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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84화 (84/628)

제84화

상대의 정체를 캐면서도 지크는 힐끔힐끔 방금 전 공격의 흔적을 살폈다.

‘고열로 지졌군.’

빛기둥이 휩쓸고 간 것들은 하나같이 단면이 검게 타 있었다. 사라진 부분은 전부 증발했을 것이다.

그것까지는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그것들이 증발한 시간이다.

‘일순간이었지.’

빛기둥에 휘말리자마자 그것들은 마치 공간 이동을 한 듯 바로 사라졌다.

‘상상 이상의 위력이었다는 소리야.’

지크조차도 최고로 긴장감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는 그런 위력.

‘마법인가?’

마력을 가공해 자연의 일부는 물론 일부 특수 능력까지 재현할 수 있는 능력. 요하임의 피의 지배 같은 권능과는 조금 다른 능력이다.

익히는데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마법을 쓸 때마다 일일이 주문을 외워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 위력과 범용성은 엄청나게 뛰어나다.

‘방금의 빛 기둥 위력을 생각해보면 보통 마법사가 아니야.’

게다가 아무리 지크가 바곳 부인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해도 상대가 공격을 하기까지 그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거리가 지척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모로 보나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단, 지금은 확실하게 기척을 잡고 있었다. 기척은 커다란 나무 뒤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어이, 얼굴 좀 보자고! 걱정 마, 안 잡아먹어. 그냥 네가 누구인지, 여기엔 뭐 하러 왔는지를 물을 뿐이야.”

지크의 말투가 평소의 가벼운 것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가벼운 건 어디까지나 말투뿐. 그는 여전히 정체불명의 존재를 강하게 경계했다.

사박!

나무 뒤에서 나온 발이 잔디를 밟아 소리를 낸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천천히 나무 뒤에서 빠져 나왔다.

‘호오!’

지크는 순간 탄성을 입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아름답다. 나무 뒤에서 나온 존재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찰랑이는 긴 은발. 붉은 색의 눈동자는 섬뜩하다기보다는 보석 같다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 성녀 루벨라보다도 한 끗발 더 미를 짜낸 것 같은 용모는 길에 나간다면 바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송두리째 뺏을 것 같다.

‘인간 같지 않군.’

지크가 딱 잘라 그런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고 수상한 건 수상한 거다. 고작해야 상대가 예쁘다고 해서 경계를 허물 정도로 지크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예쁜 녀석들이 더 위험할 때도 많았지.’

옆에 상반신을 잃은 채 나뒹굴고 있는 바곳 부인이 대표적이었다.

“그래, 예쁜 아가씨. 당신의 정체는 뭐지? 여기는 왜 있고?”

지크가 캐물었다.

이곳은 드라큘 백작의 영주성. 관련없는 자가 들어올 곳이 아니다. 그것도 지금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드라큘 영지의 마법사인가?’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마법사란 존재는 기본적으로 귀하다. 아무리 드라큘가가 백작가라고는 해도 마법사까지 보유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지크?”

“응? 아가씨, 날 알아?”

놀랍게도 여자는 지크를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크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혹시 그저 지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백작가에 있던 시절 만났었는데 만난 지 너무 오래된 터라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닐까. 지크는 그녀를 요모조모 뜯어봤다.

‘…모르는 사람인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더라도 저런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지크…스틸월….”

그녀가 다시 한번 지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스틸월이라 부르는 걸 보니 내가 가문에 있을 때 만난 아가씨신가? 미안하지만 자기소개를 해주지 않겠어? 당신 같은 미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믿기지가 않지만 나는 아가씨를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

“아니면 혹시 먼 발치에서 나를 한 번 보고 잊지 못한, 그런 사랑에 빠진 순정파 아가씬가? 만약 그렇다면 말을 하지 그랬어.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라면 나도 만사를 제치고 만나러 달려갔을 텐데 말이야. 혹시 지금이라도 이름이랑 사는 곳이라든가 말해줄 수 있어? 절대 아가씨가 수상해서라든가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관심이 있어서….”

“…아냐.”

여자가 부정했다.

“응? 뭐가 아니라는 거지?”

“지크 스틸월이…아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가씨. 과거의 나를 아는 거 아니었어? 지금은 성을 버리긴 했지만 지크 스틸월은 분명 내이름….”

“지크….”

그녀의 붉은 눈이 또렷하게 지크를 쳐다봤다. 마치 지크의 진짜 정체를 끄집어내겠다는 듯이.

