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둘이 같은 편일 수도 있고.’
상황을 보면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암살자 놈들 조직은 마인을 만들고 다닐 확률이 높으니, 그중 하나가 페스트일 수도 있어.’
아무튼 좋았다. 함정일 걸 예상하고도 움직인 건, 이런 함정을 깔 만한 놈들은 암살자 놈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놈들이 페스트와 연합을 짰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이번 건 수확이다.’
물론 이 정보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할 수 있다면 더 정보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툭하면 자폭하고 사로잡아도 정보를 캐낼 확률은 없다시피 한 놈들이니 정보를 얻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놈들 상대할 때는 진득해야지. 사소한 정보들을 계속 쌓아가며 머리를 잡을 기회를 노리는 거야.’
지크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고민을 할 이유도 없는데다가 클로베이가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카앙! 카앙!
과연 기사라고 할까. 그의 움직임은 재빠르고 힘은 강력했다.
지크가 알기로 클로베이는 요하임을 따르는 기사들 중에서, 아니 드라큘 영지의 기사들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는 자였다.
지크의 동생인 그레이그나 경험 없는 초보기사였던 바이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숙련된 그리고 강한 기사.
“흐아아아앗!”
교묘하게 사각을 찔러드는 검을 튕겨낸다. 민첩한 검이 힘까지 좋으니 지크도 손이 조금 아렸다.
하지만 지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클로베이만이 아니었다.
스윽!
땅에서 솟아나듯 갑자기 단검 하나가 지크의 옆구리를 비스듬히 찔러들었다.
지크는 팔꿈치로 단검의 검면을 쳐냈다. 단검이 벗어나는가 싶더니 그 뒤로 또 한 번의 단검이 찔러 들어왔다.
그것마저 검으로 쳐내니 이번엔 클로베이가 크게 베어 들어왔다.
후웅!
소리만으로 섬뜩한 파공음이 지나간다. 지크는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클로베이의 검을 무감각하게 쳐다봤다.
클로베이의 공격은 상당히 넓은 범위를 휩쓸었던 터라 암살자들도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지크가 클로베이의 공격을 피하자 전투가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 적들은 다시 덤벼왔다.
‘아주 연계가 잘 되는군.’
상대하는 지크가 감탄할 정도로 클로베이와 암살자들의 연계는 뛰어났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녀석들이 전문적으로 연계 훈련을 한 것 같진 않단 것이었다.
‘암살자 놈들은 자기들끼리 연계 훈련을 받은 것 같지만, 클로베이와는 아니야.’
클로베이와 암살자 집단에서 어긋남이 발생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어긋남이 무척이나 작다는 것이었다.
분명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지크였다.
‘합도 제대로 안 맞춰 보고 이렇게까지 서로를 맞춰줄 수 있는 실력이 대단하긴 해. 하지만 완벽하진 않아.’
무척이나 작은 어긋남이었지만 어긋남은 어긋남이다.
지크가 검을 찔러 넣었다.
클로베이와 암살자가 반응하려다 잠깐 움찔했다.
지크가 검을 찔러넣은 곳은 클로베이와 암살자의 연계, 그 작은 빈틈이었다.
이 공격은 클로베이가 대처하기로 한 듯 암살자가 속도를 좀 늦췄다. 일반인이라면 변화를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짧은 빈틈이었지만 지크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채앵!
“크윽!”
클로베이가 신음했다. 움직임을 급격하게 바꾸느라 중심이 무너진 틈에 지크가 공격을 가한 것이다.
클로베이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과연 실력이 어디 가지 않는 듯 그는 그 상황에서도 검을 들어 올려 빈틈을 막았다.
하지만 지크의 목적은 클로베이가 아니었다.
암살자가 돌입하는 시간을 늦추고 클로베이가 물러난 틈! 어느새 커진 그 빈틈 사이로 지크가 몸을 우겨 넣었다. 동그래진 눈의 암살자가 보였다.
후웅!
지크가 검을 휘둘렀다. 템포를 늦췄다가 다시 가속하려던 암살자가 마치 지크의 검에 자기가 뛰어드는 모양새가 됐다. 정말로 절묘한, 엄청난 경험과 격전으로 다져진 지크의 센스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암살자라고 쉽게 당해주진 않았다. 그들도 나름 준비를 한 것이다.
