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요하임은 눈을 떠 철창 너머에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형님이 어떻게 영주성의 사람들을 휘어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경계는 아주 형편없군.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자가 영주성의 중죄인을 가둬두는 감옥에까지 들어오다니.”
아닌 게 아니라 요하임을 찾아온 자는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빛 하나 들지 않은 이런 감옥에까지 로브를 푹 뒤집어쓴 인간이 수상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내는 대꾸를 하지 않고 들고 온 횃불을 벽에 달린 고정대에 매달았다.
사내가 한 걸음 더 창살로 다가왔다.
그는 몸집이 컸다. 비쩍 말랐을 뿐 키는 큰 요하임보다 머리 반 개는 더 있었으며 로브 너머로 보이는 몸집은 요하임과 비교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우락부락했다.
그러나 요하임은 겁먹은 기색 없이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대단하군. 아직까지 눈빛이 죽지 않았어.”
“헛소리 말고 본론만 말해라.”
대부분의 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요하임이 거침없이 반말을 한다. 그만큼 심기가 뒤틀려 있다는 증명이었다.
얘기를 나누는 상대가 정체불명의 인물인 것도 한몫을 했다.
“그러지.”
사내도 말을 많이 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일그러진 걸 고치고 싶지 않나?”
“일그러진 것?”
“지금의 드라큘 백작가 말이다. 설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드러누운 영주, 권력에만 관심이 있는 후계자, 그리고 그 후계자에게 목줄을 잡힌 듯한 가신들. 현재 드라큘 영지는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다.
“정상이라고 할 순 없지. 그래도 너 같은 수상쩍기 짝이 없는 인간마저 드라큘 영지를 걱정할 줄이야.”
“당연히 나도 나름의 목적이 있다. 그러니 대답해라.”
“방법은?”
로브의 남자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그의 손에는 주먹 절반 정도 크기의 구슬이 들려있었다.
아주 새빨개서, 마치 피를 응축시켜놓은 것 같은 그런 구슬이었다.
피에 진저리를 내는 요하임이 본능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눈을 떼지는 않았다.
“‘블러디 베슬’이라고 하지.”
“불길해 보이는 물건이군.”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지금껏 무뚝뚝하게 말하던 사내의 목소리에 음습한 즐거움이 섞였다.
“이걸 네 몸에 흡수해라. 그렇다면 넌 거대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다. 그래, 널 무시한 것으로도 모자라 끝내 죽이려는 형과 그 형의 명령에 아무런 의문 없이 따르는 놈들을 전부!”
요하임은 블러디 베슬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을 빨리 흡수하라는 것처럼 그건 횃불을 반사해 요염하게 빛났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사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거절한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단호한 대답.
사내의 로브 속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째서지?”
“난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도움을 주는 정체불명의 요정을 믿지 않아서 말이야. 나이를 먹었거든.”
“설마 누군가 너를 여기서 꺼내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네가 묵묵히 버텨봤자 돌아오는 건 교수형에 처해질 운명뿐이다. 어차피 끝장난 인생, 그 정체불명의 요정을 한 번 믿어봐도 나쁠 건 없지 않나?”
“그 요정이 준 선물이 내 목숨 하나 끝장내는 정도라면 당장 잡겠는데, 그 민폐가 어디까지 퍼질지 모르겠거든.”
그리고 요하임은 덧붙였다.
“애초에 그 선물을 주는 게 요정이라는 것조차 의심스러워. 그 어떤 동화에도 로브를 푹 뒤집어쓴 덩치 큰 요정은 본적이 없으니까.”
“…….”
사내는 요하임을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철창을 잡아 뜯고 감옥 안으로 들어가 요하임의 멱을 뜯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됐다.
다른 놈들이야 솔직히 몇몇쯤은 실패를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눈앞의, 요하임만은 달랐다.
그는 그들 조직의 계획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비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앞뒤 안 가리고 ‘블러디 베슬’을 받아들였을 텐데.’
지방의 일은 그럭저럭 잘 진행됐지만 오스프린에서 일이 틀어졌다. 설마 그 짧은 시간 안에 이그람을 잡아버릴 줄이야.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요하임은 이그람을 잡을 수 없어야 했다. 그 와중에 영주성에서 지원을 끊는 등의 방해공작을 실행했다면, 요하임은 더더욱 자신의 능력에 절망했을 테고 비욤에 대한 원한은 더욱 불태웠을 것이다.
