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아름다운 얼굴. 순진한 눈동자. 그리고 잔잔한 목소리.
하지만 그녀의 말만은 등에 얼음물을 일시에 들이부은 것 같이 소름끼쳤다.
“됐습니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함부로 먹지 말라고 해서요.”
“어머, 모르는 사람이라뇨. 실망인데요. 저랑 그렇게 뜨거운 관계를 이어가 놓고 말이에요. 설마 저는 한때의 장난이었나요?”
바곳 부인이 면사를 들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미인은 뭘 하든 그림이 된다. 그것도 안쓰럽게 눈물을 쏟는 장면은 더욱 사람들의 가슴을 쥐어짠다.
그러나 지금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정체불명의 괴물을 보는 듯 식은땀마저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뜨거운 관계라…. 정말로 뜨겁긴 했죠. 당신이 내 정체를 캐내려고 갖은 면에서 접촉을 해왔으니까 말입니다.”
사람들이 연인 관계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 그 야릇한 분위기의 관계는, 실상 지크와 바곳 부인이 서로를 재고 탐색하던 첩보전이나 다름없었다.
“들켰나요?”
바곳 부인이 실수했다며 귀엽게 혀를 내민다. 그러나 누구도 그 모습을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써 이그람을 풀어놨는데 갑자기 치료약이 나타나 버렸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당연히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죠.”
“기대했던 대로였습니까?”
“전혀요. 분명 당신은 잘 생기고 매력 있는 남자예요. 성격은 좋지 않아 보이지만 와일드하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매력이죠. 하지만 제가 걱정한 의료지식은 아마추어에서 한 발자국 더 나간 정도일 뿐, 제가 걱정할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조금 충격이에요.”
지금껏 연인에게 속삭이듯 나긋나긋하던 그녀의 목소리에 날카로움이 섞였다.
“설마 당신이 갈두림의 치료약을 만들 줄은 몰랐거든요.”
“기사와 병사들에게 전염시킨 병의 이름이 갈두림인 모양이군요.”
“꽤 고심해서 만든 병이에요. 다루기 쉽고 감염되면 확실히 죽는 데다가 엄청난 통증까지 뒤따르죠. 부가적으로 육체 능력까지 상승하고요.”
“사람들을 부하로 조종하기 위해 만든 병이고요.”
“어쩜! 역시 눈치도 빠르군요! 지금 와서 보면 당신의 의료지식이 낮다는 것에 안심하면 안 됐어요. 당신이 위험한 건 그 눈치와 판단력이었는데 말이에요.”
사실 회귀 전의 정보도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음모를 밝히는데 아무렴 어떻겠는가.
게다가 지크가 눈치가 빠르고 판단력이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오스프린의 병력이 병에 걸렸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당신들이 날 처리하려고 할 때 갈두림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염시켰지 않았습니까. 마을에 갑자기 희귀한 병이 돌고 적절하게 그 약을 들고 있는 놈들이 등장한다? 무척 작위적이죠. 그래서 그 병이 인공적으로 돈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회귀 전의 정보는 쏙 뺀 채, 지크는 낭랑하게 그럴듯한 거짓말을 계속 해댔다.
“그때부터 주변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계속 보내고 있었죠. 요하임 공자가 영주성에 들어간 이후에 계속해서 공자 측 기사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절 대하는 기색이 이상하더군요. 충고하건대, 클로베이도 그렇고 기사들에게 탁월한 연기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든 어색한 끼가 나오거든요.”
“충고 감사해요.”
바곳 부인이 살롬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기사들은 그의 담당이었던 모양이다.
상처의 고통 때문에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에 죄책감과 미안함이 교차됐다.
“약은 마을 사람들을 확실하게 이용하기 위해 암살자들에게 내줬던 치료약을 분석한 거죠?”
지크가 빙그레 웃었다.
“정말로 굉장하네요.”
졌다는 듯 바곳 부인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당신의 의료 지식이라면 그 약을 분석하기는 힘들었을 텐데. 저를 감쪽같이 속인 건가요? 그렇지 않다면 그 ‘책’이란 것에 도움을 받은 걸까요?”
바곳 부인의 의미심장한 말은, 그녀도 지크가 이그람의 치료법을 얻었다는 책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지크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얄미운 사람 같으니.”
바곳 부인이 그런 지크를 샐쭉하게 쳐다봤다.
