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바곳 부인이 대책팀에 합류한 후, 지크와 바곳 부인은 거의 항상 붙어다녔다.
비록 기대했던 의학 지식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더라도 이그람의 치료법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내어준 지크가 마음에 들었는지 바곳 부인은 지크에게 거침없는 호감을 표하며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조금씩 풀어줬다.
물론 일방적으로 지크를 끌고 다니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크도 군소리 없이 그녀를 따라 다니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묘한 소문이 돌았다.
지크는 귀족 핏줄이 어디 가는 게 아닌지라 상당히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바곳 부인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선남선녀가 붙어서 돌아다니니 소문이 안 돌 수가 없었다.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로맨틱하게 들리는지도 모른다.
호사가들은 두 사람 사이를 예단하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흥미진진하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흥미로운 건 보통 이런 구설수가 대부분 안 좋은 이미지로 포장되는 것과 다르게 둘 사이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역시 이그람을 빠르게 진정시키는데 끼친 공이 둘의 이미지를 무척이나 좋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뭘 그렇게 보냐?”
조금만 있으면 슬슬 끝장날 것 같은 이그람의 숨통을 마저 작살내기 위해 오늘도 나갈 차비를 하던 지크가 자신을 곁눈질하는 한스에 물었다.
“혹시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무슨 소문?”
“바곳 부인이란 사람과 연애를 하신단 소문 말입니다.”
물론 한스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묻는 건 아니었다. 지크의 연애 생활에 참견하려는 생각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아직 하인이던 시절의 버릇이 빠지지 않은 것뿐이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바곳 부인이란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차별을 둬야 할 테니까.’
혹시 여행 중에 만나는 운명적인 사랑이 아닐까 두근거리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스녹과는 달랐다.
지크도 한스의 의도를 알았는지 피식 웃었다.
“굳이 태도에 차이를 줄 필요는 없다. 애초에 그런 달콤한 사이도 아니고.”
“그렇습니까?”
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답을 들은 한스는 실망한 스녹의 뒷덜미를 잡고는 다시 오늘의 준비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똑! 똑!
그때 지크 일행이 묵고 있는 임시 숙소에 누군가 방문했다.
한스와 스녹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그들의 숙소에 방문하는 자들은 대부분 요하임의 명령을 받고 지크를 데리러 온 병사였다.
그리고 보통 그 사람들이 가져온 소식은 그리 좋은 소식들이 아니었다.
진정 국면에 접어든 이그람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걸까.
그러나 지크의 목소리가 그들의 걱정을 없앴다.
“병사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라. 아마 나한테 용건이 있어서 온 걸 거다.”
그리고 지크가 직접 움직여 문을 열었다.
보통 방문한 사람을 맞이하는 건 한스 아니면 스녹이었기에 지크의 행동은 무척 뜻밖의 것이었다.
그러나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한스와 스녹은 지크의 행동을 이해했다.
온통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고 검은 면사까지 두른 여인. 그 차림만으로도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크 씨. 잠은 잘 주무셨나요?”
“덕분에 꿈 한 번 안 꾸고 숙면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숙면은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죠.”
바곳 부인이 방긋 웃었다.
“아침부터 부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행운을 누리는 건 영광입니다만, 부인께서 이른 아침에 제게 행운을 부여하려 행차하신 건 아닌 것 같군요. 무슨 용건이 있으신가요?”
“후훗! 능숙하시네요. 제가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반해버렸을 거예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사랑스럽게 웃는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힐끔힐끔 둘을 바라보던 한스와 스녹이 일시에 멍해질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지크 씨에게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방문했답니다. 아, 요하임 공자님께 허락은 받았어요. 이그람도 진정국면이니 잠시 동안 다녀오는 건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소개라. 데이트 신청이 아니라서 아쉽군요. 하지만 부인이 소개해준 사람이라면 시간을 낼 이유로는 충분하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준비를 끝내죠.”
