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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83화 (83/628)

제83화

“브로드 경! 요하임 공자와 다른 일반 병사들을 모두 대피시켜야 합니다!”

저항력 높은 기사들마저 쓰러진 병이다. 일반인인 병사들은 바곳 부인의 체액에 닿기만 해도 병이 옮아 쓰러질 게 뻔했다.

특히 안 그래도 연약한 요하임은 치명적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브로드가 급히 요하임을 둘러업었다.

“쓰러진 기사들을 구해야…!”

“이미 늦었습니다, 공자님!”

땅에 쓰러져 발작을 일으키던 기사들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는 것을 보고 요하임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인…!”

죽기 일보 직전의 가냘픈 목소리가 바곳 부인을 부른다. 지크에게 당해 쓰러져 있던 살롬에게도 바곳 부인의 피가 튀었다.

반쯤 변형된 그도 바곳 부인의 병을 막을 순 없는지 피부 전체에 발진이 생겨 있었다.

그는 하염없이 바곳 부인을 쳐다봤다.

그건 원망일까 아니면 걱정일까. 그의 눈에 떠오른 흐린 감정을 안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감정을 구분할 새도 없이, 그의 고개가 힘없이 떨궈졌다.

죄책감에 좀먹혀 바곳 부인에게 이리저리 휘둘린 끝에 무고한 사람들을 대량학살한 자의 허무한 최후였다.

하지만 소리없이 죽은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그는 완전히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있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불렀던 바곳 부인에게조차.

“병사들은 당장 영주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내보내라! 기사들은 바곳 부인을 상대하되, 절대로 피 같은 체액에 닿지 않도록 하라!”

요하임이 큰 소리로 외치고는 기도실을 빠져나갔다. 바깥에 모여 있던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

순식간에 마음을 다잡고 최선의 선택을 생각해 명령을 내린다. ‘뱀파이어’라고 불릴 때의 무력은 없다 하더라도 그는 충분히 굉장했다.

지크가 옆에 있는 한스를 불렀다.

“한스.”

“넵!”

다행히 기사들의 연계에 바로 끼어들 실력이 없던 한스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어 바곳 부인의 피에 당하지 않았다.

“별도의 명령이 없으면 기사들의 뒤에서 조금씩 도와만 줘라. 지금 네 실력에 바곳 부인에게 다가갔다가는 개죽음이다.”

“넵!”

지크의 명령에 한스는 바곳 부인과 조금 거리를 벌렸다.

《공자님께서는 가셨네요. 어떤가요? 저도 이 이상 드라큘 영지에 붙어 있을 생각이 없는데. 이쯤에서 서로 갈 길 가는 건요.》

“닥쳐라! 너 같은 마녀를 어디로 보낸단 말이냐!”

충원된 기사가 외쳤다.

《끈질긴 남자는 취향이 아닌데요.》

후웅!

그녀의 손이 휘둘러졌다. 따귀라도 때리려는 듯 쫙 펴진 손바닥이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며 기사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소리만으로도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하지만 기사들은 기죽지 않고 바곳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지크도 그들 사이에 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공격의 기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바곳 부인을 쓰러뜨리려면 몸에 칼을 꽂아야 하는데, 그럼 피가 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의 피에 닿으면 정체불명의 병에 걸린다.

그녀는 그걸 능숙하게 사용했다. 팔에 상처가 나면 오히려 더더욱 팔을 휘둘러 피를 뿌렸고 간간이 침을 뱉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 자체가 강했다.

‘마법사가 있으면 편할 텐데.’

지크는 혀를 한 번 차고 다른 기사들보다 한 발자국 더 들어갔다.

《어머! 지크 씨가 상대해주실 건가요?》

“당신과 나 사이 아닙니까.”

지크가 검을 겨눴다.

《후후후! 그러고 보니 지크 씨는 성격에 맞지 않게 에스코트를 잘했었죠? 그럼 조금만 더 흥을 올려 볼까요?》

바곳 부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손톱이 빛났다.

쫙! 쫘좍!

순식간이었다. 바곳 부인이 자신의 몸을 할퀴자 끔찍한 상처가 생겨났다. 피가 줄줄 튀었다.

“이런 젠장!”

기사들이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바곳 부인의 움직임에 따라 핏줄기가 허공에 뿌려진 것이다.

마치 핏빛 안개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가지가지 하네.’

지크는 검에 마력을 가득 담았다. 마치 검으로 노크를 하듯 허공을 살짝 두드렸다. 검끝에서 뿜어진 마력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퍼졌다.

퍼엉!

마치 공간 자체를 망치로 때린 듯 전면으로 충격파가 터졌다. 흩날리던 핏방울이 전부 한 쪽 벽으로 날아갔다.

