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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78화 (78/628)

제78화

“이… 수치도 모르는 것이!”

요하임을 지키고 있던 브로드가 거세게 외쳤다.

아무리 그가 지지하는 사람이 아닌, 솔직히 개인적으로 쓰레기라고 생각하던 비욤이라지만 그래도 영주 가문의 사람이다.

저렇게 병 걸린 짐승처럼 대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수치라.”

내성문에서 노기사들이 지었던 것과 비슷한 웃음이 살롬의 입에 걸렸다.

“…당신이 정말 전염병을 뿌렸소?”

요하임이 물었다.

“그래. 내가 뿌렸다.”

“이유는?”

“심판!”

마치 준엄한 판결을 내리는 군주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발언이 살롬에게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지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저놈은 페스트가 아니네.’

그가 들어 온 페스트는 저런 말을 할 녀석이 아니다.

‘그럼 남은 용의자는 한 명인가.’

지크가 태평하게 그런 분석을 하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됐다.

“심판이라니.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군. 당신이 그 잘난 심판을 내리는 자라면, 심판을 받는 자들은 누구요. 우리 가족?”

“그래. 생각하는 자들은 많지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잔혹하게 심판을 받아야 할 족속들이 바로 너희들이지. 너를 그 로브 놈에게 맡겼던 게 한이다. 너도 내 손으로 심판을 해야 했거늘.”

‘너도?’

요하임은 살롬의 말을 되새겼다.

‘너도’라고 했으니 심판의 대상은 요하임 말고도 더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비욤을 뜻하는 것일 터. 그러나 뭔가 걸렸다.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아버님께서 쓰러지신 것도…!”

살롬이 웃었다. 비열하고 사납게.

“그래. 그것도 내가 했다.”

“이 자식이!”

지금까지 이성을 냉철하게 유지하려 한 요하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그의 분노가 형태가 보일 것처럼 솟구쳤다.

“네 아버지를 이 상태로 만들기까지 정말로 힘들었어. 병신 같은 너희와는 다르게 네 아버지는 정말로 강한 인간이었으니까. 병에 대한 저항력이 상상을 초월하더군. 뭐, 그래도 결국은 이 꼴로 만드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어째서냐! 더 이상 기사로서 일할 수 없던 너를 집사로서 고용까지 해준 분이 바로 아버지시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정도가 있지! 너 같은 놈이…!”

“닥쳐!”

살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은혜? 은혜라고? 네 아버지는 억지로 날 집사로서 잡아둔 것에 불과해! 그런 놈한테 무슨 은혜를 느끼란 거냐!”

“잡아뒀다고?”

“그래! 잡아뒀다! 공범인 내가 함부로 다른 자들에게 입을 열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

공범. 착실한 단어는 아니다.

방금 살롬이 말한 심판이라는 단어와 맞물려 요하임의 생각이 더욱 복잡하게 얽혀 돌아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크큭! 궁금한가? 좋다. 상황도 이 지경이 됐으니 가르쳐 주지. 십여 년 전에 영지에서 전염병이 돈 것은 기억하는가?”

“…기억한다.”

전염병이라는 것은 무슨 몇백 년만에 찾아오는 재앙이 아니다. 꽤 흔하게 발병하고 퍼진다.

하지만 십여 년 전에 퍼진 전염병은 상당히 지독했던 걸로 요하임은 기억했다.

살롬이 누워있는 드라큘 백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시 이 작자는 전염병을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단, 영지에 가해진 타격은 어쩔 수 없었지.”

영민이 죽은 만큼 노동력과 세금이 사라졌고 방역을 위한 비용 때문에 여유자금도 급격히 줄었다. 그 때문에 꽤 많은 빚까지 졌다.

전염병은 잡았지만 후유증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아버지는 훌륭하게 그 위기를 타파하셨지.”

“훌륭하게? 타파?”

살롬의 얼굴이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요하임의 혀를 뽑고 입을 지져 막아 버리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개소리! 네 아버지는 영지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 개 같은 짓거리를 벌였어!”

그건 차라리 고통을 토한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그런 외침이었다.

“당시 퍼진 전염병은 호림이었다!”

호림. 알려진 여러 전염병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지독한 전염병.

전염률, 치사율 모두 알려진 병들 중에서도 상위권을 우습게 찍는 그런 병이다.

게다가 사람은 물론 동물마저도 그 희생자로 삼아버리기까지 하는, 악마의 저주라고까지 불리는 전염병.

“빚 때문에 자금 압박을 받던 네 아버지는 비밀리에 호림으로 죽은 동물의 사체를 수습했다. 그리고 자기가 빚을 진 곳에다 몰래 뿌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비사가 살롬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등허리가 서늘해지고 심장이 쾅쾅 튀었다.

