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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81화 (81/628)

제81화

“나…스스로를 위해…서라니. 난…당신과 희…생자들을 위해…복수….”

또각!

바곳 부인의 걸음 소리가 살롬의 말을 막았다.

한 발 앞으로 나선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자세를 낮춰서 살롬과 눈높이를 맞췄다.

“아니에요.”

다시 한번 부정했다.

“당신 아니, 당신을 포함해 드라큘 영지에 반기를 든 자들의 소망은 단 하나였죠. 바로 심판.”

살롬이 계속해서 강조했던 두 글자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드라큘 백작의 명령에 전염병을 퍼뜨려 많은 사람을 고통과 죽음 속에 몰아넣었던 당신들은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건 그 대상에 대한 분노로 변했어요. 명령을 내린 백작과 그 작전을 실행하고 지지한 당시의 일부 가신, 그리고 당신 본인들까지도요.”

살롬의 표정이 변해갔다.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바곳 부인의 말이 심부를 쑤셨기 때문이다.

“그런 당신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무척이나 환영할 만한 존재였겠죠. 억울한 피해자들의 대표로 삼아, 심판을 내릴 정당성을 부여해줄 존재였으니까요.”

“…아냐.”

“맞아요.”

살롬의 미약한 부정을 바곳 부인은 사정없이 짓밟았다.

“당신들에게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저 명분일 뿐. 당신 스스로의 죄책감에 벗어나기 위해 이용한 장기말에 불과해요.”

“아냐! 나, 난 당신을 위해서…!”

“하나 말해드리죠, 살롬 경.”

오랜 비밀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녀가 말했다.

“난 복수를 원하지 않았어요.”

“!!!”

믿을 수 없다는 듯 살롬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지만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진실을 알아낸 것일까. 그는 고개를 떨궜다.

“아니야. 아니야. 난, 난 그저 당신을, 그들을 위해서….”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끝없이 울렸지만 그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요하임과 일행이 착잡한 눈초리로 살롬을 내려다본다. 후회와 비탄의 끝에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거기 있었다.

“…두 사람을 확보해라.”

요하임이 명령을 내렸다. 살롬은 쓰러졌고 바곳 부인은 전투 능력이 없어 보인다.

이제 이 혼란을 끝낼 때다. 그렇게 생각했다.

“멈추세요.”

지크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왜 그러십니까, 지크 님?”

“아직 바곳 부인이 남아 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다가갔다간 큰일 날 겁니다.”

“하지만 바곳 부인은….”

요하임은 바곳 부인을 슬쩍 쳐다봤다.

다시 일어선 그녀는 별 다른 반항 의지를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혹은 어떤 오해와 우연이 겹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바곳 부인은 통제에 따를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지크의 말에 요하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갖고 있던 무의식적인 상념을 지크가 정확히 잡아낸 것이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움찔거리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여러분의 착각을 정정시켜드리는데, 바곳 부인의 ‘복수를 원하지 않았다’라는 발언은 여러분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방향의 의미일 겁니다.”

“네?”

다른 방향이라니. 그 끔찍한 일을 당했음에도 그것이 옳지 않기에 복수라는 어두운 감정을 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크는 요하임 아니, 대다수가 품은 그 생각을 부정했다.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겠군요. 하지만 저 여자는 영지에 온갖 병을 나돌게 했던 여자입니다. 한데 그런 기특한 생각을 갖고 있겠습니까?”

그제야 분위기에 휩싸여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 대체….”

“바곳 부인.”

지크가 바곳 부인을 향해 말했다.

“네?”

“지금껏 열심히 질문에 답했으니 당신도 내 질문에 하나만 대답해 주시죠.”

“어떤 질문이죠?”

상냥하게 대답해오는 바곳 부인을 향해 지크는 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가족이 전염병에 걸려 죽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습니까?”

“지크 님, 그건….”

아무리 적이라도 말해도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있다. 바곳 부인에게 시선을 두면서도 요하임이 지크를 말리려 들었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면사 너머로 떠오른, 그녀의 기괴하게 일그러진 미소 때문이었다.

“후, 후후후! 역시 당신은 대단하네요!”

바곳 부인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옛 추억을 상기하는 듯 그녀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건 갑작스러웠어요. 전날 밤에 잘 자라고 이마에 입 맞춰 준 아이가 고열에 시달리고, 출근하기 전의 남편이 피를 토했으니까요.”

엄청난 혼란이 일었었다. 저택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쓰러졌고, 의사마저 공포에 질려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저는 전염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공포를 견디며 남편과 아이를 간호했죠. 그만큼 그들을 사랑했으니까요.”

