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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68화 (68/628)

제68화

전염병이 치료되기 시작하자 갑자기 지크에게 관심을 보이는 작자.

요하임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지크는 암살자와 페스트의 존재 때문에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요하임의 말이 틀린 건 아냐.’

비욤을 지지하는 자라면 이번 요하임의 공을 좋게는 못 볼 터. 그래서 지크를 못마땅해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상당히 유능하다고 했단 말이야.’

기사출신이지만 뇌근은 아닌 자라 했다.

‘그럼 왜 그냥 갔지?’

지금 지크는 귀족임을 내세우지 않고 있다. 요하임도 남의 개인사를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고 다닐 스타일이 아니다.

즉, 살롬은 평민인 지크가 나대는 걸 보고도 그에 대해서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단 것이다.

더러운 성질머리를 가지고 오늘도 자기 성질머리대로 들이받은 지크지만, 놀랍게도 그 행동 안에는 교묘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오늘 본 그 늙은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평민이 귀족에게 함부로 대하는 걸, 맞는 말을 한다고 넘어가 줄 만큼 아량이 있는 것 같진 않아.’

물론 생각나는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요하임이 옆에서 지크를 두둔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지크는 전염병의 치료약을 전해준 사람으로서 여러 사람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다. 솔직히 그걸 믿고 들이받은 감도 있고.

‘그런데 내 행동이 좋은 행동은 아니었거든. 녀석이 정말로 요하임의 말처럼 유능했다면 그걸 트집 잡았어야 해.’

그렇게 해서 지크를 깎아내리고, 그와 연관시켜 요하임의 명예까지 실추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치료약의 출처와 지크가 다른 전염병의 치료법을 알고 있는지만 신경을 썼다.

‘둘 중 하나겠지. 요하임이 말한 유능의 수준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관심이 없거나.’

만약 이유가 후자라면 자연스레 다른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이놈, 정말로 비욤을 위해 일하는 게 맞나?’

아직 확정된 건 없다. 하지만 살롬이란 인간이 의심스러운 건 확실했다.

‘좋아. 일단 용의자 하나.’

페스트일지 아니면 암살자 조직의 놈일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놈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단 의심 가는 놈을 하나 특정했다는 것에 지크는 만족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모퉁이 하나만 돌면 약을 제조하는 제약소가 보일 것이다.

제조법은 모두 가르쳤지만 약사들이 약을 제조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여전히 지크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지크는 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음?’

모퉁이를 돌아 제약소에 들어간 지크가 멈칫했다. 제약소 안에 약사들과 더불어 낯선 사람 한 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아, 저기 오셨군요.”

약사 한 명이 지크에게 손짓했다.

“저분이 지크 씨입니다. 이번 이그람의 치료약을 전해주신 분이죠.”

낯선 사람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자였다.

그녀를 보고 지크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검다’라는 이미지였다.

성격 같은 추상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검은 모자와 턱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면사. 드레스도 장갑도 구두까지 모두 검다. 마치 상복이라도 차려 입은 것 같았다.

‘아니, ‘같았다.’가 아니라 상복이 맞는 것 같은데?’

그녀가 지크를 향해 걸어왔다. 절제되고 부드러운 걸음걸이가 깊은 우아함을 풍긴다.

또각!

구두소리가 멈췄다. 그녀가 지크의 바로 앞에 섰다.

면사 너머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단아한 미인이었다.

“처음 뵙겠어요. 그레타 바곳이라고 해요.”

그녀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크도 일단 마주 인사했다.

“지크입니다.”

그녀, 바곳이 지크를 요모조모 뜯어봤다. 호기심 어린 표정이 ‘이 사람이 바로 그…!’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지크가 그녀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려 할 때, 그녀를 소개한 약사가 끼어들어 그녀를 대신 소개했다.

“이분은 바곳 부인입니다. 바곳 상사의 주인이시죠.”

‘바곳 상사?’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그러나 미래에 나타나는 이름은 아니었다.

“혹시 바곳 상회를 말하는 겁니까?”

바곳 상회. 그건 지크가 스틸월 영지에서 한창 이리 치이고 저리 구르고 있을 때 유명하던 이름이었다.

