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이 자식이!”
“그래! 그거야! 사람이란 그렇게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야지!”
사내를 보며 지크가 낄낄 웃었다.
이를 갈면서도, 사내는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이번 계획은 완전히 박살났군.’
게다가 일반적인 계획이라면 모를까, 자그마치 요하임 드라큘을 마인화 시키는 일을 실패했다. 그것도 자신들의 조직과 계획의 면모가 일부 드러나면서까지.
‘일반적인 변수가 아니었어.’
사내는 지크를 노려봤다.
변수를 극히 싫어하는 사내인지라 처음부터 저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러나 그 이물질은 공격에서 끝끝내 살아남더니 결국은 계획을 박살내버렸다.
‘납치할 수 있을까?’
뭘 얼마나 더 알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변수의 실력과 지원군을 생각하면 무리겠지.’
사내는 안타까웠다. 아까 바깥에서 희미하게 전투 소리가 났을 때 저 이물질을 쓰러뜨린 후 끌고 갈 것을.
‘확실하게 변수를 잡으려 시간을 끈 게 패인이군.’
사내는 지원군이 오면 지크를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해 시간을 끌었다. 설마 적의 세력이 영주성의 외곽과 감옥을 접수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몸을 뺄 수밖에.’
계획이 무너진 이상, 지크라는 변수가 조직과 계획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상부에 알려야 했다.
“어이쿠! 몸을 빼려고?”
눈치 빠른 지크가 낌새를 알아챘다.
사내가 움직였다.
챙강!
지금껏 요하임의 자유를 속박해온 쇠창살이 너무나 쉽게 잘려나갔다.
감옥 안으로 사내가 뛰어들었다.
요하임을 인질 삼아 이곳을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스녹!”
지크가 스녹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동시에 지하 감옥이 크게 흔들렸다.
콰아앙!
요하임이 있던 감옥이 붕괴했다. 엄청난 양의 토사와 낙반이 감옥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고, 공자님!”
한스, 스녹과 같이 왔던, 요하임을 따르는 드라큘 영지의 기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지크 님!”
기사들을 이끌던 브로드가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도 스녹이 대지의 힘을 다룬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 지금의 붕괴가 누구의 작품인지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공자님은 무사하시니까요.”
“무사하시다고요?”
쿠쿠쿵!
다시 한번 땅이 진동했다.
하지만 이번 진동은 가벼웠다. 브로드의 발치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마치 수면에서 떠오르듯, 그 물결치는 땅에서 요하임이 솟아났다.
“공자님!”
브로드가 요하임에게 달려갔다. 요하임의 표정이 멍했다. 마치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어, 네에.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의심스러운지 몸 여기저기를 만진다. 하지만 감옥에 갇힐 때 저항하다 생겨 슬슬 곪아가는 상처 말고는 새로 생긴 상처는 없었다.
“잘했다, 스녹.”
잘한 일에는 칭찬을. 지크는 자신의 명령을 완벽히 수행한 스녹을 칭찬했다.
스녹은 노웸을 안고 쑥쓰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가 웃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리고 지금부터도 잘 상대해라.”
“네?”
콰아앙!
스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감옥 안으로 쌓인 낙반이 터져나갔다.
“크으! 크으으!”
거친 숨소리가 감옥 안을 메운다. 낙반을 부수고 던지며 그건 기어나왔다.
“…저건 뭡니까?”
요하임이 물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놀란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사람이 정체모를 괴물을 보는 시선을 보냈다.
오직 지크만이 태연했다.
“아까 그 로브 뒤집어쓴 놈입니다.”
“저게 말입니까?”
“그놈 맞습니다. 생명 같은 것을 깎아서 일시적으로 힘을 얻는 거라고 추측 중이죠.”
“상당히 잘 알고 계시군요.”
“예전에 저런 놈과 동류의 놈을 상대해 본 적이 있거든요. 거기에 저 놈, 예전에 클로베이 경이 이끌던 암살자 놈들의 대장놈입니다.”
“…역시 그 습격도 형님과 연관이 있었군요.”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충격을 안 받을 수 없다.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은 것일까. 그렇게 권력이 소중했던 것일까. 요하임은 분노를 넘어 이제는 허탈함까지 느꼈다.
하지만 지크는 그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글쎄요. 정말 비욤 드라큘 공자가 주동자일까요.”
“…형님이 주동자가 아니란 겁니까?”