다시 집 안으로 들어 간 지크는 나갈 차비를 마저 끝냈다.
“가실까요?”
“네.”
지크가 내민 팔에 바곳 부인이 살며시 손을 얹는다. 지크는 바곳 부인을 에스코트 하며 길을 나섰다. 누가 봐도 다소곳한 분위기다.
찰싹 달라붙은 채 나서는 둘의 등을 바라보며 한스와 스녹은 동시에 생각했다.
[저러면서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 * *
바곳 부인은 지크를 오스프린 바깥으로 이끌었다. 다행히 격리 구역 쪽 성벽에도 문이 하나 있었기에 -죽은 병자를 성 바깥에서 태우기 위해 옮길 때 주로 사용되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의 거리를 통하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
바깥은 인적 없이 조용했다. 격리구역과 연결된 문이 있는 곳이라 이 근처도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해받을 것 없이 그들은 계속 움직였다.
오스프린을 나온 후 얼마나 걸었을까. 그리 오래 걸은 것 같진 않다.
바곳 부인이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리는 몇 그루의 나무를 제외하면 푸른 잔디가 땅을 새파랗게 물들이고 있는 초원이었다.
그러나 잔디 위로 불쑥 솟아 있는 여러 개의 석판이 이곳이 그저 마음 편하게만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렸다.
그곳은 묘지였다.
지크는 묘지석을 훑었다. 이름은 제각각이었지만 성만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바곳.
‘바곳 가문의 묘지인 모양이로군.’
가문이 몰락한 지금도 묘지는 잘 관리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아직 이 곳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바곳 부인이겠지.’
지크의 시선이 그녀를 쫓았다.
익숙한 곳인 듯 그녀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여러 묘지석을 헤치며 움직인 끝에 두 묘지석 앞에 멈췄다.
- 알렉스 바곳 -
- 루인 바곳 -
그들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크는 바곳 부인의 곁에서 묘지석을 내려다봤다.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부인의 가족인가.’
“제 가족이랍니다.”
바곳 부인이 말했다. 세월의 무상함이 그녀의 가족에 대한 애정을 앗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음성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세월은 사람의 격렬한 슬픔을 애틋한 그리움으로 바꿀 뿐, 그 사랑을 지울 수는 없으니까.
부인이 알렉스 바곳이라 새겨진 묘지석에 손을 댔다.
“제 남편이에요.”
그녀가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저와는 나이 차이가 상당히 있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희는 진심으로 사랑했답니다. 남편은 장사 일로 바쁜 와중에도 항상 저에게 신경을 써줬어요. 그런 남편이 저도 정말 좋았고요. 그래서 그 사랑이 결실을 맺었을 때는 하늘을 전부 가진 느낌이었죠.”
바곳 부인이 이번엔 루인 바곳이라 새겨진 묘지석으로 손을 옮겼다.
“사랑스러운 아이였어요. 잘 웃고 잘 울고 잘 자고. 제 품에서 꼬물거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귀여워 심장이 쿵쿵 떨어지는 것 같았죠. 남들에게 듣기만 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자식이라는 존재가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인지, 왜 어머니들이 그렇게 자기 아이를 아끼는 게 되는지를 제게 확실히 알려준 아이였죠.”
바곳 부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 세월도 그녀의 슬픔을 그리움으로 모두 바꾸진 못했는지 어느새 촉촉해진 그녀의 눈에서 물 한 방울이 스르륵 흘렀다.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죄송해요. 이 자리에만 오면 이렇게 되네요.
“괜찮습니다.”
“지크 씨에게 소개를 시켜주려 한 사람들이 바로 제 가족이에요.”
그녀가 묘지석 중앙에 선 후, 양 손으로 두 묘지석을 동시에 짚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남편, 아이와 손을 잡고 있는 여성처럼 보였다.
