크는 변경백의 장자도 마왕도 아니니까.

의심하듯 그녀가 지크를 쳐다봤다. 그러다 뭔가를 깨달은 것일까.

“설마!”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껏 지크를 정체불명의 존재를 보듯 관찰하던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섬뜩한 적의가 들어찼다. 어찌나 살벌한지 경계하던 기사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깃든 건 적의만이 아니었다. 그립디 그리운 자를 발견한 것 같은 아련함이 적의와 함께 이지러졌다.

당연히 지크도 그녀의 눈빛을 눈치챘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녀석이네.”

적의야 썩어넘칠 정도로 받아봤지만 거기에 아련함을 섞는 놈은 또 처음이다. 게다가 보통 그리운 자를 보는 눈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도 다른데.”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 자식, 나랑 얘기를 할 생각은 쥐뿔도 없군.’

지크는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지크는 포션을 꺼내 들이 마셨다. 그리고 한 기사에게 검을 빌렸다.

난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 기사는 순순히 지크에게 검을 빌려줬다.

“좋아, 아가씨. 거친 방법은 사용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렇게 비협력적으로 나온다면 나도 더 이상 데이트 권유를 하진 못하겠어.”

“그러니까 당신이 한 그건 절대 데이트 권유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은발 여성이 대꾸했지만 이번엔 지크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검을 겨눴다.

“지금부터는 영주성을 침범한 수상한 침입자로 대하마.”

지크가 적의를 내보인 순간 주변 기사들도 일제히 기세를 뿜어냈다.

은발 여성이 주변을 둘러본다. 지크 한 명만으로도 간신히 호각이었는데 기사들까지 충원된 이상 그녀에게 승기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은발 여성이 다시 지크를 쳐다봤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가 서로의 구상을 안고 서로의 존재를 잰다.

탓!

지크가 움직였다. 검에 깃든 마력이 웅웅 울어댄다. 동시에 기사들도 그녀에게 돌격했다.

짤랑!

작은 금속음이 그녀의 가슴 어림에서 들렸다.

마치 찬란한 별을 구현한 것 같은, 그녀가 걸고 있는 목걸이에서 푸른색의 빛이 뿜어졌다.

‘아티팩트!’

뭔진 모르지만 발동시켜서 좋을 게 없다. 지크가 검을 뻗었다.

공간 찌르기.

퉁!

마력이 섞인 공기가 화살처럼 날아갔다. 은발 여성의 몸에 무형의 찌르기가 작렬하려는 순간.

훅!

은발의 여성이 사라졌다. 찌르기는 허무하게 앞으로 날아가 담벼락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건…!”

브로드가 은발의 여성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발로 땅바닥을 슥슥 긁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공간 이동이군요.”

“이게 말입니까?”

지크의 말에 브로드가 놀랐다.

“공간 이동이라면 굉장히 어려운 마법이잖습니까.”

“맞습니다.”

마법사들 중에서도 정말로 선택받았다고 여겨지는 자들만이 익힐 수 있는 초고등마법.

지크가 확신을 주자 브로드는 더욱 놀랐다.

“그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였다니!”

“그녀가 대단한 마법사인 건 맞지만 주문을 외우지 않은 걸로 봐서는 그녀가 공간이동을 구사한 건 아닙니다.”

만약 영창 생략을 한 것이라면 위력이 떨어져 얼마 멀리 이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지크의 기척 감지 범위에서 완벽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가 사용하지 않았다면….”

“목걸이가 아티팩트였을 겁니다.”

브로드는 은발의 여성의 목걸이가 빛이 났던 걸 떠올렸다.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라뇨! 그런 게 있을 수 있습니까?”

“눈앞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브로드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긴, 저등급의 마법을 다루는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도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드는 판국에 공간이동이라는 초고등 마법을 쓸 수 있는 아티팩트가 존재한다는 건 믿기지 않을 만한 일이긴 하지.’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추격대를 만들겠습니다.”

“힘들 겁니다. 그녀가 이동한 장소는커녕 방향도 모르지 않습니까. 헛된 일이 될 겁니다.”

“하지만…!”

“다른 일이 없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일단 영지의 뒤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끄응!”

브로드가 침음성을 냈다.

하지만 지크의 말이 맞았다.

지금부터 한동안 드라큘 영지는 비상사태를 유지해야 할 테고, 그러면 손 하나가 아쉬울 게 뻔했다.

어디로 사라진지도 모르는 마법사 한 명을 찾기 위해 추격대를 만드는 건, 딱 잘라 낭비였다.

“어쩔 수 없군요.”

브로드는 포기했다.

“옳은 결정입니다.”

브로드를 칭찬한 지크는 주변의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음모를 꾸미던 바곳 부인과 살롬이 전부 죽었으니 이 사태도 끝이군요. 뒤처리를 합시다.”

그렇게 드라큘 영지를 온통 뒤집어 놓은 전염병과 죄책감과 광기가 어우러진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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