“일단 올라가죠. 이미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으니 끝장을 보셔야죠. 끝장을 보다 보면 모두 밝혀지겠죠.”
지크가 말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지크였지만 지금 대답해줄 것 같지는 않다. 요하임은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이미 상황이 제가 무릎 꿇고 빈다고 끝날 상황은 아닌 것 같군요. 해보죠.”
이미 비욤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조차 무너진 지금, 요하임도 이 반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게 비록 그가 정말로 싫어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라고 하여도 이미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일단 저 자부터 처리해야겠군요.”
요하임이 이제는 괴물이 된 것을 쳐다봤다.
척 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외견이 무척 껄끄러웠다.
그러나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다급한 것도 아니지만 여기서 너무 시간을 끄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올라 가죠.”
“그럼 저 자는 어떻게….”
“스녹이 상대할 겁니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로 지크가 괴물을 자신에게 떠넘기자 스녹이 경악했다. 턱이 떡 벌어진 폼이 여간 충격을 받은 게 아니었다.
“가죠.”
하지만 지크는 스녹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망설였다. 누가 봐도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남겨두려는 자가, 촌티가 풀풀 나는 소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단호했다.
“스녹이면 충분합니다.”
요하임은 잠시 지크의 눈을 들여다봤다. 마치 진의를 탐색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그를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갑시다!”
요하임이 그렇게 정하니 다른 기사들이라고 별말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시간이 급한 건 사실이다.
“부탁하네.”
브로드가 스녹의 어깨를 두드린 후 요하임을 둘러업고는 통로를 달렸다. 그의 뒤를 따라 사람들이 우르르 떠나갔다.
“어? 어?”
갑자스럽게 웬 괴물 같은 놈을 상대하게 된 스녹은 그 뒷모습을 보며 어버버 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스마저 불쌍하다는 눈길을 던지면서도 먼저 지상으로 올라간 후, 마지막으로 남은 지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스녹!”
“네, 넵!”
스녹이 눈을 빛냈다. 지크가 뭔가 조언을 해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시 지크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자신을 저런 괴물하고 맞붙일 리 없다며 안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믿음이란 배신당하는 법이다.
“죽여도 상관없다!”
“…네?”
정말로 본능적으로 나온 의문성.
하지만 그 무기력한 음성은 지크에게 별 울림을 주지 못한 모양이다.
엄지까지 세워준 후, 지크는 다른 이들을 따라 바깥으로 향했다.
남은 건 스녹과 괴물뿐.
“…크흐!”
흐릿한 비웃음을 흘리는 괴물을, 스녹이 어색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 * *
“저기, 정말로 괜찮을까요?”
지하 감옥을 나오는 계단에서 한스가 지크에게 물었다.
그래도 스녹을 후배랍시고 챙겨주던 그다. 계속해서 지나온 곳을 돌아보는 걸 보니 퍽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같은 의문을 가진 요하임과 다른 기사들도 그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걱정 마라. 아무 생각 없이 떠넘기고 온 건 아니니까.”
“스녹이 그 괴물보다 강하단 말씀입니까?”
“아니.”
기대를 담아 물었던 한스는 지크의 칼 같은 부정에 실망했다. 그리고 대체 뭘 믿고 스녹을 남겨두고 온 것인지 조금 화가 났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환경이 따라주면 얘기는 달라지지.”
“네?”
“노웸이 어떤 환수인지 기억 안 나냐?”
“분명 대지의….”
한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감옥은 지하에 있었다. 요하임이 갇혀 있던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다. 즉, 사방이 땅으로 이루어진 곳이란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요하임 공자를 구해낼 때도….’
천장을 무너뜨리고 지면을 통해 요하임만 빼왔던 스녹의 능력. 한스도 상당히 감탄하지 않았던가.
한스가 납득한 걸 확인하고 지크는 다시 전면을 바라봤다.
‘회귀 전에 대지의 폭군 노웸이 광산 안에 처박히면 그 어떤 놈들도 들어가길 꺼려했지.’
지하는 말 그대로 노웸의 홈그라운드였다.
콰앙!
‘시작됐군.’
* * *
“어, 그, 어, 어떡하지, 노웸?”
노웸을 꼭 껴안은 채 어수룩한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는 스녹. 하지만 그런 스녹과는 다르게 사내는 이 상황이 너무나 흡족했다.
