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지크의 얼굴도 신중해졌다. 하지만 한스와 스녹은 사태의 중요성을 모르는지 두 사람의 눈치만 봤다.
“명분은 뭡니까?”
“유능한 의사인 것 같으니 영주님의 병세를 한 번 살펴보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지금껏 영주님의 상태를 살펴보러 온 사람들은 많았겠죠?”
“당연하죠. 유능한 의사와 신관들을 엄청나게 모셨습니다. 물론 모두 다 고개를 흔들었죠. 수명이 다 된 것 같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 공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주성에서 바곳 부인을 데려간 이유가 정말로 영주님의 병세를 살펴보게 하려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지크가 목소리를 굳혔다.
“영주성에 전염병이 돌아서인 것 같습니까?”
“네?”
“어?”
한스와 스녹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요하임은 이미 지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 같았다.
“모르겠습니다.”
확답을 내리진 못한다. 무슨 정보가 없으니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바곳 부인을 데려간 이상 영주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에게 알릴 생각은 없겠죠?”
“그럴 겁니다. 영주성에서 전염병이 돌았다면 바곳 부인은 탐나는 인재였을 겁니다. 전염병에 대한 전문가, 그것도 저 그리고 저와 협력자임이 널리 퍼진 지크 님과는 다르게 형님의 권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전문가니까요.”
“차라리 그냥 영주성에서 아무 소식도 없는 게 낫겠군요.”
“그렇습니다.”
요하임이 무겁게 말을 받았다.
“영주성에서 혹 전염병 때문에 우릴 부른다면, 바곳 부인도 어쩔 수 없는 병이란 뜻이니까요.”
그리고 바곳 부인보다 전염병에 대한 지식을 더 갖고 있는 사람은 여기 없다. 즉, 지금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는 병이 영주성에 퍼졌단 뜻이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없으니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겠죠. 그러고 보니 지크 님도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 전에 공자님. 혹시 클로베이 경을 통해 저에게 무슨 부탁을 하셨습니까?”
“부탁이요? 아뇨. 그런 적은 없는데요.”
지크는 요하임에게 클로베이에 관한 사건을 설명했다.
요하임은 처음엔 놀라더니 지크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여러 감정을 내보였다. 분노, 당혹, 불신 등등.
지크의 말이 끝났을 때 요하임은 굉장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하임이 빤히 지크를 바라본다.
그가 엄청난 고민을 하고 있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러다 결심을 굳힌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크 님을 믿도록 하죠.”
지크의 옆에서 긴장을 하고 있던 한스와 스녹이 안도했다.
하지만 지크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역시 이그람의 치료약을 전해준 이유가 컸겠지.’
그만큼 이그람의 치료약은 귀한 것이었다.
물론 덮어놓고 믿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지크가 짧은 기간 동안 신뢰를 쌓았다 하더라도 클로베이 또한 요하임의 지지자로서 많은 신뢰를 쌓아온 것이다.
아마도 자체적으로 조사를 할 터. 하지만 클로베이가 지크를 데리고 간 것은 자명한 터라 지크는 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모릅니다만, 아마도 살아 있진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엔 딱 잘라 거짓말을 했다. 요하임은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지크 님의 말이 맞다면 형님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요하임은 암살자 조직과 페스트에 대해 모른다. 그리고 지크도 설명에서 그 둘에 관한 정보는 뺐다.
당연히 요하임의 의심은 비욤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님을 돕는 저를 고깝게 보는 걸 수도 있겠죠. 그들도 제가 알고 있던 치료법과 바곳 부인의 예방법 때문에 전염병이 이렇게 빨리 가라앉은 것도, 그 때문에 공자님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예상치 못 한 일이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죽이려 들었다는 걸까요. 그럼 바곳 부인도 위험한 게 아닙니까?”
“바곳 부인을 죽이려 들었다면 굳이 영주성으로 부르진 않았을 겁니다. 차라리 저와 함께 오스프린 바깥으로 끌어내는 방법을 썼겠죠. 아마도 부인의 지식이 쓸모 있다고 판단해 회유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주성에 전염병이 돌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면요.”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항의를 하고 싶습니다만.”