물에 적신 천으로 펄펄 끓는 피부를 덮었고 뱉어내는 가래를 치웠으며 똥오줌을 갈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사랑스러운 그들의 얼굴에서 힘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몇 번을, 몇십 번을, 몇백 번을 봤을까요. 점점 수척해지고 생기 없어지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아,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이 얼마나….”

그녀의 눈에 빛이 돌았다. 희열, 그리고 광기의 빛이.

“아름다운지!”

“흡!”

한 기사가 소리를 냈다. 구토감이 치솟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기사를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크를 제외한 사람들 모두가 솟아오르는 혐오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까. 심지어 살롬마저 경악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 복수를 원하지 않아요. 오히려 드라큘 백작님에게는 고마움을 느껴요. 제게 그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신 분이니까요.”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를 따라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저게 페스트지.’

지크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녹이 ‘대지의 폭군’이 되는 걸 막았고 지금은 요하임이 ‘뱀파이어’가 되는 걸 막으려는 지크였지만 페스트만큼은 마인화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페스트가 전염병을 뿌리고 다니며 악행을 시작했다는 이유만이 아니었다.

‘저 녀석은 그 용사 파티마저도 치를 떨었다는 놈이니까.’

얼마나 심성이 썩어빠졌는지 마인들을 도륙하고 다녀 쓰레기들에 익숙할 터인 용사 파티도 페스트가 화제로 나오면 고개를 저었다고 할 정도였다.

타고난 미치광이. 그게 몇 없는 페스트의 정보 중 하나였다.

“그, 그럼 대체 왜…날…도와….”

이제야 바곳 부인의 실체를 안 살롬이 다급하게 물었다.

“실험터가 필요했어요.”

“시, 실험…터?”

“만들어 놓은 전염병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좀 필요했거든요. 특히 마력 때문에 저항력이 말도 안 되게 높은 기사들을 실험하기 위한 곳이 말이에요. 그런 면에서 영주성은 실험하기 참 편했어요. 뭐, 누구 덕분에 본격적인 실험을 하기도 전에 끝났지만요.”

바곳 부인이 지크를 샐쭉하게 쳐다봤다.

“마, 말…도 안 돼.”

“왜 그런 표정을 보이나요, 살롬 경? 당신들이 당신들의 죄책감을 풀기 위해서 저를 이용한 것처럼, 저도 당신을 이용한 것뿐이에요. 서로 이용한 처지에 그렇게 배신당했다는 표정을 짓는 건 어떨가 싶네요.”

“이, 이 사갈 같은 년이!”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브로드가 고함을 쳤다. 그에게 바곳 부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공자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당장 저 미친년을 잡아야 합니다!”

“정말로 그래도 될까요? 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렇게 미적댔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이번엔 무슨 장난질을 친 거냐.”

브로드의 으르렁거림에도 그녀는 태연했다.

“갈두림은 아시죠? 당신들을 감염시킨 병 말이에요.”

“흥! 그것쯤이야 이미 지크 님 덕에 모두 완치된 상태다.”

“그 병에 걸린 게 당신들만일까요?”

“무슨 소리냐.”

존댓말을 집어던진 요하임이 탐색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제가 영주성에 들어와 당신들에게 그 병을 전파한 건 당신들의 저항력이 높아 직접 병을 뿌려야 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굳이 제가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죠. 뭔가 아시겠나요?”

“…다른 인질을 잡아 놓은 건가.”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은 편하네요.”

“누구지?”

“오스프린 전체의 시민들.”

요하임이 경악했다.

“그,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감염시켰다고?”

“제 전문이 전염병인 걸 잊었나요? 그냥 몇 명 감염시켜 놓으면 병은 알아서 퍼져요. 같은 갈두림이라고 해도 잠복만 하는 특제라 아무 의심없이 활동 가능할 거고요. 물론 제 의지로 바로 증상을 발현시킬 수도 있죠.”

“거짓말이다! 오스프린 시 전체의 병을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치료된 것도 알아챘을 거다!”

“그것과 이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뭐, 제 능력이 오스프린 전체에 닿지 않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영주성 주변의 병이라면 통제 가능하고, 일부가 발현하면 연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병도 발현되도록 해놨는걸요. 결과는 변하지 않는단 거죠.”

바곳 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 당신들이 오스프린의 모든 사람들을 이미 치료해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요.”

“젠장!”

요하임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오스프린 전체가 인질로 잡혔을 가능성이 있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순 없었다.

바곳 부인이 지크를 바라봤다. 그 누구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는 자신감이 술술 새어 나왔다.

“자, 그럼 다시 얘기를 시작….”

“아, 됐습니다.”