복수의 힘을 준다고 했을 때, 논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그게 전부 변수 때문에 날아갔어!’
지크라고 불리는 변수를 생각하면, 감정표현이 별로 없는 사내조차 이가 갈렸다.
하지만 일은 진행돼야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을 ‘올바른 길’로 수정하려 파견되는 자들이 바로 사내 같은 자들이었으니까.
“이대로 가다간 드라큘 영지의 미래가 어둡다 해도 말이냐.”
요하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느다랗게 뜬 그의 눈은 일점 흔들림이 없었다. 그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수행자같다.
그러나 사내의 패도 만만한 건 아니었다.
“너는 지금껏 온갖 질병을 겪었지. 이 세상에 등장하지 않은 지독한 전염병을, 그것도 한 번에 여러 종류나 말이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지.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무슨 음모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거다.”
동시다발적으로 나라의 모든 마을에 벼락이 내리쳐 마을이 모조리 타버린다고 해도 그게 누군가의 음모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엮여봐야 신의 분노 정도일 터.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얼마나 대단한 음모든, 그걸 짜는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전염병을 마음대로 다루는 인간이 있다면?”
“!!!”
이것에는 요하임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가능할 리 없다며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선뜻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염병의 확산을 인간의 능력으로 끌어내리는 순간, 지금껏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든 것들의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설마 너희가?”
“아, 정확히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작은 도움을 주고 있을 뿐.”
요하임이 반응을 보이자 사내는 기뻤다. 그러나 티를 내진 않고 더욱 요하임의 감정을 어지럽히려 들었다.
“직접적으로 그 녀석과 손을 잡은 건 네 형님 쪽이지. 하지만 권력자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정말로 무서워.”
사내가 말했다.
“동생 하나 죽이자고 마을 몇 개를 전염병으로 초토화시키다니 말이야.”
뿌득!
요하임의 이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사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넌 죽지 않았지. 결국 녀석은 오스프린에까지 전염병을 풀어버렸다. 물론 아무리 녀석이 권력에 눈이 멀었다 해도 오스프린마저 날려버릴 미친놈은 아니었던지 조금은 약한 전염병인 이그람을 풀었지. 그 와중에 뭔 수작을 부리려던 것 같다만, 네가 이그람을 잡아버리는 바람에 계획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결국 지금 널 잡아 가둔 것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모양이야.”
요하임의 초췌한 얼굴이 더욱 수척해진 듯 보였다.
“어떤가. 아직도 결정은 바뀌지 않았나? 비욤 드라큘이 백작에 오른다면 네가 겪은 지옥이 계속해서 펼쳐지겠지. 권력욕만 많은 돼지 놈이니 그 지옥이 세계로 뻗어나갈지도 모른다. 그런 지옥이 확정적인데, 그저 불안감만으로 일그러진 현실을 바꿀 기회를 날려버릴 텐가.”
“…네놈은 형님에게 도움을 주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나?”
“필요에 의해서일 뿐이다. 영원한 협력자는 아니지. 그리고 네 형님과 협력할 시기는 지났다.”
요하임의 시선이 사내가 들고 있는 ‘블러디 베슬’에 꽂혔다.
만약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저 백작가의 권력다툼만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솔직히 믿기 힘든 사내의 말이었지만, 요하임이 겪은 현실을 생각해보면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내가 재촉했다.
“어쩔 거지? 받을 건가? 아니면 받지 않을 건가?”
마치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 같다.
요하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간의 고민. 결국 결정을 내린 요하임이 대답을 하려던 때였다.
“좋아 보이는 물건인데? 나한테도 구매할 기회를 주지 않겠어?”
흠칫!
사내가 깜짝 놀랐다. 블러디 베슬을 품 안에 집어넣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경계했다.
어둠이 쌓인 통로 저편으로부터 발소리가 들린다. 얼마 안 있어 발소리의 주인이 횃불의 빛 안으로 들어왔다.
“…지크 님?”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요하임이 놀랐다.
“안녕…하시진 못한 것 같군요, 공자님.”
요하임의 몰골을 보고 지크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여긴 어떻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답답하길래 그냥 밀고 들어 왔습니다.”
“미, 밀고 들어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온화한 어조는 아니다. 설마 진짜로 개인 무력으로 영주성의 담을 넘은 것인가.