“하지만 증거가 없죠.”
지크를 죽이려 한 자는 엄연히 요하임을 지지하던 클로베이와 소속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자들인 것이다.
“설마 클로베이 경이 배신할 줄이야.”
요하임이 쓰게 말했다. 믿고 있던 사람이 배신했다는 감정과 더불어 또 다른 배신자가 자신의 세력에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솟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 마음이란 모르는 법이죠.”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쨌든 일단 이 병을 하루라도 빨리 끝장내고 영주성으로 귀환해야겠습니다.”
요하임의 눈에 의지가 타올랐다.
* * *
영주성에 전염병이 퍼졌을지 모른다는 불길한 걱정을 안고도 그들은 언제나와 똑같은 일을 하며 지냈다.
이그람은 거의 잡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염 구역도 착실히 줄어들었고 새로 병에 걸리는 사람도 극단적으로 줄었으며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살아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때, 마지막 환자가 병상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그람이란 병의 존재가 세상에 퍼진 뒤, 이 정도의 경미한 피해로 병이 잡혔던 적은 없다.
“이건 전부 지크 님과 바곳 부인 덕입니다!”
요하임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그람의 퇴치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요하임을 포함해 지금껏 병마와 일선에서 싸워온 사람들은 더했다.
그들의 첫 번째 승리인 까닭이었다.
“아직은 마음을 놓으면 안 됩니다. 얼마 안 돼 또 발병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렴요! 저희도 완전히 마음을 놓진 않았습니다!”
그의 말대로 대책팀은 들뜬 마음과는 달리 감염이 심했던 구역을 중심으로 혹 놓친 병자가 없는지, 이그람이 재발할 낌새는 없는지 조사하고 있었다.
“그럼 됐습니다.”
그 정도면 대비는 충분해 보였다. 그리고 지크는 어쩌면 이그람의 재준동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를 이야기를 꺼냈다.
“영주성에서는 별말이 없습니까?”
한창 기분이 들떠 있던 요하임도 바로 안색을 굳혔다.
“네. 사람을 시켜서 영주성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영주성에서 나오는 시녀들에게 은근슬쩍 묻기도 합니다만, 특이한 동향은 없다고 하더군요.”
“바곳 부인에 대한 건요?”
“그건 듣지 못했습니다.”
요하임이 고개를 저었다.
“바곳 부인이 영주님의 병세를 호전시켜서 계속 머물고 있는 것이면 좋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 경우들은 전부 우울한 경우들뿐이니까요.”
영주성에 전염병이 퍼졌거나, 요하임에게서 바곳 부인이란 인재를 주지 않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비욤이 바곳 부인에게 눈독을 들인 걸 수도 있다.
“어쨌든 이그람을 완벽히 잡으면 영주성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지금 형님도 절 함부로 막거나 할 순 없을 테니까요. 그때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할 겁니다.”
평소 순하게 운명이 휘두르는 대로 살아온 요하임이 굳은 의지를 불태웠다. 그 모습이 기꺼워 지크는 작은 웃음을 띄웠다.
* * *
이그람이 완전히 잡힌 지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이그람은 발생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완전히 잡혔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요하임은 전염병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올렸고 의외로 영주성에서는 쉽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크 일행이 처음 오스프린에 도착했을 때처럼, 지크 일행을 빼고 들어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형님께서 또 뭔가 꾸미고 계신 모양입니다.”
요하임이 불쾌하게 말했다.
“무슨 꿍꿍이일까요?”
“모르죠. 하지만 돼먹잖은 짓인 것만은 분명한 일이겠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욤에 대한 말을 할 때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으며 씁쓸함을 내비칠지언정 불만을 내비치지 않던 걸 생각하면 요하임의 변화는 다소 놀라운 것이 사실이었다.