“아악!”
암살자가 손을 훅 뻗어 누군가를 잡자, 잡힌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암살자는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끌어당겼다.
그 사람은 마을 주민으로 추정되는 사람이었다.
협박에 못 이겨 움직였지만 주민들은 전투 지점 근처에서 어물쩍거렸다. 검과 검이 오가는 살벌한 전투에 겁을 먹기도 했고 끼어들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암살자들은 그런 주민들을 써먹을 방법이 있었다.
바로 방패막이였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겁먹은, 그것도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앞에 나서면 망설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검끝이 흔들리는 게 일반적이다.
문제라면, 지크는 그 ‘일반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 만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크의 검의 속도가 떨어졌다. 일단 착하게 살기로 한 이상, 회귀 전처럼 일반인이 분명해 보이는 자들까지 마구 죽일 수는 없다.
정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방패로 사용되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멍청하게 계속 쩔쩔매며 피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고 사태해결에 도움도 안 됐다.
‘게다가 저 새끼 면상도 짜증나고 말이야.’
주민 뒤에서 마치 ‘이제 어쩔 테냐.’라고 조소하는 암살자 놈의 기대를 단단히 부숴주고 싶었다.
콰직!
“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주민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급격히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오른쪽 정강이가 마치 관절이 하나 더 생긴 듯 어긋났다.
지크의 발길질에 뼈가 부러진 것이다.
하지만 지크의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콰직! 콰직! 콰직!
정확히 세 번의 골절음이 더 나고, 주민의 사지 전부가 관절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변했다.
“아악! 아아아악!”
순식간에 사지의 뼈가 부러졌는데 얼마나 아플까. 허물어진 주민이 울부짖었다.
상처를 부여잡고 싶은데 팔뼈까지 부러진 터라 그저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크는 아랑곳없이 주민을 들어올려 멀찍이 던졌다.
털썩!
“아아아악!”
다시 비명소리가 들린다. 피까지 줄줄 새어나오는 걸 보니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나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행위는 움직이는 고기 방패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에 빠르게 전장에서 이탈시키는 것이었다.
비록 그 때문에 방패들이 부상을 입는다고 해도.
“그럼 나머지 인간들도 저렇게 만들어 볼까?”
의도적으로 소리를 흘렸다. 방금 방패로 쓰여진 사람의 끔찍한 몰골을 봐서일 것이다.
전투 지점 근처에서 주민들이 흠칫 몸을 떠는 게 보였다.
그러나 지크는 그들의 ‘사소한’ 걱정을 신경 써줄 만큼 배려 깊은 남자가 아니었다.
클로베이와 암살자들이 다시 지크를 공격한다.
하지만 지크는 반격하지 않았다. 슬쩍슬쩍 몸을 피하며 주변에서 서성이는 고기 방패들을 향했다.
클로베이가 지크를 공격하라고 주민들을 향해 꽥꽥댔지만 이미 사기가 무너진 그들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지크의 잔혹한 손속과 의도적으로 흘린 소리가 정확히 들어맞은 것이다. 호랑이가 뛰어든 토끼 무리처럼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걸 지크는 놓치지 않았다.
‘괜히 내 눈에 벗어난 곳에 갔다간 그게 더 귀찮아져.’
그는 묵묵히 주민들을 사지를 부러뜨려 멀찍이 내던졌다.
“어이!”
지크가 크게 외쳤다. 그것만으로도 한스와 스녹은 자신들을 부르는 걸 알아차리고 지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기 방패들은 이렇게 처리해라!”
그리고 손수 주민들의 사지를 부러뜨려 멀찍이 내던지는 모습을 보였다.
안 그래도 암살자들이 계속 주민들을 방패로 삼는 통에 한스와 스녹은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그들도 상대가 협박에 못 이긴 일반인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지크와는 달리 일반인의 감성을 한 그들은 독하게 손을 쓰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 때문에 지크가 이렇게 처리하라고 손수 모범을 보인 것이다.
물론 지크의 모범도 절대 순하지는 않았지만.
‘저, 저렇게 하라고?’
