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뭐라고요?”
요하임이 되물어왔다.
못 들은 건 아니다. 내용이 믿기지 않을 뿐.
하지만 상대가 요하임이기도 하고 상황도 상황이기에 지크는 다시 한번 설명을 하는 수고를 들였다.
“영지에 나돈 전염병은 바곳 부인의 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
사람들이 입을 다문다. 불신이 가득 담긴 눈초리가 지크를 노려왔다. 그 정도로 그의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나마 한스 정도만 놀란 와중에도 얘기는 들어봐야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 이젠 사리분별마저 못 하는구나! 치료약을 제공했다는 공에 취해 눈에 뵈는 것이 없나보지?”
살롬이 비웃었다.
“아니면 이그람을 잡았다는 명성을 독차지라도 하고 싶은 거냐? 마치 자기는 공이 필요 없는 것처럼 말하더니 너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었군. 역시 드라큘 놈들의 편을 들 만해. 아주 잘 어울려.”
“왜 그렇게 발끈해?”
살롬의 비웃음을 지크가 태평하게 받았다.
“꼭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가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살롬의 얼굴이 굳었다.
“…심판의 주체는 나다. 그걸 부정하는 놈이 나타났는데 기분이 좋을 성싶더냐!”
“그러니까 곧 죽어도 전염병은 네가 개발했다 이거지?”
“그렇다!”
“그럼 어떻게 개발했는지 말 좀 해주겠어? 아, 자세한 건 필요 없어. 대략적인 구조나 원리 정도만이라도 괜찮아.”
“…….”
살롬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래? 뭐든 말을 해봐. 그게 말이 된다면 믿어준다니까? 아, 혹시 너도 나처럼 책에서라도 봤냐? 그럼 어쩔 수 없지.”
예전 일을 떠올리며 지크가 이죽였다.
“…설마 정말로….”
요하임이 중얼거렸다. 다른 자들도 살롬이 전염병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자 슬슬 의심의 눈초리를 띄기 시작했다.
“…좋다. 인정하지. 전염병은 그 로브 놈이 가져다준 걸 썼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심판은 내가….”
“이상한데?”
이번에도 지크가 살롬의 말을 끊었다.
마치 코너로 쥐를 몰아가는 고양이처럼 지크는 차근차근 그를 몰아붙였다.
“너무 부인 편을 들어주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겪은 네놈이라면 고분고분 로브 놈이 가져다줬다고 말하기보다는 믿기 싫으면 믿지 말라며 코웃음 쳤을 텐데 말이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즐기고 있었다.
지크의 안 좋은 성격이 또 나왔다며 한스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마음을 놓진 않았다. 저 상태의 지크는 무척 얄밉지만 그만큼 날카로웠다.
“죄책감 때문에 그렇다고 하기도 뭐한 게, 지금껏 바곳 부인에 대해서 너는 분명 일정 선을 긋고 있었단 말이야. 우리가 바곳 부인을 찾을 때 알아서 찾아보라든가 하면서. 그런데 그게 선을 긋는 것처럼 연기하고 있었던 거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지크가 눈을 빛냈다.
“너희 둘이 손을 잡았고, 네가 모든 죄를 뒤집어쓴다. 그리고 바곳 부인은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한다. 애초에 전염병을 개발한 자는 바곳 부인이니 네 그 잘난 심판도 계속할 수 있겠군.”
“헛소리.”
과연 클로베이 같은 연기에 미숙한 놈과는 다르다는 것일까.
살롬의 부정은 깔끔했다. 정말로 바곳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크는 개의치 않았다.
“뭐, 상관없어. 정말로 바곳 부인이 전염병을 퍼뜨린 사람인지 아닌지는 너를 죽인 이후에 천천히 추궁하면 되니까. 기이면 기인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걱정하지 마. 고문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어. 너도 지금 느꼈겠지만 내가 사람 틈 만들고 심리 흔들면서 정보 끌어내는 데는 전문가거든”
지크가 과장스럽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네 말대로 바곳 부인이 아무 관계가 없다면 상관없지만, 만약 너와 그녀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글쎄….”