아니, 말하는 투로 보건대 담을 넘은 정도의 온건한(?) 방법을 쓴 것 같지도 않다.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공자님과의 대화는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죠.”
지크가 사내를 쳐다봤다.
“먼저 말을 나누고 싶은 자가 있거든요.”
“…네가 지크인가.”
“그래, 내가 지크다. 그런 넌 암살자 놈들의 우두머리 맞지?”
기세, 분위기 그 모든 것이 일반 암살자들과는 달랐다. 공통점이라곤 칙칙한 로브를 자기 피부인 양 입고 있다는 것뿐.
사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암살자들이 너를 습격한 놈들이라면, 그렇다. 너에겐 상당히 신세를 졌지.”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아주 징글징글하게 달려들더군. 모닥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이 따로 없었어. 조금 더 실력이 있는 놈들로 보내지 그랬냐.”
사내의 머리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하지만 로브에 가려 보이진 않았다. 사내도 흥분한 것을 티내지 않고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요하임을 구하러 온 건가?”
“악마의 유혹에 빠지기 직전의 사람이 있다고 해서 열심히 달려왔지.”
지크의 눈이 사내의 가슴, 정확히 말해 블러디 베슬을 집어넣은 품으로 향했다.
“그런데 말이야. 네 그 블러디 베슬이란 것에 흥미가 있거든. 나한테도 설명 좀 해줘도 될까?”
“너에게 말해줘도 모를 거다.”
“그러지 말고. 네 공격에 온갖 피해를 받은 내 입장도 좀 헤아려주라.”
“알 필요 없다.”
“말 좀 해달라니까.”
“…….”
“응?”
“…….”
“어이.”
“…….”
입을 꾹 다문 채 버티는 사내를 보고 지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전에 봤던 네 동료는 이렇지 않았는데.”
“…뭐?”
드디어 사내가 반응했다.
“스울에서 너 같은 놈을 한 명 봤다. 그때 대충 알았지. 너희들이 사람 하나 잡아서 타락시키고 있는 놈들이라고. 가만 보자. 명칭을 뭐라 하는 게 좋을까?”
턱을 쓰다듬던 지크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천역덕스럽게 말했다.
“마인이라고 이름 붙여 볼까?”
사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지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마인이 좋겠어. 너희들은 마인을 만들고 있는 조직이지. 그리고 아마 이번에 마인으로 타락시킬 인간은 저기 있는 요하임 공자겠고 말이야.”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요하임이 놀랐다.
“아마 그 블러디 베슬을 흡수시키는 게 그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사내의 손이 움찔움찔 거리는 걸 지크는 목격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사내는 참았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쯧, 무뚝뚝한 놈 상대하려니 짜증나네. 저번 놈은 떠벌이라 말 거는 족족 대답해줬는데 말이야.”
지크 자신이 흥이 오를 만큼 ‘대화’가 되던 놈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암살자 대장은 예전 놈과는 다른 타입의 놈 같았다.
‘이놈에게는 뭘 못 알아내겠군.’
고문 같은 걸로는 정보를 알아낼 수 없는 놈들이니 녀석들의 말 하나하나에서 정보를 빼내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지크는 암살자 놈들과 싸울 때, 특히 이런 대장 암살자들과 싸울 때는 말을 많이 하려 노력 중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타고난 성격 자체가 말이 많이 없는 놈 같았다.
그때, 감옥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였다. 갑옷을 입은 자들인지 쇠가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도 같이 들린다.
요하임의 표정이 썩어들어갔고 사내의 표정은 반대로 밝아졌다.
둘 모두 비욤의 병사가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지크 님!”
한스가 외쳤다.
“영주성의 성벽 및 감옥 주변을 전부 장악했습니다!”
요하임과 사내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지크가 사내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왜 표정이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끌어줬는데 말이야. 왜, 네가 원하던 결과가 아냐?”
“너…!”
사내가 말을 잇지 못했다.
“말재주도 없는 놈이 내가 건 시비를 부득부득 참아가며 계속 말을 끈 이유야 뻔하지. 네 지원 병력이 도착하길 기다렸는데, 내 쪽 지원 병력이 오니까 당황스럽지?”
조롱기 가득한 어조로 지크는 덧붙였다.
“잠깐의 희망은 달콤했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