“…모어!”

후웅!

눈 깜짝할 새였다. 언제나 그렇듯 너스레를 떨며 그녀의 정체를 캐려던 지크가 순식간에 검을 휘두른 것이다.

일절 봐주는 것 없이 최단거리로 뻗어진 섬뜩한 검격. 하지만 지크의 공격은 반투명한 벽에 막혔다.

콰앙!

어찌나 강하게 마력을 실었는지 충돌 소리가 마치 폭발 소리 같다. 지크는 계속해서 검을 밀어붙였다.

그그극!

그러나 지크의 검은 한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마법 장벽!’

이걸로 상대가 마법사란 것이 확실해졌다. 반투명한 마법장벽 너머로 보이는 그녀를 보며 지크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나랑 데이트하지 않겠어? 내가 아가씨에게 급격하게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걱정 마. 데이트 비용부터 장소 선택까지 전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아가씨는 나랑 같이 얘기 몇 마디만 나눠주면 돼.”

“그것 참….”

그녀가 대답했다.

“형편없는 데이트 권유네!”

퍼엉!

마법 장벽이 터져나갔다. 커다란 충격파가 지크를 밀어냈다.

‘칫!’

은발 여자와 거리가 벌어지자 지크는 혀를 찼다.

‘마법사와 거리를 두는 건 좋지 않은데.’

원거리 공격수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검은 검. 마법사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은발 여자가 손을 내밀고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엘. 라텔. 르. 워드.”

그녀의 손 앞으로 무수한 문자가 반짝이는 원 하나가 나타났다.

마법진이었다.

‘놔둘 수야 없지!’

지크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번쩍!

마법진이 빛났다. 다시 한번 붉은 기둥이 뻗어졌다.

위력은 아까 충분히 견식했다. 지크는 맞붙을 생각을 하지 않고 붉은 기둥을 피했다.

‘뭐 이렇게 빨라!’

지척을 훑고 간 마법에 지크는 놀랐다. 이 정도 마법을 구사하려면 외워야 할 주문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그녀의 주문은 무척이나 적었다.

‘영창 단축!’

고위 마법사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주문을 축소시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마법 장벽도 일순간 폈었지.’

그건 영창 생략이 분명했다.

영창 단축을 넘어 영창 생략까지 할 수 있는 마법사라니!

‘고위 마도사, 그것도 후방에서 보호받으며 마법만 사용하는 마법사가 아닌 전문적인 전투 마법사라고 봐야겠어.’

알면 알수록 저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척 봐도 자신과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아 보이지 않는가.

‘아니, 지크 모어란 이름을 알고 있다면 나처럼 회귀한 자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그렇다면 지크 자신처럼 외견에 비해 기술의 완성도가 높은 것도 당연하다.

후웅!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그녀는 만만치 않았다.

“클라테! 온!”

후웅!

그녀의 몸 가까이에서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생성된다. 지크는 급히 몸을 굽혔다.

‘큭!’

칼날은 피했지만 그 여파로 휘몰아친 폭풍에 몸의 균형이 어긋났다.

“스니! 콘! 챤웰!”

쿠웅!

지면이 일어나 지크를 후려쳤다. 간신히 검으로 가드한 지크가 밀려났다.

‘칫! 전투에 엄청 능숙하잖아!’

그녀는 접근한 지크에게 일단 바람 마법을 사용했다. 명중하면 좋고 아니어도 후폭풍으로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데다가 가까이 있는 술자에게 피해를 줄 위험도 없는 마법이다.

그 의도대로 지크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그러자 그녀는 바로 디딤발을 딛는 대지를 일으켜 지크를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이제 큰 게 오겠지.’

거리도 벌어졌으니 더 이상 그녀 자신이 자신의 마법에 휩쓸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남은 건 마법사의 장점인 강대한 화력으로 쓸어버리는 것.

“윙! 손! 클로위! 지눈! 아하트림!”

그녀의 앞에 거대한 불덩이가 나타났다.

여러 속성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물 흐르듯 적절한 상황에 적절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놀라웠다.

그렇지만 지크도 만만한 건 아니었다.

후욱!

불덩이를 향해 검을 던졌다. 설마 유일한 무기를 던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은발의 여자가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곧 입을 앙 다물더니 불덩어리를 그대로 쏘아냈다.

‘영창 중단까지?’

영창 단축, 영창 생략을 사용한 마법은 위력이 낮아지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 완성된 마법이다.