《…마을에서의 습격도 그렇고 지크 씨는 일신의 무력도 굉장하네요.》

일점으로 집중된 파괴력이 아닌 면으로 퍼진 충격파라 바곳 부인은 따끔해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지크의 기술은 피를 전부 날려버리기 위한 것.

“기술만큼은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니까요.”

《믿음직스러워라. 하지만 고작해야 피보라를 한 번 날려보냈을 뿐이죠. 그 정도는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답니다.》

실제로 바곳 부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상처의 재생이 거의 끝나 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았지만 이미 흘러내린 것만으로도 당분간은 충분하다 못 해 넘쳤다.

“확실히 성가시긴 합니다.”

그건 사실이다. 아무리 지크라도 저 피에 묻었을 때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 이긴 것처럼 구는 것도 좀 짜증나는군요.”

지크의 검에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날에 집중해 절삭력을 높이거나 검 전체에 불어넣어 강도를 높이는 그런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 어떤 규칙도 없이 불규칙적으로 검 안을 움직이는 마력. 단, 그 흐름은 무척이나 거셌다.

우우우웅!

검이 울음을 토한다. 마치 지금껏 농락당한 앙갚음을 해주겠다며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치이익!

검신이 붉게 물들며 주변 공기가 미묘하게 일렁였다.

탓!

지크가 발을 굴러 바곳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바곳 부인이 지크를 향해 손을 뻗는다.

휙!

능숙하게 팔을 피했다. 육체능력은 무시무시하지만 전투 훈련을 하지 않은 그녀는 역시 빈틈투성이였다.

그녀의 단단한 피부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지크의 눈이 한 곳을 포착했다. 아직 덜 아문 그녀의 상처였다.

이미 손톱만큼까지 작아진 상처였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푸욱!

지크의 검이 시원스레 꽂혔다.

원래 같았으면 상처에서 나온 피가 주변에 흩뿌려져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처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매케한 연기와 뭔가가 타는 냄새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끄아아아악!》

바곳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다.

지크의 검이 빠졌다. 하지만 검은 이미 그녀의 몸을 크게 가로지른 뒤였다.

《윽! 으극!》

“어떻습니까, 부인?”

상처를 부여잡은 바곳 부인을 보며 지크가 상냥하게 말했다.

“상처가 불타는 느낌은.”

마력을 검 안에서 거칠게 마찰시켜 검신이 고온을 뿜게 만드는 기술. 지크는 간단하게 ‘열검’이라고 부르는 기술이었다.

‘검의 내구도에 좋지 않아서 그닥 쓰고 싶진 않았는데.’

하지만 적어도 확실하게 통했다. 지져진 상처에서 피가 튀어나오지 않았고 병도 불타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재생도 느려지지.’

어떻게 봐도 지금의 바곳 부인에게 가장 효과적인 대항수단이었다.

지크는 계속해서 공격했다. 단단한 피부를 피해 재생이 느려진 상처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큭!》

바곳 부인은 다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 피를 뿌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톱이 자신의 살을 가르자 그곳으로 바로 지크의 검이 날아왔다.

《끄아아악!》

몸이 지져지는 고통은 상처를 초월한다. 게다가 지크는 상처에 검을 꽂을 때마다 마력으로 검의 열기를 바곳 부인의 내부까지 쳐넣었다.

전염병을 뿌리기 위해 내는 상처가 자신의 약점으로 변하자 바곳 부인도 더 이상 함부로 자해를 하지 못했다.

조금 물러 서 있던 기사들도 조금씩 지크를 돕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들의 공격은 피가 튈 수밖에 없기에 대부분 바곳 부인의 움직임을 막거나 지크를 보호하는 식의 연계를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지크에게 상당한 도움이 됐다.

《크으윽!》

또 한 번 바곳 부인의 복부에 깊은 자상이 생겼다. 게다가 이번 상처에서도 역시 연기와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바곳 부인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 이런 곳에서….》

그녀가 이를 갈았다.

《이런 곳에서 죽을까 보냐아아아!》

그녀 특유의 여유만만한 어투가 사라졌다. 그녀가 입을 쩌억 벌리더니 자신의 팔을 덥석 물었다.

콰득!

강력한 치악력이 단단한 피부를 쉽게 깨물어 부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피가 튀었다.

하지만 바곳 부인은 턱의 힘을 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하게 줬다.

《크, 크으으으윽!》

콰지직!

소름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바곳 부인의 팔이 완전히 잘렸다. 바곳 부인은 잘린 팔을 부여잡고는 휘둘렀다.

“피, 피해!”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잘린 팔에서 분수처럼 솟구친 피가 마치 비처럼 떨어졌다. 지크조차도 일단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크앗!》

괴성을 내며 바곳 부인이 지크에게 팔을 던졌다. 지크는 옆으로 크게 뛰어 피했다.

쾅!

팔이 기도실 벽에 박혔다.

바곳 부인이 등을 돌렸다. 거세게 돌진해 근처 벽을 어깨로 들이 받았다.