특히 요하임은 마치 숨이 끊어진 시체처럼 백지장 같은 얼굴이 됐다.

“당연히 많은 곳에서 다시 호림이 돌았다! 그것도 네 아버지와 영지를 믿고 거금을 빌려준 곳을 위주로! 당연히 네 아버지가 지은 빚 상당수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고, 영지는 자금 압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거짓말 마라! 그렇게 노골적으로 영주에게 돈을 빌려준 곳들만 병이 다시 돌았다면 당연히 아버지가 의심받았을 거다!”

“네 아버지는 높은 이자율을 감수하고 몰래 돈을 빌렸으니까! 더 이상 영지의 신용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고 변명하면서!”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차용증 같은 것도 쓰지 않았다고?”

“호림이 돌면 그곳은 단 하나의 물건도 빼내지 않고 통째로 불태우는 걸 모르는 거냐! 차용증도 불타는 건물 안에서 같이 불탔다!”

요하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 말대로 이 작자도 바보는 아니지. 자기가 목적한 곳 이외에도 호림을 더 풀었다. 사라져도 영지에는 그다지 타격이 되지 않은 곳에 말이야. 그 정도 되니 사람들은 호림이 다시 한번 발생했다고 생각할 뿐, 누군가 인위적으로 호림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요하임이 기억하기로도 호림은 한 번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한번 기세를 탔었다.

“물론 모든 이들이 죽은 건 아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이들도 있었고 차용증이 남은 곳도 있었지. 백작은 그들에게는 돈을 착실하게 갚았다. 하지만 사라진 빚만으로도 영지는 충분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돈을 많이 빌려줬던 곳이 파산했으니까 말이야.”

이때, 살롬의 목소리가 한층 더 살기를 품었다.

“바곳 상회가.”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전염병을 잡기 위해 커다란 도움을 준 그레타 바곳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과연. 바곳 상회가 망한 이유는 저기 누워있는 영감 때문이란 건가.’

지크가 드라큘 백작을 쳐다봤다.

“웃긴 건 뭔 줄 아나?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 드라큘 영주와의 인맥 같은 이득을 보고 돈을 빌려준 다른 곳과는 다르게 그곳은 철저하게 선의로서 돈을 빌려줬다는 거다. 자신들이 드라큘 영지를 기반으로 성장한 곳이니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고.”

“믿을 수 없다!”

요하임이 부정했다. 처음 듣는 아버지의 부정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살롬은 그의 헛된 희망을 사정없이 끊어냈다.

“그 일을 누가 했다고 생각하지? 왜 영주가 나를 집사로 잡아뒀고, 나이 든 기사들이 내 편을 든 이유를 정말 모르겠단 말이냐!”

“…실행자가 당신들이었군.”

“입이 무겁고 호림으로 죽은 사체를 옮기더라도 병에 잘 걸리지 않는 자들이어야 했으니까. 당시에는 그게 영주를, 영민을, 영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기사는 주군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망집에 사로잡혀 있었고.”

망집. 기사들이 무릇 가져야 할 충성에 대해 그는 그렇게 단언하고 있었다.

“어렸다. 멍청했다. 무식했다. 갖은 욕설을 다 갖다 붙이더라도 모자랄 정도로 그 시절의 나는 구제불능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짓은 사라지지 않아. 그래서 생각했다. 너희들을 심판함으로써 속죄하자고!”

“그런 놈이 마을에다 병을 뿌려서 사람을 죽여대냐?”

침을 튀겨가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살롬에게 지크가 이죽였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이냐! 아무것도 모르면서 드라큘 백작을 칭송하는 어리석은 영지 놈들! 어디 한 번 자신들도 영지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죽어간 자들의 고통을 맛 보라지!”

‘이 자식. 완전히 맛이 갔군.’

지크는 꽤 많은 복수를 봐왔다.

복수라고 해도 다 같은 복수가 아니다.

복수의 목표를 자신에게 피해를 준 자로만 특정하는 복수가 있는가 하면 그 가족, 나아가 그와 인연이 닿는 사람까지 확대하는 복수도 있다.

과정도 마찬가지. 복수의 대상과 똑같은 인간이 되기 싫다며 무관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거나 최소한 그 피해를 줄이려 하는 복수가 있는가 하면, 복수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피해를 마구잡이로 뿌리고 다니는 복수도 있다.

보통 복수의 대상을 넓게 잡는 인간일수록, 그리고 과정의 피해를 무시하는 인간일수록 정신머리가 돌아버린 인간이 많다.