뒷말을 끈다.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상상의 여지를 남김으로써 상대에게 최악의 상상을 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지크가 웃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빛났다.
“너처럼 복수하고 싶어지는 인간들이 무척 많이 나올 것 같아. 그리고 네가 그랬다시피, 아마도 가해자를 곱게 죽이려 들진 않을 것 같고. 그래.”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일단 나부터 그럴 것 같네. 이 영지에 들어온 이후 전염병 때문에 상당히 고생했으니까.”
“…….”
살롬은 말을 잇지 않았다. 정말로 그레타 바곳과 관련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묵묵히 지크를 쳐다봤다.
“끝내죠.”
지크가 검을 고쳐잡고 일행에게 말했다. 그리고 살롬을 향해 발을 디뎠다.
기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크의 뒤를 따랐다. 일단 이 사태를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 일단 필요없다던 백작님과 그 아들부터 돌려주실까. 그리고 최후의 몸부림을 화려하게 쳐 봐. 최소한의 복수는 했으니 여한은 없을 거 아냐? 더 이상 네가 걱정할 거리도 없고.”
한 발자국을 더 내밀며 지크가 말했다.
“어차피 바곳 부인은 너와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까.”
뿌득!
섬뜩하게 이 갈리는 소리. 동시에 살롬이 움직였다. 침대 뒤 편에 숨겨둔 검을 꺼내 그대로 휘둘렀다.
카아아앙!
마력이 깃든 검과 검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살롬의 검을 막아낸 지크가 씨익 웃었다.
“어라? 왜 그래? 표정이 심각하잖아. 누가 보기엔 약점이라도 찔린 줄 알겠어.”
살롬은 대꾸하지 않았다. 발을 움직여 옆에 있는 침대를 걷어찼다.
휘익!
마력이 담긴 발길질은 육중한 침대를 우습게 들어 올려 지크에게 날렸다.
고작해야 한순간 시야를 가리는 우스운 짓이었지만, 누워있던 영주마저 허공에 떠오른 건 좀 심각한 일이었다.
“아버지!”
요하임이 소리치고 기사들이 움직였다. 하지만 지크는 백작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사들이 알아서 하겠지.’
고작해야 허공에 뜬 사람 한 명 정도 안전하게 받아들이는 걸 어려워할 사람들이 아니다.
콰직!
지크는 시야를 가리는 침대를 통째로 옆으로 날렸다. 단, 그래도 요하임의 아버지라고 영주가 타격을 입지 않게끔 조절은 했다.
시야가 드러나자 살롬이 보였다. 그는 침대가 있었던 바닥에 몸을 욱여넣고 있었다.
‘비밀 통로로군.’
영주 침대 아래에 있는 비밀 통로. 식상하다면 식상한 일이다. 아마 집사로서 일을 하며 알게 되었을 터.
지크가 검을 빈 허공에 찔렀다.
공간 찌르기.
마력이 섞인 날카로운 공기가 검의 앞쪽으로 쭉 뻗었다. 그 사이 살롬은 이미 비밀 통로에 몸을 전부 숨긴 상태였다.
그러나 찌르기가 향한 곳은 살롬의 몸이 있던 곳이 아닌, 통로 근처 바닥이었다.
푸슉!
찌르기가 바닥을 가격했다.
“크윽!”
동시에 살롬의 비명이 들렸다.
지크의 찌르기가 바닥을 비스듬히 관통해 살롬을 찌른 것이다. 상당히 큰 부상을 입었는지 통로 밖으로도 피가 조금 튀었다.
그러나 확실히 끝장내지는 못해 살롬의 기척은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흠, 제법이네.’
집사 일을 하기 전에 능력 있는 기사였다고 했던 소개가 거짓이 아닌 듯 살롬의 실력은 제법이었다.
다리를 절긴 하지만 웬만한 하급 기사보다 몸놀림이 빨랐다.
‘부상 이후에도 훈련은 쉬지 않은 모양이군.’