“좋아요. 그럼 다음에 알고 싶은 건….”
“부인!”
지치지도 않는지 다음 질문을 찾으려던 바곳 부인을 방해하는 외침이 터졌다. 그녀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제가 얘기를 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나요, 살롬 경?”
탁 가라앉은 목소리로 살롬을 타박하는 바곳 부인. 하지만 살롬은 여전히 고함쳤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합니다! 조금만 있으면 저들의 지원군이 더 도착할 겁니다!”
실제로 기도실 바깥으로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보였다. 다른 곳을 확보한 병력이 지원을 위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던 것이다.
자신들에게 병을 감염시킨 살롬과 바곳에겐 당연히 좋은 감정 따위 없는지라 둘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살벌했다.
하지만 그건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영지의 비사를 들은, 요하임을 비롯한 몇몇은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병력을 물리시죠.”
브로드가 조용히 요하임의 곁으로 다가가 조언했다.
“영주님의 얘기가 또다시 나올지 모릅니다. 이런 얘기는 알고 있는 자가 적은 게 좋습니다.”
“자네는 이 일을 숨기자고 하는 건가.”
요하임이 불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브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총명한 요하임이라면 이미 제안의 뜻을 알고 있을 터. 그저 착한 심정과 죄책감에 투정을 부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걸 바로 잡는 것 또한 가신의 일이다.
“후에 공자님이 그 일을 알리든 알리지 않든 선택권은 갖고 있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아직 사실이라고 확인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불필요한 오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
브로드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요하임은 곧 그 방에서 이야기를 들은 자들을 제외한 다른 병력을 기도실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문을 굳게 닫았다.
다행히 기도실 문은 기도를 할 때 방 밖의 소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도록 두껍게 만들어졌기에 소리가 새어나갈 일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살롬은 바곳 부인에게 탈출을 종용하고 있었다.
‘저기가 탈출구인가?’
지크의 눈에 벽에 걸린 성물 바로 아래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곳 또한 영주성의 비밀 통로로 이어진 입구일 것이다. 살롬은 저 통로를 통해 영주의 방에서 기도실로 온 것이다.
“공자님. 일단 저 둘을 확보하시죠.”
브로드가 권했다.
“이유야 어쨌건 일단은 영주님께 위해를 가하고 영지에 온갖 혼란과 파괴를 초래한 자들입니다. 잡은 후에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자식들! 그딴 걸 내가 보고만 있을 성싶더냐!”
살롬이 앞으로 나왔다.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포션 같은 걸 챙길 겨를도 없었던지라 살롬은 뚫린 가슴을 그저 찢은 옷으로 동여매고 있을 뿐이었다. 혈액 공포증인 요하임이 한발 물러났다.
“부인! 여기는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당장 달아나시오!”
살롬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만만치 않은 기운이 온몸에 흘러넘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일선에서 은퇴한, 장애를 가진 퇴물일 뿐이었다.
카아앙!
나선 건 지크였다. 그의 검이 살롬의 검을 두들겼다.
“크윽!”
젊음의 완력과 체중을 완벽하게 지탱할 수 있는 멀쩡한 다리. 그것만으로도 밀리는 판국에 살롬은 부상까지 입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불행한 건 역시 상대가 그 지크라는 것이었다.
“흐아아아앗!”
목청이 찢어질 듯한 기합과 함께 한 혼신의 일격.
살롬이 젊었을 때는 쓰는 족족 상대방을 격살시키는 무시무시한 공격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공격은 지크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퍼억!
“컥!”
지크의 발길질이 그의 복부에 꽂힌다. 살롬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검만은 놓치지 않았다.
“안…된다….”
몸에 뚫린 구멍에서 계속 피가 새어 나오고, 호흡을 압박한다. 그러나 살롬은 계속 투지를 불태웠다.
“절대로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다.”
나지막한 중얼거림에는 그의 처절한 집념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은 놈들이 이젠 그녀마저 농락할 셈이냐!”
피를 토하며 그가 외쳤다.
요하임을 포함한 이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살롬과 바곳 부인의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행위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만은 너희 손아귀에 넘기지 않을 것이다!”
살롬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 정체를 짐작한 지크가 혀를 찼다.
‘포션은 들고 다니지 않으면서 그건 들고 다녔던 거냐.’
클로베이가 사용했던, 마신 자의 육체를 괴물처럼 변신시켜 막대한 능력을 주는 물건. 그것이 분명했다.