‘멍청한 놈! 고작 저런 놈 하나가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지크를 비웃었다. 자신을 얕본 것 같아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상하지만 자존심만으로 움직이기엔 그는 너무나 조직에 충실했다.
스녹 한 명을 남겨놓고 나머지 사람들이 철수한 지금 상황은 탈출을 꾀하던 그에게 너무나 좋은 상황이었다.
대화를 할 필요조차 없다. 혹시 밖으로 나간 놈들이 감옥 바깥에 포위망을 칠지도 모른다. 바깥의 사정을 모르는 이상 움직이는 시간은 빠를수록 좋다.
스녹을 피떡으로 만들고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사내가 움직였다.
쿵!
발구르기 한 번에 그의 몸이 쏜살같이 뻗었다.
스녹을 박살내는 데는 주먹 한 방이면 충분해 보였다.
오산이었다.
콰앙! 콰앙!
땅과 벽, 천장에서 일제히 기다란 돌기둥이 튀어나왔다.
보통의 기둥보다 훨씬 더 단단한 그것들은 격자처럼 교차되며 사내의 공격을 막았다.
‘뭐!’
콰아앙!
사내가 주춤한 틈을 타 이번엔 지면이 터져 나오며 돌덩이들을 빠른 속도로 내뱉었다.
사내가 급히 천장으로 뛰었다. 하지만 그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콰직!
“크악!”
천장에서 튀어나온 돌창이 사내를 찔렀다. 급히 몸을 회전시켜 돌 창을 박살냈지만 이미 몇 개가 몸을 꿰뚫은 후였다.
턱!
사내가 거리를 벌렸다.
이미 그에게 스녹을 경시하는 마음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거리를 벌려봤자 대지의 권능 그 자체를 사용하는 스녹에게 있어서는 사내가 서 있는 곳조차 사거리 안이었다.
‘이 사람….’
위기감을 급격하게 안은 사내와 다르게 스녹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다.
‘생각만큼 위험하진 않은 것 같은데?’
* * *
“사정을 설명해 주시죠.”
브로드에게 업혀 있던 요하임이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물었다. 브로드가 악물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협박당하고 있었습니다.”
“협박이요?”
“기사, 병사를 가리지 않고 영주성의 모든 인간들과 그 가족이 전부 전염병에 걸렸었습니다.”
요하임의 머릿속에 아까 로브의 사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형님이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게 사실이었나 보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아까 로브를 입은 사내가 그렇게 말하더이다.”
“아직 확정적인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를 협박한 인간이 살롬 그 인간이었으니 비욤 그 인간의 짓이 맞을 겁니다!”
이제는 비욤에게 존대조차 붙이지 않는다.
요하임도 타박하지 않았다. 그도 지금 비욤을 부를 때 형님은커녕 온갖 쌍욕이란 쌍욕으로 비욤이란 이름 앞 수식어를 도배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그 때문에 비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단 겁니까?”
“네. 저를 비롯한 몇 명은 저항했습니다만, 이미 대세가 넘어간 터라 일단 고개를 숙이고 상황을 보고 있었습니다.”
변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하임은 개의치 않았다.
“그럼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된 겁니까?”
“지크 님이 치료약을 가져다줬습니다.”
브로드의 눈에 존경의 감정이 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평소 지크를 그냥 ‘지크’라고 부르던 브로드가 지금은 ‘님’이라는 존칭어를 붙이고 존대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치료약 덕분에 기사와 병사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병에 감염돼 협박을 당하고 있던 건 비욤을 따르던 이들도 마찬가지라 그들도 우리 편에 규합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건 공자님께서 이들을 이끄시는 것뿐입니다!”
요하임이 지크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 의문이 가득했다. 갑자기 어디서 치료약이 났으며 어떻게 이들이 병에 걸려 협박을 당하고 있는 걸 알아차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크가 눈을 찡긋거리는 걸 보고는, 헛웃음 한 번에 의문을 날렸다.
‘설명은 나중에 듣는다.’
요하임이 그들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영주성을 바라봤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비명소리가 그곳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비욤의 세력이 우리 쪽으로 전향했다면 지금 반항하는 자들은 누굽니까?”
“비욤의 일부 세력은 우리 쪽으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 와중에도 그쪽 편을 들고 있습니다!”
전염병을 퍼뜨린 놈들과 손을 잡고 있는 놈들이라니. 요하임이 이를 부득 갈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