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아는 사람이었다.
“클로베이 경 아닙니까?”
그는 브로드처럼 요하임을 섬기는 기사였다. 그 지독한 전염병이 돌던 드라큘 영지의 지방 마을부터 지크와 함께 고생한 자이기에 지크도 부드럽게 응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네.”
클로베이가 안색을 굳혔다.
“이그람이 또 나타난 것 같아.”
“봉쇄 구역 밖에 말입니까?”
지크는 저절로 인상이 써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바곳 부인의 시대를 앞선 예방법과 지크의 미래에서 가져 온 치료약으로 인해 명백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이그람이 또다시 설치게 되다니.
하지만 클로베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아니, 이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스프린은 아니야. 오스프린과 도보로 반나절 거리에 마을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이그람과 비슷한 증상의 전염병이 퍼졌다더군.”
일단 오스프린이 아닌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오스프린 바깥의 마을이라는 것에 꺼림칙함도 같이 느껴졌다.
지금껏 드라큘 영지의 마을에서 본 전염병들은 하나같이 해괴하고 잔혹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병, 정말로 이그람이라고 합니까?”
“모르네. 이그람인지, 다른 병인지, 아니면 그저 재수없게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몸살이라도 난 걸지도 모르고. 하지만 오스프린과 가까운 곳에 발생한 병이니만큼 공자님께서 확신을 갖기를 원하시네.”
“그래서 저보고 가서 확인을 하라는 거군요.”
“공자님께서 정말로 죄송스러워하셨네. 하지만 적더라도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고 마을에서부터 전염병을 경험했으며 마력을 가져 전염병에 잘 걸리지 않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지 않나.”
그렇게 말은 하지만 클로베이는 슬쩍 지크의 눈치를 봤다.
지크는 요하임의 부하가 아니다. 아니, 아예 드라큘 영지와 관련이 없는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큘 영지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니 이런 일방통보와 같은 부탁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죠.”
“아, 정말 고맙네!”
지크의 답변이 마치 구세주라도 되는 듯 클로베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 가면 됩니까?”
“그래. 마을의 전염병을 확인하는 게 급하니 자신을 만날 필요 없이 바로 출발하라는 말씀이 있으셨네. 이동 수단은 내가 이미 확보해둔 상태고.”
“그럼 가죠.”
지크가 뒤를 돌아봤다. 한스와 스녹이 엉거주춤한 상태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들었지?”
“저희도 가는 겁니까?”
“당연하지.”
한스와 스녹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베이도 둘의 참여를 막지 않았다.
“어서 가세나. 이 앞에 마차를 준비했으니 오래 걸을 필요는 없네.”
* * *
그들이 도착한 마을의 규모는 작았다. 그러나 아무리 작더라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기본적인 활기가 느껴져야 할 텐데 이곳에서는 활기라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재수없는 느낌이에요.”
스녹이 노웸을 껴안으며 말했다. 한스도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들을 태운 마차가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마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도착했네!”
마부를 자처해 마차를 끌던 클로베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지크 일행이 마차에서 내렸다.
마치 유령 마을 같은 모습에 한스와 스녹이 두리번거리며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기다.”
지크가 마을 안 어딘가를 가리켰다. 마을 사람들의 신앙 장소인 듯한 신전이었다.
마을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그 신전도 조그마한 건물에 신의 표식 하나 붙여 놓은 간단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집들보다는 컸다.
“그래. 전염병이 돌면 보통 신전에서 돌보는 법이지.”
클로베이도 지크의 의견에 동의했다.
“상황이 좀 심각한 모양입니다. 이 마을에 사람의 기척이 있는 건 저 신전뿐이에요.”
“마을의 사람들 전부가 병에 걸렸을 거란 말인가?”
“어쩌면요. 일단 확인부터 하죠.”
지크 일행은 신전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현관이 활짝 열려 있는 집들이 몇 목격됐다.
열린 문으로 보인 집 내부는 너저분했다. 집을 나올 때의 상황이 굉장히 다급했다는 방증이었다.
신전에 도착한 지크가 문을 활짝 열었다.
“예상대로군요.”
신전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누워 있었다. 얼기설기 엮은 간이 침상으로도 모자라 맨바닥에 헌 거적 하나 깔고 누워 있는 사람도 많았다.
많이 본 참상이다. 지크의 뒤를 이어 들어 온 한스와 스녹이 무의식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마을 사람 전원이 쓰러진 건 아닌 듯 병자들 사이사이로 몇 명의 인원이 병자들을 간병하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입구와 가장 가까이서 간병을 하고 있던 청년이 지크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의 안색도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아마도 병세가 그나마 나은 사람들이 위중한 자들을 돌보는 것 같았다.
“여기 사람들은 전부 감염된 것 같은데요.”
스녹이 한스에게 조용히 우려를 표했다.
클로베이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오스프린에서 온 자다! 이 마을에 전염병이 퍼졌다는 소리를 듣고 조사차 왔다!”
“아이고, 기사님이시군요!”
그가 반색을 했다. 마치 구세주를 반기는 양 그가 양손을 내밀어 다가오려 했다. 그런 그를 클로베이가 막아섰다.
“일단 지금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부터 파악을 해야 한다. 그러니 설명을 우선…!”
“됐습니다.”
지크가 클로베이의 말을 막아섰다.
“음? 뭐가 됐다는 건가?”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대충 상황 파악은 끝났으니까요.”
“아니, 이곳에 전염병이 퍼진 건 확실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정보는 얻어야 할 것 아닌가.”
“저…, 이분은 누구신지….”