이곳 드라큘 영지가 소속된 나라의 거대 상회로, 그 명성은 이웃 나라에 있는 스틸월 영지까지 전해질 정도로 부와 영향력을 떨쳤다.

하지만 지크와 엮인 적은 없었다.

“지금은 상회가 아닌 상사라고 한답니다. 남편이 죽은 후 몰락했거든요.”

바곳 부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 말 때문이었다.

지크가 가문을 박차고 나와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을 때 바곳 상회는 멸망해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였다.

‘분명 상회의 주인이 죽은 후 갈가리 찢겼다고 했지.’

얘기를 들어보면 그 죽은 주인이란 자가 바곳 부인의 남편이었던 모양이다.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을 줄이야.’

다만 규모가 굉장히 축소되어 더 이상 국제적으로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크가 망했다고 잘못 알고 있던 것도 이해가 됐다.

‘분위기를 보면 망했다고 봐도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닌 것 같고.’

“실례했습니다, 부인.”

“괜찮아요. 사실인걸요.”

“저를 찾아오신 모양인데,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신 겁니까? 그리고 여기는 어떻게 찾아 오셨죠?”

하나둘 병자가 치료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아직 격리된 구역이었다. 일개 상사의 주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못 된다.

“그건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다시 그 약사가 나섰다.

“사실 바곳 부인은 전염병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병을 연구하는 분께 후원도 하고 부인 본인도 상당한 의료지식을 가지고 계시죠. 스스로 여러 연구도 하고 계시고요. 솔직히 전염병에 대해서는 저희보다도 훨씬 더 깊게 알고 계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찬이세요.”

바곳 부인이 겸연쩍게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약사의 눈빛을 보면 허튼소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에게 흑심을 품은 게 아닐까 잠시 의심도 들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약사의 눈이 너무 맑았다. 저건 순수하게 존경하는 사람을 볼 때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전염병에 관심이 많은 부인이기에 이그람의 치료약을 전해주신 지크 님을 뵙고 싶어 찾아오신 겁니다. 아,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한 건 저희입니다. 정확히는 다른 곳에 있는 동료죠. 전염병에 해박하신 분이니 현 상황에 분명 도움이 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요?”

지크는 바곳 부인을 쳐다봤다. 노골적인 시선에 그녀가 멋쩍어 했다.

“대단하시군요. 상당히 젊어 보이시는데 저런 극찬을 받을 분이실 줄이야.”

“아니에요. 쪼그라든 상사는 제가 조금만 신경을 써도 알아서 잘 굴러가기도 해서 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한 것뿐이에요.”

그녀가 웃었다. 무척이나 서글프게.

“제 남편과 아이가 죽은 이유도 전염병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적어질 수 있길 바랐어요.”

고귀한 이유다.

하지만 뒤이은 그녀의 말은 그녀가 고귀함은커녕 처절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내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남편과 아이를 모두 잃은 제가 살 이유가 없으니까요.”

* * *

바곳 부인은 지크와 대화하길 원했다.

무서운 전염병인 이그람의 치료약을 아낌없이 전해준 여행자. 시중에 퍼진, 뭔가 신비로워 보이는 그 명칭에 환상을 갖고 접근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지크가 보여줄 수 있는 건 그냥 있는 그대로의 지크뿐이었다.

“정말로 그냥 책에서 본 것뿐인가요?”

“네. 정말 그렇습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크는 오해받지 않도록 치료법은 그저 책에서 봤을 뿐이라며 말하고 다녔지만 원래 소문이란 것이 어디 뜻대로 나는가.

지금 시중에 나도는 지크의 소문은 거의 전설에 나오는 현자라고 해도 될 정도로 살이 붙은 모양이었다.

“병에 대한 지식은….”

“겉핥기식으로 조금은 알고 있지만 전문적인 분야로 넘어가면 일절 모릅니다.”

“키무스는 아세요? 미힐과 라스톤은요?”

“키무스는 분명 땅 속에 줄기를 뻗는 식물을 말하는 거죠? 효과는 열을 내려주는 거고요. 미힐과 라스톤은 모르겠군요.”