“놓쳤습니까?”
백작을 돌보고 있던 요하임이 물었다.
“놓쳤다기보단 쫓지 않았다고 해야겠죠.”
“네?”
“어차피 살롬은 바곳 부인에게로 갔을 겁니다. 바곳 부인이 기도실에 있다고 했었죠?”
“그랬죠.”
“가죠. 아마도 그곳에서 모든 게 끝날 것 같으니까요.”
지크의 시선이 요하임을 향했다. 요하임은 잠시 급한 대로 바닥에 눕혀진 백작과 살롬이 도망간 비밀 통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결정을 내린 듯 지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백작의 방에 일단의 병력을 남기고 사람들은 바곳 부인이 있다는 기도실로 향했다.
요하임도 무리 안에 있었다. 역시 브로드에게 업혀 이동하는 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아마도 살롬이 말한, 백작의 충격적인 악행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깊은 고민이나 죄책감에 빠지진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겨를이 아니었다.
“지크 님.”
“네.”
“어째서 바곳 부인을 의심한 겁니까?”
요하임의 질문에 한스, 브로드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귀를 기울였다.
‘애초에 그녀가 페스트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그녀 아니면 살롬이었다.
그러나 지크가 아는 페스트의 인물상에 살롬은 들어맞지 않는다. 그랬기에 자연적으로 바곳 부인을 최유력 용의자로 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크만 알고 있는 사실. 게다가 다른 자들의 눈에 지크와 바곳 부인은 염문설이 나돌 정도로 친하게 지낸 자들이니, 다른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몰랐습니다.”
지크가 태연하게 거짓말을 쳤다.
“몰랐다고요?”
“네. 그저 살롬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거든요. 심판 운운하며 이 정도 사건을 일으켰다면 죄책감을 상당히 깊게 느꼈다는 소립니다. 그런데 그 대표적인 피해자인 바곳 부인을 남 취급한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죠.”
“그건 그렇군요.”
“필요 이상으로 선을 긋는 낌새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확실하지 않죠. 말 그대로 피해자인 그녀가 더 이상 이 일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압박을 좀 해봤더니 냉큼 걸려들더군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조금 더 확신을 얻기 위해 살롬을 압박한 건 사실이었고, 살롬은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그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파악하고 행동했다고요?”
“공자님도 조금만 더 경험을 쌓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지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요하임은 허탈하게 웃었다. 경험을 더 쌓으면 그도 가능할 거라지만, 애초에 지크와 요하임은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난다.
‘이게 박탈감이나 열등감이라는 건가.’
낯선 감정이 느껴진다. 자신을 질투한 비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며 요하임은 한숨 쉬었다.
그들은 얼마 안 가 기도실에 도착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을 병사들이 목이 베인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은 급히 기도실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당장 움직여야…!”
피를 토하는 것처럼 아니, 정말로 피를 토하며 외치던 살롬의 음성이 뚝 끊겼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왔군.”
지크의 공격에 구멍이 뚫린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가 스산하게 지크 일행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뒤,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성물 아래로 그녀가 보였다.
여전히 검정 일색의 옷을 차려입은 여성. 성물을 보며 마치 기도하는 듯 서 있던 그녀가 몸을 돌린다. 얼굴을 가린 면사가 살짝 펄럭였다.
“오랜만입니다, 바곳 부인.”
지크가 손을 흔들자 그녀도 살며시 웃어줬다.
“네. 오랜만에요, 지크 씨. 잘 지내셨나요?”
“사건이 너무 많아서 별로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걱정에 잠까지 설쳤지 뭡니까? 그래서 피부가 상해버렸어요.”
지크의 엄살에 한스의 표정이 볼 만해졌다. 그러나 바곳 부인은 진심으로 걱정되는 듯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저런.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잠이 부족하면 건강에 좋지 않아요. 수면제라도 처방해드릴까요?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거절하죠. 당신의 수면제는 먹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거든요.”
“아쉽네요.”
바곳 부인은 웃었다.
“효과 하나만은 자신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게 잠이든, 죽음이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