청년이 지크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마을에 병이 얼마나 어떻게 퍼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분이다. 너희에게 언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 분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드려야 한다.”
“의사분이셨군요! 마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협력을 해야죠. 제가 소상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지크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하다고 여겼는지 클로베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조금 긴 얘기인데, 여기서는 말씀드리기 좋은 장소가 아니군요. 저 곳에 방이 하나 있습니다. 누추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저기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청년은 병자들이 누워 있는 곳을 넘어 건너편에 보이는 문을 가리켰다.
클로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청년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네만, 어떻게 생각….”
지크에게 의견을 묻던 클로베이가 말끝을 흐렸다.
지크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보는가?”
“궁금해서요.”
“궁금? 뭐가 궁금하다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는 어서 얘기를 들어봐야 하지 않겠나. 시간이 촉박해. 개인적인 의문은 나중에 풀….”
“제가 궁금한 건요.”
지크가 클로베이의 말을 끊고 씨익 웃었다.
“당신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는 건지 아니면 협박을 당했는지입니다.”
“그게 무슨 소….”
챙!
날카로운 소리가 클로베이의 말을 잘랐다. 검집에서 빠져나온 지크의 검이 경악하는 주변사람들을 무시한 채 움직였다.
목표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던 청년이었다.
움직이는 검이 당장이라도 청년의 모가지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
청년이 놀란 눈으로 지크의 검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크의 검에 어린 살기가 정말로 자신의 목을 베어낼 때가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알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카가각!
지크의 검의 속도가 떨어졌다. 청년이 꺼내 든 단검이 지크의 검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크도 그 정도 반항은 예상한 상태였다. 검에 마력을 더욱 집어넣었다.
콰직!
지크의 검이 단검을 잘라내 다시 돌진했다.
얼음처럼 변했던 청년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 것도 잠시.
서걱!
지크의 검이 청년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크는 보란듯 과장되게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턱을 들어 신전 안을 싹 둘러봤다.
간병인, 병자 할 것 없이 모두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같잖은 연극 때려치고 덤벼. 이런 허접한 함정에 걸려줄 만큼 난 착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한 번 씩 웃어줬다.
“게다가 함정이 너무 유치해서 못 봐주겠더라. 조금은 디테일을 신경 쓰는 게 낫지 않냐?”
“무슨….”
스녹은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스는 눈빛을 바꾸고 검을 뽑아들었다.
“조심해! 이 녀석들 적이야!”
한스가 스녹에게 경고를 내린 순간!
투확!
그들에게 단검이 쏘아져 들었다.
지크는 그것들을 마치 날파리를 때려잡는 것처럼 검으로 쳐 떨궜다.
하지만 옆에서 베어오는 검만큼은 경시할 수 없었다.
카아앙!
마력과 마력을 머금은 검이 충돌한다.
악마 같은 얼굴을 한 클로베이가 지크를 쏘아봤다.
“질문에 아직 답변 안 해주셨습니다. 이 짓, 당신의 의지입니까 아니면 협박을 당한 겁니까?”
“어떻게 알았지?”
“질문을 질문으로 받는 건 아주 좋지 않은 버릇인데요. 게다가 전 똑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했다고요.”
하지만 이번에도 지크는 답을 얻지 못했다.
클로베이가 이를 갈았다. 몸에서 흐르는 살기가 당장이라도 형태를 이룰 것 같았다.
“죽여!”
그가 외치자 간병인인 척하며 돌아다니던 자들과 병자인 척 누워 있던 자들이 지크 일행을 향해 일제히 뛰어들었다.
하지만 신전에 있던 전부가 망설임 없이 지크 일행을 향해 달려드는 건 아니었다. 누워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고 비명만 질러댔다.
클로베이가 그들을 향해 커다랗게 외쳤다.
“죽기 싫으면 네놈들도 움직여!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놈들은 내가 책임지고 죽게 만들어 주마!”
그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어기적대며 일어났다. 그러나 공포에 어린 눈과 망설이는 몸놀림이 누가 봐도 전투에 끼어들기 무서워하는 일반인들이었다.
‘마을 주민들이군.’
아마도 협박을 당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무력도 없을 테고. 적당히 무시하면 되려나?’
그러나 그들이 지크 일행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자 지크도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주민들의 몸놀림이나 속도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다지 위협적인 상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너희는 서로 협력하며 싸워라.”
지크의 명령에 한스와 스녹이 부랴부랴 등을 맞댔다. 지크의 교육 중엔 공투를 통해 한 명 또는 다수와 대적하는 방법도 있었다.
물론 아직 둘이서 한 몸처럼 움직이는 완벽한 협공은 무리였지만 지크의 엄격한 훈련 덕에 적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그럭저럭 봐줄 만은 할 숙련도는 장착할 수 있었다.
둘이 준비를 끝내는 모습을 확인하고 지크는 다시 적들에게 집중했다.
‘자, 페스트 쪽이냐 암살자 쪽이냐. 아니면 비욤 드라큘 쪽이냐.’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할 놈들을 쫙 늘어세웠다.
이번 이그람의 치료약을 알려줘 요하임의 권위를 세워준 일 때문에 비욤 드라큘도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할 용의자로서 당당하게 끼워 넣을 수 있었다.
‘일단 페스트 아니면 암살자 쪽 같은데.’
함정이긴 하지만 적들이 전염병에 걸린 건 사실 같았다. 함정을 더 교묘하게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페스트가 가장 의심스럽긴 하지만, 적들의 몸놀림을 보면 또 헷갈렸다.
의욕적으로 덤벼드는 놈들 대다수가 암살자의 몸놀림을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