그런 면에서 살롬은 철저하게 정신머리가 돌아버린 자였다.

드라큘 백작이 저지른 일에 충격을 받았던 요하임도 이 일에는 다시 분노를 품었다.

“아무리 아버지를 원망한다 해도 무관계한 사람들까지 그렇게 잔인하게 죽게 하다니! 그들의 고통은 고통 같지도 않단 말이냐!”

“드라큘 백작의 자식인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웃기는구나! 그리고 이건 전부 네 아버지가 저지른 일이 원인이다!”

‘오오, 남 탓도 수준급인데?’

자긴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나대는 그 정신나간 용기가 지크로서는 썩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뿐. 살롬의 편을 들어주거나 하진 않는다. 무엇보다 살롬은 예전 지크에게 일방적으로 시비를 건 적이 있다.

‘내가 전염병을 치료한 것 때문에 계획이 어긋나지 않을까 위기를 품은 거겠지.’

하지만 그 생각이 뭐가 됐든 중요한 건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것 하나뿐.

“그러니까 이 사태를 만든 건 전부 네놈이란 거지?”

“그렇다.”

지크의 질문에 살롬은 간단하게 긍정했다. 그리고 지크를 노려봤다.

“네놈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깔끔하게 복수를 끝낼 수 있었을 것을! 그것만큼은 로브 놈이 옳았어! 너라는 변수를 먼저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날 죽이려 용을 쓴 놈이 그놈이었군.’

하지만 그걸 알아봤자 변하는 건 없다.

“그거 안 됐네. 그런데 어쩌겠냐. 너희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걸.”

살롬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반박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계획을 짰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그 계획을 이끌어나갔건, 결국 계획은 실패했다.

“영주성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치료한 것도 네놈이냐.”

“그렇지. 별것 아닌 병이더라고. 아마추어 수준인 나도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을 정도였어.”

살롬의 자존심을 제대로 깎아내리는 발언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벌게졌다.

거친 호흡소리가 ‘쌔액! 쌔액!’ 방 안을 울렸다.

하지만 분노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인정하마. 네놈의 능력을 내가 잘못 판단했다. 그레타 바곳만 잡아둔다면 더 이상 병을 퍼뜨리는 데 방해는 없을 거라고 여기는 게 아니었어.”

“그 때문에 바곳 부인을 데려갔군.”

요하임이 말했다.

“전염병을 퍼뜨리는데 방해물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니까. 그 지식은 솔직히 나로서도 놀라웠다. 설마 그 바곳 상회의 사람이 가장 큰 방해물이 될 줄은 나도 예상 못 했지.”

“부인은 어떻게 됐나.”

“알아서 찾아봐라.”

퉁명스럽게 말한 살롬이 한탄했다.

“아쉽구나. 정말 아쉬워. 아직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 남았거늘. 고작해야 백작과 장남을 심판한 것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이 자식이! 당장 백작님과 첫째 공자님을 놔 드려라!”

진실은 진실이고 현실은 현실인 법. 일단 둘을 구하기 위해 브로드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마음대로 가져가라. 어차피 이놈들은 늦었다. 이 상태로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거기 있는 변수가 아무리 높은 의료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이 병은 치료하지 못한다.”

살롬이 음습하게 웃었다. 너무도 통쾌하고 시원한 감정이 느껴진다. 그의 증오는 진짜였다.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병이니까. 그 어떤 대단한 자가 온다 해도 이 병은….”

“제가 만든 것도 아니면서 더럽게 말 많네.”

병을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듯 주저리주저리 지껄이던 살롬의 말을 지크가 끊어버렸다.

“뭐라고?”

“네놈이 만든 병도 아닌 주제에 왜 그렇게 자랑질을 못 해서 안달이냐고.”

살롬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무슨 헛…!”

“공자님!”

살롬이 분노를 터뜨리기 전, 한 병사가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기도실에서 바곳 부인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의 안색이 환해졌다.

이그람을 진정시킨 공로가 크기에 요하임은 내성에 돌입할 때 우선적으로 보호할 대상자로 그녀를 지목했었다.

거기에 지금 들은 바곳 상회의 비사로 그녀에 대한 동정심과 죄책감이 크게 생긴 상황.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가족 일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지크는 좀 달랐다.

“기도실을 봉쇄하세요. 절대 그녀에게 접근하지 말고요.”

뜬금없는 지크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전염병을 만들고 뿌린 자는 저기 있는 집사가 아닙니다.”

크게 눈을 뜨는 살롬에게 지크는 보란 듯 웃어줬다.

“아마도 그녀, 그레타 바곳이 원흉일 겁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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