“당신이 이그람의 치료약을 어떻게 얻게 됐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그 방법을 전해주신 덕분에 전 희망을 봤답니다. 전염병을 결국 이길 수 있을 거란 희망을요. 제가 입은 게 상복이란 건 아시나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제 가족의 장례를 치렀을 때 맹세했어요. 모든 전염병을 정복했을 때, 이 옷을 벗겠다고요.”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다. 하지만 감히 그 누가 그녀의 목표를 비웃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남편과 아이에게 당신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분 덕에 제 목표가 아주 조금은 이뤄졌다고. 이제 적어도 이그람 때문에 당신들 같은 사람들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녀가 씁쓸하게 말을 덧붙였다.
“다시 생각해보면 무척 이기적인 생각이네요.”
“아닙니다. 부인이 해준 게 얼만데요. 이 정도의 일로 불평불만을 내뱉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고마워요.”
그녀가 웃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여자로서 그녀는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가죠.”
침울해진 분위기를 억지로 잡아 찢으려는 것처럼 그녀가 소리 높여 말했다.
“아직 이그람이 완전히 가라앉은 건 아니니까요. 어서 가서 녀석의 숨통을 마저 끊어내요.”
바곳 부인은 지크의 손을 붙잡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손의 온기가 손끝을 타고 스르르 올라왔다.
* * *
임시 숙소로 돌아온 지크는 침대에 누웠다.
돌아올 때도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돌아온 지크와 바곳 부인을 보고 한스와 스녹이 의심의 눈길을 날렸지만 훈계의 주먹을 한 대씩 하사해주니 불쾌한 눈길을 싹 거뒀다.
하지만 아마 생각까지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연인이라.’
한스와 스녹이 품고 있을 뻔한 생각을 떠올렸다.
‘외부에서는 그렇게 보이나.’
외부의 시선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사람들이 경악하고 어찌 보면 그에게 질려 버릴 정도로, 그에게 그런 핑크빛 감정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물론 바곳 부인이 등장한 이후부터 지크의 시선이 계속 그녀를 쫓으며 그녀에게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로맨스 같은 달콤한 것이 아닌, 무척이나 위험한 요인 때문이었다.
‘그녀도 페스트일 가능성이 있어.’
갑자기 나타나 이그람의 치료약을 건넨 지크에게 관심을 표한 자. 전염병에 대해서 무척이나 해박하고 지크는 분명 미래에서나 들어본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기도 한다.
솔직히 지금껏 만난 사람들 중 가장 페스트로 의심되는 인물이 그녀였다.
때문에 그녀가 자신에게 보인 관심을 거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걸 기회삼아 그녀의 곁에서 세심하게 관찰했다.
하지만 별로 얻은 건 없었다. 전염병에 많은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녀는 마인답진 않았다.
‘조금만 더 관찰해보고 떨어져야겠어.’
그렇다고 그녀의 용의가 사라진 건 아니다. 그녀의 곁에 더 붙어 있는다고 해서 이 이상의 유의미한 정보를 얻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것뿐이다.
드라큘 백작가의 기사 출신 집사 살롬. 그리고 가족을 전염병으로 잃은 바곳.
두 의심스러운 인물을 생각하며 지크는 잠자리에 들었다.
* * *
며칠이 더 흘렀다. 진정세로 돌아선 이그람은 그 위력을 완전히 상실한 듯 보였다.
더 이상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포감이 보이지 않았다. 전 날에는 드디어 격리 구역이 축소되기까지 했다.
이겼다. 얼마 안 돼 이 전염병은 잡힐 것이다. 그런 인식이 쫙 퍼졌다.
하지만 요하임을 비롯한 대책팀의 지휘부는 절대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들이 마음을 놓는 것은 모든 병을 잡은 이후가 될 것이다.
지크도 이견은 없어 그는 오늘도 임시 숙소를 나섰다. 병자들을 살피고 약을 제조하며 여느 때와 같은 업무를 보던 때였다.
“지크!”
누군가 지크를 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