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지크와 요하임 일행은 전투 장소에 도착했다. 요하임 쪽 기사와 병사들이 내성을 포위하고 내성문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좁은 입구를 이점 삼아 저항하고 있는 비욤 측의 기사들도 끈질겼다.
“요하임 공자께서 오셨다!”
브로드가 커다랗게 외쳤다. 요하임 측 기사와 병사들이 환호했다.
요하임은 이미 브로드의 등에서 내린 상태였다. 원래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가 감옥에 갇혀 더더욱 쇠약해진 그였지만, 그는 티내지 않았다.
어깨를 쭉 펴고 눈에 힘을 줬다. 브로드가 새삼 감탄의 눈빛을 흘릴 정도였다.
“전투를 멈춰라!”
마력이 실린 커다란 음성은 아니다.
하지만 목소리에 실린 강렬한 카리스마는 사람들을 통제하기에 충분했다.
요하임을 따르는 자였든 따르지 않는 자였든 감탄을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권력다툼을 싫어해 뒤로 물러나 있던 요하임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요하임은 부축하려는 브로드를 뿌리치고 내성 앞까지 걸었다.
그가 가는 길마다 기사와 병사가 분분히 길을 열었다.
그는 내성문 바로 앞에 멈췄다. 그리고 입구를 지키는 자들을 쳐다봤다.
“…오랜만입니다. 카를로웬 경.”
“오랜만이군요. 요하임 공자.”
백발이 성성한 노기사가 요하임의 인사를 받았다.
“지금 그 무리는 카를로웬 경이 이끄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항복해주지 않겠습니까?”
요하임의 투항 요구.
하지만 카를로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실망입니다, 카를로웬 경. 그대들도 비욤이 병을 퍼뜨려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최측근으로서 영지를 위해 움직이던 과거의 그대는 거짓이란 말입니까?”
요하임은 분노보다 안타까움이 더 컸다.
그로스 카를로웬. 드라큘 영주의 최측근으로서 청렴하고 충성스러우며 무엇보다 강하다.
드라큘 영지 기사들의 우상으로서 존경받아온 그가 비욤 같은 인간의 편을 들다니.
“비욤. 비욤. 비욤이라.”
카를로웬이 비욤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린다.
그의 입가가 비뚤어졌다. 시니컬하게 그리고 자조적으로.
“내가, 아니 우리가 그 돼지 새끼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주변이 술렁였다.
돼지 새끼. 적어도 모시는 주군에 대해 할 말은 아니다.
그 거친 발언은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비욤을 따르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럼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는 겁니까! 설마 이게 아버님의 의지라는 소리는 아니겠죠?”
“쓰러져 있는 영주님의 의지를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이미 반 시체나 다름없는, 죽을 날만 받아놓은 사람이거늘. 혹 아들이신 공자님은 알고 계십니까?”
아니다. 저건 카를로웬이 아니다. 비욤은 그렇다 치고 평생을 따르던 드라큘 영주마저 조롱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기사든 병사든 가리지 않고 경악했다.
그저 길이 달라졌을 뿐, 카를로엔이 적어도 드라큘 가문에 충성을 한다는 것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충성도 명예도 없구나! 어찌 그렇게 타락하셨단 말입니까!”
요하임이 크게 질책했다.
카를로웬의 안색이 변했다.
조롱이 묻어났던 옅은 미소가 사라지고, 얼음보다 시린 살기만이 남았다.
“…명예? 지금 그리 말하셨소, 공자?”
“그렇습니다!”
카를로웬이 웃었다. 아주 크게.
마치 자신의 안의 울분을 모두 쏟아붓는 듯한, 조롱, 분노 그리고 자조가 느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어찌 웃으시오!”
브로드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외쳤다.
한때 존경하던 자가, 자신이 모시는 자를 열렬히 비웃고 있는 상황이 그의 마음에 거센 풍랑을 일으켰다.
“브로드 경. 자네는 젊지. 우리 늙은이들과는 달라.”
카를로웬이 이끄는 무리는 전부 나이가 있는 자들이었다. 그 경험과 연륜은 무척이나 뛰어나 요하임의 병력이 쉽게 내성문을 공략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거칠 것 없고, 자신감이 넘치며, 향상심이 있지. 그리고 아무것도 몰라.”