사지를 말 그대로 부셔버리는 지크의 잔혹한 손속에 스녹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한스는 달랐다.
물론 기꺼운 마음으로 하는 건 아니다. 미약하게 솟은 눈썹이 그걸 증명했다.
그러나 휘둘러진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서걱!
“아아악!”
방패로 내세워진 사람의 정강이를 검이 스치고 지나간다.
피가 튀고 고통의 비명이 울렸다. 전투 경험이 없는 사람이 방패로 쓰여 칼을 맞았는데 어디 정신이 있을까. 전투고 뭐고 몸을 수그렸다.
한스는 그 틈을 노려 검집을 휘둘러 사람의 사지를 박살냈다. 그리고 멀리 걷어찼다.
지크와는 달리 평소 상식적인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던 한스의 그런 모습에 스녹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퍼억!
스녹의 발치의 지면이 솟아 달려들던 암살자의 복부를 쳐낸다. 한눈을 팔던 스녹이 깜짝 놀랐다.
쿠!
어깨에 올라타 있던 노웸이 크게 울었다. 경고의 의미였다.
“미안! 고마워, 노웸!”
스녹은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그래. 계속 이대로 우왕좌왕할 수는 없어. 죽이는 것보다는 낫지.’
스녹도 지크, 한스를 따라 주민들을 무력화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스를 힐끗 쳐다봤다. 검과 검집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주민들을 박살내고 있는 한스를 보고 내심 고개를 저었다.
‘역시 선배도 지크 님한테 물들었어.’
그리고 자신도 곧 저렇게 될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크, 한스, 스녹이 클로베이, 암살자들을 무시하고 주민들의 처리를 우선하자 움직이는 주민들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물론 지크는 그 와중에도 암살자들을 계속해서 베어냈다. 간간이 아티팩트를 쏘아대는 놈들이 있었지만 지크는 그것들도 모두 피하거나 요격했다.
“역시 실력이 있군.”
클로베이가 지크를 노려보며 씨근덕댔다.
“당신보다는 확실히 위죠. 그걸 메꾸려고 저놈들을 부른 것 같은데, 그다지 도움은 되어 보이지 않네요.”
지크가 대꾸했다.
자신들을 조롱하는 말에도 암살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를 잡고 지크의 빈틈을 노릴 뿐이었다.
그 상황에 지크는 다시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요하임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악마들을 만들려고 하는 놈들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예요.”
“무슨 소리냐.”
클로베이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암살자들은 달랐다.
미약하지만 동요가 그대로 보였다. 아무리 감정 표현을 죽이게 훈련된 그들이라도 자신들의 목적을 정확히 꿰어버린 것에는 조금이나마 반응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맞구나!’
이걸로 확정됐다. 이놈들은 전 세계에서 계속 마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암살자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실력이 늘어나거나 공격이 더욱 위협적이 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지크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변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죽여야 할 놈에서 죽이지 않으면 안 될 놈으로.
하지만 마음가짐의 변화 정도로 지크를 죽일 수 있을 리 없다.
서걱!
“컥!”
콰직!
“칵!”
지크의 검에 암살자들은 하나둘 씩 목숨을 잃었다.
그건 한스, 스녹을 상대하는 암살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퍼엉!
지면에서 솟아나는 석순을 암살자들이 분분히 피한다. 하지만 그건 함정이었다.
이미 회피로를 예상하고 있던 한스가 암살자에게 검을 날렸다.
“크윽!”
가슴을 길게 가른 검상에 암살자가 신음을 흘렸다. 이미 그렇게 부상당한 숫자가 상당하다. 몇몇은 목이 떨어졌다.
함정을 팠지만 사전에 지크에게 걸려 효과가 미비했고 고기 방패로 준비한 주민들도 별 쓸모가 없었으며 우세했던 숫자도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다.
“…빌어먹을!”
상황을 파악한 클로베이가 이를 갈았다.
‘이건 정말 쓰고 싶지 않았는데….’
품에 손을 넣고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클로베이.
격렬한 고민도 잠시. 또 한 명의 암살자가 명을 달리 하자 클로베이는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조그마한 병을 꺼내든 클로베이는 그걸 단숨에 들이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