바곳 부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지크도 충실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딱 아마추어 수준의 지식만 가지셨네요.”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바곳 부인의 실망이 눈에 보였지만 지크는 떳떳했다.

그는 거짓말도 하지 않았고 과장도 하지 않았다. 뜬소문은 그의 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 그가 잘못한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역시 그냥 책에서 봤다고 하길 잘 했어.’

그렇지 않고 만약 자신이 만들었다 운운했다면 아마 대번에 거짓말이 들통났을 것이다.

“…죄송해요. 너무 제 생각만 했네요.”

지크의 앞에서 너무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고 생각한 걸까.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너무 기대를 하고 왔거든요. 전염병을 완전히 극복할 순 없겠지만, 지크 씨의 힘을 빌린다면 이번에야말로 그 빌어먹을 전염병 녀석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고요.”

“이해합니다.”

“그래도 이그람의 치료약만으로 충분히 성과이니 너무 실망은 말아야겠죠.”

몸을 움직여 긍정적인 생각을 주입하려는 듯 그녀가 쭈욱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지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도 이 사태 해결에 한 팔 거들어 볼게요. 지크 씨의 얼굴과 이름이 잘 통할 것 같으니 저랑 같이 다니면서 도와주세요.”

“힘을 싣는다면 요하임 공자님을 찾아가는 게 더 좋을 텐데요?”

“드라큘 가의 공자님이잖아요. 그런 분은 대하기 너무 어려워요. 그에 비해 지크 님은 편하게 대할 수 있는데다 어느 정도 지식도 있으시고 사람들의 존경도 받고 있죠. 그런 분이 설마 이 여리디여린 숙녀를 방치하진 않으시겠죠?”

지크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바곳 부인이 내민 손을 잡으며 가볍게 윙크했다.

“물론 도와드리고말고요. 레이디.”

* * *

의료진의 전폭적인 추천이 있었고, 그녀가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건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지크가 그녀의 지식을 완전히 믿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곧이어 보게 된 그녀의 활약엔 천하의 지크마저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그람의 확산은 보통 같은 수원을 쓰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요. 병자들이 사용하던 우물이나 수원을 조사해서 수원은 폐쇄하고 같은 수원을 사용하고 있는 구역을 격리해야 해요.”

그녀는 가장 먼저 격리 구역을 확대시키고 그 구역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 대상자로 지정해 세세하게 보고할 것을 청했다.

“이 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옮겨 다니지만 그렇다고 그저 곁에 있기만 한다고 옮지는 않아요. 병자와 물리적으로 접촉을 하거나 병자의 침 같은 체액을 통해 감염되죠. 병자가 하는 기침이나 재채기를 조심해주시고 병자의 체액은 철저하게 피해주세요. 물리적 접촉을 최대한 삼가는 건 당연하고요.”

그 다음엔 구체적인 감염경로를 전달해 사람간의 감염이 쉽게 되지 않도록 막았다.

“의료진을 포함한, 병자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청결해야 돼요. 깨끗한 물을 준비해서 병자와 접촉할 때마다 손을 씻고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몸 전체를 씻으세요.”

혹,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병의 매개체가 될까 그들의 관리도 철저하게 했다.

“약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보니 같이 먹으면 효과가 떨어지는 음식이 있네요. 목록을 줄 테니 이것들은 병자들의 음식에서 빼주세요. 그리고 이 음식들은 약의 효과를 올릴 거예요. 이것들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병자들이 먹게 해 주세요.”

심지어는 지크가 알린 이그람의 치료약을 즉석에서 파악해 약효를 늘리거나 저해하는 음식들을 추려내는 저력까지 보였다.

그녀가 말하는 것들은 미래에서 지나가듯 들어본 것들이었기에, 이 시대를 앞서는 선진적인 기술을 지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그녀의 명성도 상당해서 그녀의 요청은 상당한 의료진들의 지지를 받아 실행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구역에 적용된 건 아니었다. 지크의 임상실험처럼 일정 구역을 정해 먼저 실험이 진행됐다.

하지만 효과가 뛰어나 그 방법이 모든 구역에 적용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 그녀를 미심쩍어 했던 요하임도 곧 그녀를 볼 때마다 환하게 웃음짓게 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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