“뭘 모른다는 거요!”
“됐네. 어차피 계획이 일그러진 것. 우리는 여기서 죽겠지.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네. 나머지는 우리 뒤의 인간에게 물어보게나.”
그리고 카를로웬은 검을 겨눴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명확한 의지였다.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요하임의 병력은 쉽사리 내성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방금까지야 전투의 열기에 휩싸여 일단 칼부터 들이대고 봤지만, 어쨌든 원래는 같은 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내성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자들은 기사들의 존경을 받던 원로 기사들. 실력 때문이든 정 때문이든 상대하기 무척 껄끄러웠다.
하지만 계속 이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제가 가죠.”
요하임이 전진하라 명령을 내리려 할 때, 지크가 나섰다.
“상당히 존경받는 자들 같으니, 면식이 없는 제가 나가는 게 나을 겁니다.”
“상대는 드라큘 영지의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 기사입니다.”
“괜찮습니다.”
요하임의 걱정을 달랜 후 지크가 노기사들에게 다가갔다.
카를로웬의 눈에 불이 번쩍였다.
“네가 계획을 일그러뜨린 그 이물질이구나.”
“댁들과는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어.”
정보를 캐낼 이유가 없는 자들. 지크는 검을 겨눴다.
드라큘 영지의 최강의 기사들이라곤 하지만 미헨 타이너나 대니 크리스넌 같은, 스틸월 영지의 최강 기사들과 비교할 바는 아니다.
스틸월 영지는 왕국의 강철벽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집단이다. 그곳에 비하면 드라큘 영지의 기사들은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상당한 차이로.
탓!
지크가 내성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를 노리고 검들이 찔러져 들어왔다.
노련하고 정확한 검술들. 나이가 들어 근력은 조금 떨어졌을지 몰라도 많은 지배 마력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얻은 기술로 젊은 기사들을 손쉽게 다룰 수 있는 게 바로 노년의 기사들이다.
그러나 지크는 달랐다. 마력은 노기사들보다 비슷하거나 적다. 그러나 근력은 젊은 지크가 높았으며, 경험과 기술은 월등했다.
차차차창!
기계 같은 노기사들의 검을 물처럼 흐르는 지크의 검이 모두 튕겨낸다.
노기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들도 기술에서 자신들이 밀린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스틸월 영지 같은, 전쟁을 밥먹듯 하는 곳의 인간이 아니라지만 그들도 평생 칼밥을 먹고 살아온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척 보기에도 새파란, 젊다 못해 어린 인간에게 기술로 밀리다니.
그러나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캉! 캉! 카카캉!
지금껏 노기사들이 요하임의 병력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게 만들었던 내성의 좁은 입구가 이번엔 노기사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물론 그래도 한 성의 입구인 만큼 일반적인 입구보다는 훨씬 넓다. 그러나 그걸 커버하는 것 또한 기술과 경험.
지크는 효율적으로 입구의 너비를 활용하고 있었다.
“이 노오오옴!”
하얗게 바랜 콧수염이 인상적인 기사가 지크에게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허무하게 빗나갔다. 그리고 그 대가를 받았다.
콰직!
“크아악!”
마력이 살벌하게 흐르는 지크의 검이 갑옷마저 베어 가르며 콧수염 기사의 가슴 어림을 베어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콧수염 기사가 물러선다. 다른 기사들이 그를 구하려 급히 지크에게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지크의 행동이 한 발 더 빨랐다.
푸슉!
콧수염 기사의 얼굴에 지크의 검이 꽂혔다. 그가 검을 떨궜다.
“이 자식이!”
동료의 죽음에 노기사들이 분노했다. 조금이지만 기세가 흐트러졌다. 요하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전진해라!”
단 한 명의 죽음이었지만 어쨌든 노기사들의 전력이 깎인 상황. 게다가 요하임은 그의 죽음으로 기사와 병사들을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무리 적이 됐다지만 상대는 우리가 존경하던 선배 기사들이다! 그들의 죽음을 다른 이의 손에 맡길 셈인가!”
기사들과 병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무기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비욤과는 다르군.’
카를로웬은 요하임을 쳐다봤다. 능숙하게 기사와 병사의 주저함을 물리친 드라큘 백작가의 둘째.