옆에 있던 한스의 눈이 커진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지크 님께서는 일행분들과 함께 예전 숙소에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공자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영주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결정을 내릴 생각입니다. 다만 예전처럼 형님의 뜻대로 되진 않을 겁니다.”
이그람을, 그것도 오스프린에 퍼진 이그람을 잡은 공로는 만만치 않다. 예전처럼 비욤이 요하임을 멋대로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불러주십시오.”
“협력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 말을 남기고 요하임은 부하들을 이끌고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이후 지크는 예전 오스프린에 처음 왔을 때처럼 지냈다. 다만, 예전과 다른 것은 안면을 쌓아온, 요하임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종종 왕래한다는 것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비욤을 때려눕힐 것처럼 굴던 요하임이지만, 며칠이 지나도 영주성에서 특별한 연락이 오진 않았다.
그렇게 며칠. 오늘도 한스와 스녹은 평소처럼 느긋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나 지크의 고된 훈련을 받으며 거친 잠자리에 드는 그들인 만큼,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사치스럽고 안락한 시간을 정말로 전력으로 즐기고 있었다.
물론 완전히 쉬는 건 아니고 지크의 명령 덕에 몸을 바쁘게 움직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그저 계속 꿈같이 쉴 수 있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에도 끝은 오는 법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한스가 자신들을 부른 지크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이 행복한 시간이 끝났음을 인지했다.
그들을 부른 지크가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무장하고 와라. 갈 데가 있으니까.”
뒤숭숭한 일인 것이 확정됐다.
또 어떤 머저리가 지크의 화를 건든 것일까. 한스는 한숨이 나왔다.
“어디로 가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 머저리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크의 말을 들은 한스와 스녹은 먼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고 그 후에는 지크의 머리를 의심했다.
“영주성에 쳐들어간다.”
그게 지크가 웃으며 한 말이었다.
* * *
드라큘 영주성의 지하. 화려하면서도 실용적으로 만들어져 언제나 위풍당당함을 뽐내는 그 성에도 음습하고 더러운 곳이 있었다.
바로 죄인들을 잡아넣는, 성 지하에 있는 감옥이었다.
특히 영주성이라는 특성상 그곳 지하 감옥에 갇히는 사람은 반역이나 영주의 암살 시도 같은 중죄인들이었다. 당연히 그 환경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쿰쿰한 냄새와 비릿한 기색이 가득한 감옥. 그중 가장 깊은 곳에 요하임이 갇혀 있었다.
그는 더러운 주변 환경에도 아랑곳않고 등을 뻣뻣이 세운 채 오연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연약한 그다. 이런 감옥의 환경이 좋을 리가 없다.
실제로 요하임의 안색은 무척이나 안 좋아 보였다. 숨소리도 거칠었다.
앙다문 입술과 닫힌 눈꺼풀. 하지만 그 안에서 뿜어지는 분노는 범상치 않았다.
‘비욤 드라큘!’
온갖 박해와 음해에도 묵묵히 형으로서 대접을 해왔다. 하지만 결국 그런 노력은 모두 쓸데없었다.
죽으라고 전염병이 도는 곳으로만 돌리더니 결국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손을 쓴 것이다.
하지만 비욤을 향한 분노 속에서도 요하임은 의문을 품었다.
‘대체 어떻게 영주성을 장악한 거지?’
지금껏 요하임을 눈엣가시로 보고 온갖 음모를 짠 비욤. 드라큘 영지 대다수의 지지를 엎고 한 패악질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더러운 음모를 짜야 할 정도로 요하임의 존재가 컸다는 뜻도 된다.
아무리 비욤이라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요하임을 쳐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비욤은 요하임을 강제적으로 붙잡아두고 있었다.
그것도 저번처럼 방에 감금한 것이 아닌, 마치 중죄인처럼 감옥에 가둬둔 것이다.
아무리 비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도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을 터.
‘완벽한 무리수야. 하지만 형님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러진 않았을 거고.’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보신에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욤이지 않던가.
계속 머리를 굴려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답답함에 신음을 냈다.
그때였다. 감옥의 철창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 것은.
“무척 힘든 것 같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