지크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끝내죠.”

“네?”

“끝내자고 했습니다. 당신의 기고만장함은 충분히 봤거든요.”

갑작스럽게 뒤바뀐 지크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는지 바곳 부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크는 자기 할 일만 했다. 검을 고쳐쥐는 폼이 당장이라도 바곳 부인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자, 잠시만요, 지크 님!”

요하임이 급히 지크를 말렸다.

“그녀는 지금 오스프린의 사람들 모두의 생명을 잡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크의 공격적인 기색은 없어지지 않았다.

요하임이 그를 불안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말리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온갖 사건을 해결해 온 지크다. 그가 혹시나 무슨 묘수를 낸 것은 아닐까. 어쩔 수 없는 기대가 솟구쳤다.

“…조금 실망이네요. 당신이 그렇게 어리석었을 줄은. 이제 와서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설마요. 전 바곳 부인의 말을 믿습니다.”

“그럼 오스프린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려고요?”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전 오스프린을 희생시키더라도 당신을 죽일 겁니다.”

모든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바곳 부인조차 이 말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지, 지크 님!”

한스가 놀라 외쳤다.

“차, 착하게 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그런 말을…!”

성질이 더럽고 사고방식이 기상천외하지만 적어도 착한 일을 하겠다는 마음만큼은 확고한 지크가 아니던가. 그것만큼은 믿고 있었기에 한스는 더 충격을 받았다.

“그래, 착하게 살 거야. 그래서 저 여자를 죽이려는 거잖아.”

“그럼 오스프린의 시민이 몰살당할지 모릅니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지.”

한스가 얼어붙었다.

“이봐, 한스. 동화 속 용사를 꿈꾸는 너에게는 잔인한 말일 수도 있지만, 사람이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 그리고 지금처럼 무지막지한 선택이 눈앞에 들이밀어질 때도 있지.”

오스프린의 시민이냐, 아니면 그레타 바곳의 처리냐.

“네가 진짜 용사를 꿈꾼다면 그때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을 받더라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저 여자의 본모습은 아까 봤지? 여기서 도망친다고 어느 산속에 틀어박혀 속죄를 하며 살아갈까? 아니면 좋다고 전염병을 뿌리면서 나돌아다닐까?”

후자.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 희생될 사람이 오스프린에 있는 사람보다 더 적을까?”

“…….”

생명과 생명을 저울에 두고 하는 고민에 한스는 숨이 막혔다.

“게다가 난 착하게 산다고 했지, 어느 쪽이 더 착한 일인지 일일이 비교해가며 산다고 하지는 않았어. 오스프린의 사람들을 구하는 건 분명 착한 일이지만, 여기서 눈앞의 마녀를 죽이는 것 또한 착한 일이다. 두 개 다 착한 일이라면, 어느 착한 일을 할지는 내가 정한다.”

정말이지 잔인하고 잔혹한 결단이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바곳 부인이 지크를 서늘하게 바라봤다.

“…결국 끝장을 보자는 건가요?”

“난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 지크 님! 아무리 그래도 오스프린의 사람들을 전부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요하임이 지크를 막아섰다. 아무리 지크의 말이 맞다고 해도 드라큘 백작의 아들로서 오스프린의 멸망을 볼 순 없었다.

브로드도 요하임의 곁에서 동의의 눈빛을 보냈다. 칼끝이 슬슬 흔들리는 걸 보니 한바탕 무력충돌도 불사할 것 같았다.

‘뭐, 영지의 귀족이라면 저렇겠지.’

오히려 저러지 않는 게 이상하다.

“저분들은 당신께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네요.”

바곳 부인이 조롱했다.

지크는 요하임과 브로드를 한 번 쳐다봤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기분을 탔네요. 걱정 마세요, 공자님. 오스프린의 시민들은 무사할 테니까.”

“아, 역시 그랬군요. 지크 님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할 리가….”

“일단 제가 한 말은 전부 진심입니다.”

“…….”

안도하던 요하임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말로 오스프린의 시민과 바곳 부인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할 때나 생각할 일이죠.”

“무슨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요?”

바곳 부인이 순진한 눈초리로 물었다. 다른 방법 따윈 없다는 확신 위에서 하는 조롱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적대하는 상대. 지크가 정말로 좋아하는 먹잇감이다.

“애초에 조건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둘 중 하나를 포기할 필요가 없거든요.”

“무슨 소리죠?”

“오스프린의 시민은 이미 전부 치료가 끝난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놀라고, 면사 너머 보이는 바곳 부인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지크는 환하게 웃었다.

“어때요, 부인. 잠깐의 희망은 달콤했나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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