병약하지만 않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후계의 자리는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하나 의미 없다.’
지금 생각할 일이 아니다. 지금은 그저 자신들의 최후를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다.
요하임의 병력이 들이닥쳤다. 장창이 그들을 견제하고 기사들이 요소요소 검을 찔러 넣는다. 노기사들은 온 힘을 다해 맞섰다.
그러나 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기사와 병사 사이에서 적절히 활동하는 지크의 공격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거기에 지크의 도움으로 좁은 곳에 모인 병력이 서로를 방해하는 일조차 없었다.
명령을 내린 건 아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병력이 자연스레 움직인 것뿐이다.
‘어찌 저런 게 가능하단 말이냐.’
카를로웬이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을 정도로 지크의 움직임은 대단했다.
퍽! 서걱!
갑옷이 우그러지고 몸이 베인다. 노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카를로웬의 목마저 굴러떨어졌다. 내성문이 함락됐다.
“진격해라!”
요하임이 소리쳤다.
“들어가서 비욤 드라큘과 베스놀 살롬을 찾아라! 영주님께는 내가 가겠다!”
병력이 내성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요하임도 브로드와 몇몇의 기사와 함께 내성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지크도 요하임과 합류했고 한스도 지크의 곁에 따라붙었다.
그들은 곧바로 영주의 침실로 향했다. 반항하는 자들은 내성문에서 그들을 막아선 노기사들이 끝이었는지 더 이상 방해하는 자들은 없었다.
계단을 한순간에 뛰어넘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화려하게 꾸며진 방문이 나왔다.
콰앙!
브로드가 방문을 걷어찼다. 경첩이 떨어져 나가고 문짝이 구겨져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방의 전경이 드러났다.
소란스러운 성안과는 다르게 영주의 방은 평온했다. 여전히 화려하고 깔끔하다.
침대 위로 안색이 좋지 않은, 그러나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영주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침대 뒤편에서 나타난 존재에 다시 경계심을 올렸다.
“…결국 도착했군.”
“살롬…!”
브로드의 등에서 내린 요하임이 그를 노려봤다.
“그래, 요하임 공자. 당신이 여기 있는 걸 보면 그 멍청한 로브 놈은 실패한 모양이지? 타락을 시키네 뭐네 요란하게 지껄이더니 결국 그놈도 말밖에 없는 놈이었군.”
“…형님은 어디 있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형제에 대한 우애가 남아있나? 눈물겨운 형제애군. 축사에 있는 돼지들도 댁들을 보고 감탄하겠어.”
이죽이는 모습이 비욤을 받드는 모습은 절대 아니다.
“카를로웬 경이 말했지. 자신들은 형님을 따르지 않는다고. 당신도 그들과 같은 것 같구려.”
“…그들은?”
“죽였소.”
“…그런가. 죽었는가.”
살롬이 조금 슬픈 기색을 보였다.
주군 가문의 사람을 대할 때와는 천지차이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기색은 오래가진 않았다.
“…조금 감상에 잠겼군. 비욤 드라큘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나? 못 가르쳐줄 것도 없지.”
살롬이 허리를 굽혀 침대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무언가가 질질 끌려나왔다. 마치 도축된 고깃덩이를 다루는 것만 같은 거친 손길.
그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것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지크 일행은 저런 몰골을 한 인간을 본 적이 있었다. 한창 지독한 전염병이 도는 마을의 병자들이 바로 저런 모습이었다.
“여기 있네. 인사라도 하게나.”
“우, 으, 으어어….”
비욤이 신음을 흘렸다. 극도의 고통에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는 그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형님?”
“그래. 이게 당신의 형님이야.”
살롬이 발끝으로 비욤을 툭툭 두드렸다. 뭍으로 끌어올려져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물고기처럼 비욤이 움찔거렸다.
영주성에 전염병을 퍼뜨린 자. 요하임은 얼마 전까지 그게 비욤인 줄 알았다.
하나, 노기사들의 말과 눈앞의 상황을 보고 이제야 진상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었군, 살롬! 당신이 이 모든 것의 배후였어!”
“알아채는 게 너무 늦었어, 요하임 공자.”
살롬은 태연스레 인정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