그러나 영창 중단은 다르다. 도중에 영창을 중단하면 보통 마법은 실패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헛된 마력만 닳는다.

그러나 영창 중단을 익히고 있다면 미완성된 마법도 위력이 낮을지언정 강제로 구현시킬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허공에서 불덩이와 지크의 검이 맞부딪쳤다.

콰아아앙!

폭음이 일고 열기가 확 퍼졌다. 하지만 지금 위험한 건 열기가 아니다.

후웅!

지크의 손에 마력이 가득 담겼다.

캉! 캉! 카카카캉!

지크의 손이 미친 듯이 휘둘러진다. 무언가가 지크의 손에 부딪치며 거친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하지만 전부를 막진 못해 몸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었다.

그건 지크가 던진 검의 파편이었다. ‘열검’으로 인해 안 그래도 내구도가 떨어진 판국에 마력을 가득 집어넣어 마법 화염구와 부딪치게 했으니 부서지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건 지크가 의도한 바였다.

‘어디 보자.’

지면에 착지한 지크가 쓰라린 상처를 어루만지며 은발 여자를 쳐다본다.

‘그다지 통하진 않았네.’

그는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게 은발 여자가 멀쩡하단 소린 아니었다.

급하게 마력 장벽을 세워 막은 듯 그녀의 앞에 반투명한 벽이 서 있었다. 그러나 벽 뒤의 그녀는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급소는 용케 피한 것 같지만 누가 봐도 지크보다 중상이었다.

그녀의 붉은 눈이 지크를 직시했다.

‘어이구야. 화났네.’

하지만 지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 미소를 띄웠다. 적의 분노는 그의 기쁨이었고 적의 절망은 그의 즐거움이었다.

“라라! 라스텔!”

우웅!

그녀의 손에 작은 마법진이 생겨났다. 앞으로 두 개의 얼음송곳이 생기더니 지크에게 쏘아졌다.

‘얼씨구. 이제는 얼음 속성까지?’

정말로 상대는 전 속성을 마스터한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지크는 인상을 썼다.

‘급한 데다가 어차피 내구도도 얼마 안 남아서 투척하긴 했지만 확실히 검이 없는 건 불편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지크가 맨손 무술에 문외한인 것도 아니다. 두 주먹을 꽉 쥔 채 지크는 은발 여자에게 돌진했다.

휙!

날아오는 얼음송곳을 피한다. 은발 여자는 바로 다음 마법 준비에 들어갔다.

“윽!”

그녀가 팔을 벌리다 인상을 썼다.

‘응?’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의 움직임이 어색해졌다. 하지만 그 틈은 무척 짧았다.

“라이드! 웰! 크론!”

지크가 있는 곳에서 거대한 돌풍이 불어닥쳤다.

“흐앗!”

지크가 몸에 마력을 거세게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돌풍에 부딪쳤다.

쿠웅!

바람과 몸이 충돌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가 울렸다.

‘칫, 아프네!’

용케 돌풍은 뚫었지만 몸에 상처가 더 늘었다. 하지만 포션을 챙겨먹을 시간은 없다. 지크는 다시 한번 은발 여자에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둘의 싸움은 격화됐다. 검을 잃은 지크가 주먹을 휘두르고 은발 여자는 마법을 쏘아 보낸다.

콰앙!

땅에서 솟아오른 돌창을 발로 짓뭉개며 지크가 침을 ‘퉷!’ 뱉었다.

‘이 녀석 이상한데?’

은발 여자의 실력은 무척이나 괴상했다.

그녀는 마법 기술은 물론 전투 센스도 훌륭했다. 언제 어떤 마법을 써야 하는지를 기가 막히게 파악해, 지크가 곤란해질 상황을 철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 그녀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그녀 정도의 능숙한 전투 마법사라면 몸이 바로바로 반응을 해야하는데 묘한 딜레이가 있는 것이다.

‘회귀자라면 이상할 것 없긴 한데….’

지크도 스틸월 백작가에서 한 결투 때 그러지 않았던가. 전투 경험은 차고 넘치는데 육체는 그것에 익숙하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었다.

물론 그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지크가 가능했는데 그게 또 가능한 인간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그런데 이 녀석은 그게 너무 심하단 말이야.’

마치 지크처럼 경험과 육체가 괴리하는 것이 아닌, 경험 그 자체를 인공적으로 쑤셔 넣어진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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