살롬이 순식간에 그걸 들이마셨다.
“부인은 어서 떠나시오!”
액체가 들어 있던 병을 아무렇게나 던진 이후 살롬이 검을 고쳐 쥐었다.
살롬이 그 괴물이 된다면 귀찮아진다.
‘변신하기 전에…!’
지크가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살롬의 눈앞에 지크의 몸이 나타났다.
“이 자식!”
살롬이 검을 날렸다.
몸이 변하고 있는 상태라 날아오는 검은 깔끔하지 못했다. 궤도가 뒤틀리고 힘도 제대로 실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변하기 시작한 육체가 그 단점을 메웠다. 오히려 급격하게 상승한 힘 때문에 위력이 올라갔다.
‘그래봤자 아직은 힘만 쎈 놈이지.’
힘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비스듬히 흘린다.
안 그래도 흐트러져 있던 살롬의 균형이 무너졌다.
앞으로 쏠리는 그의 몸체.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지크는 그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살롬은 방어하지 않았다.
이미 가슴 부위는 단단한 피부로 변한 상태. 오히려 무너지는 그대로 지크를 짓누르려 했다.
‘일선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는 건 사실인 것 같군.’
그렇다면 살롬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터.
지크의 검이 살롬의 가슴, 정확히는 공간 찌르기로 뚫어놓았던 상처 부위로 향했다.
육체 변화로 그 상처도 대부분 메워졌지만, 아직 작은 틈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콰지직!
지크의 검이 단단한 피부를 부수고 살롬의 가슴을 관통했다.
“컥!”
살롬의 움직임이 잠시 멈춘다.
지크는 그 상태로 검에 마력을 과하게 흘려 넣었다.
콰드드득!
마력의 파도에 내부 장기가 뒤틀렸다. 살롬의 입에서 피가 튀어 나왔다.
슥!
지크가 검을 뺐다.
쿵!
살롬의 신체가 쓰러졌다.
괴물처럼 변해가던 그의 몸체가 멈췄다.
하지만 반쯤 인간의 형체가 남은 지금의 모습은 차라리 온전히 괴물 같은 형체가 더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더 끔찍해 보였다.
“이, 이건….”
“대체….”
기괴한 살롬의 모습에 뒤에서 전투를 보던 요하임과 일행이 침음을 흘렸다.
지크는 바곳 부인을 쳐다봤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전투를 보고 있었다.
“이제 방해받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겠네요.”
놀랍게도, 자기를 그토록 보호하려 애쓰던 살롬이 칼에 찔려 쓰러졌음에도 바곳 부인은 웃었다.
오히려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 그런 상쾌함까지 느껴졌다.
“이…! 그게 당신을 위해 행동한 사람에 대해 할 말이오!”
요하임이 분에 차 소리쳤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살롬이지만 그건 모두 바곳 상회를 포함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위함이 아니었던가.
한데, 그 아픔을 공유하고 있을 그녀가 저런 말을 하다니.
턱!
쓰러져 있던 살롬이 움직였다.
상당한 치명상인 듯 그의 움직임은 격하지 않았다. 마치 달팽이가 움직이듯 두 팔로 땅바닥을 기었다.
“부, 부인….”
그는 바곳 부인을 향하고 있었다.
“도, 도망치시오. 어서….”
피를 토한다. 목소리도 쩍쩍 갈라진다. 하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 쏠렸다.
“내가…어떻게든…막을 테니….”
검자루를 틀어쥐려 하지만 자꾸 흘러내렸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롬은 계속해서 검을 잡으려 했다.
어떻게든 그녀만은 살려 보내겠다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모든 움직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바곳 부인에게 닿진 않는 모양이었다.
“싫어요.”
살롬의 노력을 진흙발로 짓밟는 소리가 들린다.
살롬이 바곳 부인을 올려다봤다.
자신을 향하는 그녀의 무감정한 눈길이 보였다.
“…왜.”
살롬이 애탄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왜…. 난, 난 당신을 위해서….”
“아뇨.”
바곳 부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나를, 희생된 자들을 위해서 이 일을 벌인 게 아니에요.”
“…뭐?”
“당신은 그저 당신 스스로를 위해서 이 일을 벌였어요.”
바곳 부인이 웃었다. 그 서늘한 입가가 살롬의 심장을 찔렀다.
“아닌가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