콰앙!

두터운 벽이 너무도 힘없이 깨져나갔다. 뻥 뚫린 구멍 너머로 도심지가 보인다.

바곳 부인은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도망치는 건가.’

지크는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기사들에게 외쳤다.

“저 여자는 제가 붙잡고 있을 테니 여러분은 당장 공자님을 찾아서 바곳 부인이 도망쳤다고 말씀드리세요! 만약 저 자가 도심지로 들어가면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한스! 너는 브로드 경을 따라가라! 브로드 경의 명령을 받아!”

“네!”

기사들이 허둥지둥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들도 저 전염병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바곳 부인이 영주성 밖으로 나갔다가 어떤 꼴이 펼쳐질지 예상을 했던 것이다.

한스도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탓!

지크가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착지한 곳은 영주성의 정원으로 꾸며놓은 것 같은 곳이었다.

‘차라리 이게 낫네.’

아무래도 영주성이라는 방해물이 있는 것보다 이렇게 넓직한 공간이 전투하기엔 마음 편했다.

‘아무 생각 안 하고 기술들을 때려박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바곳 부인이 도망친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래도 녀석을 영주성 밖으로 내보내면 안 돼.’

그럼 정말로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그러다 문득 지크는 피식 웃었다.

‘내가 시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니.’

회귀 전의 마왕 지크 모어가 지금의 자신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비웃을 수도 있고, 혀를 찰 수도 있으며, 살의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과거의 자기가 어쨌든 지금은 지금이다.

‘과거의 나조차도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속박할 순 없어!’

쿵!

다리에 마력을 듬뿍 넣은 채 빠른 속도로 바곳 부인을 쫓았다. 바곳 부인이 도망가는 속도는 굉장히 빨랐지만 다행히 그녀가 영주성을 벗어나기 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넓은 영주성의 부지가 굉장히 고마웠다.

《젠자아앙!》

이미 존댓말은 사라졌다. 신경질적인 욕설이 내뱉으며 바곳 부인이 하나만 남은 팔을 휘둘러왔다.

“그 모습에는 차라리 그 말투가 더 어울리네! 솔직히 괴물처럼 변한 주제에 인간 때처럼 고상한 말투를 쓰는 모습이 역겹기 그지없었거든!”

지크 또한 존댓말을 빼고 빈정거리며 마주 검을 휘둘렀다.

팔 하나를 잃어 공격수단 하나가 사라진 데다가 몸의 균형마저 제대로 잡히지 않으니 지크의 입장에서 바곳 부인의 공격은 무척이나 만만했다.

카아앙!

검과 손이 충돌했다. 거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크는 절대로 정면에서 힘 대결을 하지 않고 바곳 부인의 기세를 비틀 수 있는 곳만 공격했다.

휘청!

바곳 부인의 거체가 휘청이자 지크는 바곳 부인의 잘린 팔을 노렸다. 이미 그의 검은 고열을 내뿜고 있었다.

서걱!

《아악!》

바곳 부인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어떻게든 지크를 해치우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지크의 움직임에 휘말렸다. 전투의 경험치가 차원이 다른 것이다.

《크윽!》

도저히 승기를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바곳 부인이 다시 등을 돌렸다.

‘그냥 무작정 도망칠 생각인가?’

지크는 한심하다는 듯 속으로 혀를 찼다.

‘그걸 내가 두고 볼 리가 있나.’

이미 바곳 부인의 몸 여기저기에 지져진 검상이 잔뜩 난 상황. 이제는 그 두꺼운 피부를 뚫으려 고생할 필요도 없다.

‘정보를 캐려 살려두기엔 너무 위험해. 여기서 끝내자고.’

지크는 마력에 검을 잔뜩 집어넣었다. 어차피 주변에 인적도 없으니 큰 기술로 한 방에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큐웅!

붉은 빛기둥이 솟았다. 강렬한 열기를 머금은 그것은 주변에 황홀한 빛을 뿌리며 직진으로 바곳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퍽!

거칠지도 크지도 않은, 그저 담담하게 울려 퍼지는 타격음이 울리며 바곳 부인의 상체가 통째로 사라졌다. 빛기둥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경로에 있는 정원수와 장식물마저 싸그리 날려버리고 먼 하늘로 사라졌다.

두 눈이 부릅떠질 위력.

상체를 잃은 바곳 부인의 하체가 비틀비틀 몇 걸음을 더 걷다가 땅에 쓰러졌다. 상처 부위는 새까맣게 지져져 피조차 나오지 않았다.

드라큘 영지를 실험터 삼아 철저하게 가지고 놀았던 ‘페스트 그레타 바곳’의 최후였다.

목표로 했던 바곳 부인이 죽었다. 그러나 지크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도를 더 높였다.

바곳 부인을 죽인 마지막 일격. 그건 지크가 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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