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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67화 (67/628)

제67화

말투, 표정, 행동거지 모두가 지크에게 시비를 걸려 하는 태도다.

죽이려고 살기를 뿌리며 검을 들이대는 놈들은 계속 만나왔지만 이렇게 시비를 거는 인간은 스틸월에서 본 이후 처음이었다.

‘아, 드루도 있었지.’

“네가 지크냐고 물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약간 현실도피성으로 딴 생각을 하던 지크에게 살롬이 다그쳤다.

‘…계획이든 나발이든 이 새끼부터 쳐죽이고 볼까?’

순간 지금의 순수한(?) 지크가 아닌, 예전의 마왕 지크 모어 시절을 떠올리며 움직일까 고민이 됐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살롬!”

다행히도 적절하게 끼어든 요하임 덕에 지크의 분노가 앞뒤 안 가리고 작렬하는 건 저지됐다.

‘…그래, 참자. 잠시만 참아. 요하임도 있잖아. 그리고 뒷감당할 힘도 부족하고.’

지금은 마음에 안 든다고 칼부터 뽑아드는, 그리고 그것만으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지크 모어가 아니다.

‘자, 진정하자. 나는 순백이다. 나는 깨끗해졌다.’

거센 불꽃에 휩싸여 쿵쿵 뛰는 심장에 차가운 얼음물을 말 그대로 쉼없이 퍼부어대는 이미지로 가슴을 진정시켰다.

지크가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인내심을 테스트하고 있을 때, 요하임과 살롬 사이에는 작은 말다툼이 오갔다.

“내가 누누이 말씀 드렸죠! 지크 님은 우리 영지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니 무례하게 대하지 말라고요! 나를 대하는 태도야 우리 가문 내의 일이니 별 말 하지 않겠지만, 지크 님은 우리 가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 태도는 뭡니까!”

“요하임 님이야말로 대체 뭘 믿고 저 자를 그리 우대하시는 겁니까? 말 그대로 저 자는 우리 가문은 물론 영지와도 관련이 없는, 완전한 타인이 아닙니까.”

“그 타인이 오스프린에 퍼진 이그람을 막아낼 방법을 알려줬단 말은 못 들었습니까?”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단 겁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저 지크란 자는 일개 여행자가 아닙니까? 그런 자가 어찌 이그람의 치료약을 알고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오스프린에 전염병이 도는 시기에 딱 맞춰 등장까지 했죠. 공교로워도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그래서 뭡니까? 지크 님이 이그람을 퍼뜨렸다고 말하기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상한 것도 사실이죠.”

“당신은 정말…!”

요하임이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려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살롬은 요하임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지크에게만 용건이 있다는 듯 다시 지크를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

마치 눈으로 씹어먹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네가 지크가 맞나?”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뭘 그렇게 자꾸 물어봅니까?”

삐딱한 시선과 빈정거리는 태도. 살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시 한번 물으마.”

순간 살롬의 몸에서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옆에 있던 요하임이 압박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네가 지크가 맞냐고 물었다!”

지크의 이름을 모르는 게 아니다. 이건 기싸움이었다.

설령 이미 자신이 지크의 이름을 알고 그걸 지크도 인식하고 있다 해도 자신이 질문하면 일단 대답하도록 만드는 것. 그렇게 심리적으로 우위에 서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안 좋았다.

‘이 영감탱이가 같잖은 짓을 하네?’

하는 행동은 유치하고 뿜어내는 기세는 가소롭다. 나름 젊었을 때 한가락 하던 인간인 것 같지만, 이미 상당한 마력을 자신의 의지로서 다루게 된 지크에게 살롬의 기세는 아무 소용없었다.

지크는 자세를 바꿨다. 한쪽 발을 엇나가게 딛고 한쪽 손으로만 허리를 짚는다. 그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후 말했다.

“그러니까 이미 알고 있잖습니까. 아니면 뭡니까. 슬슬 기억력이 떨어질 나이라 그새 내 이름을 까먹은 겁니까?”

살롬의 눈이 꿈틀거렸다.

“…버르장머리라곤 없는 놈이로군.”

“상대에 따라 다르죠. 예의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라 생각하고 있어서 말이죠.”

한마디로 네놈이 예의가 없으니 자신도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살롬의 눈이 더욱 험악해졌다. 볼살이 진동하듯 씰룩였다.

“…좋다. 그 기개인지 객기인지 모를 걸 인정해주마.”

지크가 밀리지 않자 살롬이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 질문에는 반드시 대답해야 할 거다! 네놈, 이 전염병의 치료법은 어디서 얻었지?”

“예전에 책에서 봤습니다.”

이런 질문이 나올 거라 이미 예상해뒀기에 답변도 쉽게 나왔다. 하지만 미리 준비해뒀다고 하기엔 너무 허술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단순했다.

역시 살롬은 믿지 않았다.

“책? 책이라고? 이그람의 치료법이 담긴 책? 그딴 게 있다는 걸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세계에서 최초로 등장한 치료약이다. 그 말은 곧 이 치료약의 존재를 지금까지 그 누구도 몰랐다는 말이다.

한데 그 방법이 책에 담겨 있다니.

혹시나 민감한 사항일지도 몰라 치료약의 출처를 물어보지 않은 요하임도 그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지크를 무척 신뢰하는 요하임이 그럴진대 살롬은 오죽할까.

하지만 살롬은 씨근덕거리면서도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려 애썼다.

“좋다! 그 깜찍한 농담이 진실이라고 치자! 그게 어떤 책이냐!”

“글쎄요. 너무 오래 전에 본 책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네놈이 지금 나랑 농담을 하잔 거냐!”

살롬이 소리를 질렀다.

목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 될 정도로 커다란 음성. 하지만 지크는 턱만 까딱일 뿐이었다.

“농담은 댁이 하는 거 아닙니까? 대체 무슨 답을 듣고 싶은 거요? 내가 저 약을 개발했단 것? 아니면 저 약의 제조법을 누가 알려줬다는 것? 내가 그렇게 말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뭐?”

“내가 이그람의 치료약을 제공했고 그걸로 차도가 있는 사람들이 나왔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책에서 약의 제조법을 본 걸 납득할 수 없습니까? 그럼 다른 이유는 납득할 수 있고요? 무엇보다 내가 당신에게 하나하나 설명해가며 납득시켜야 하는 이유는?”

“이, 이…!”

“이 갈지 말고요. 그래봤자 아픈 건 댁 이빨뿐입니다. 증거를 낼 수도 없지만, 설사 가능하다 해도 내가 죄인도 아니고 일일이 증거를 내서 내 주장을 믿게 할 생각도 없어요.”

지크가 허술한 답을 준비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상대가 납득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으니까.

정확히는 어떤 변명을 해도 상대가 납득하지 않을 테니까다.

이그람의 치료약은 먼 미래,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신관, 의사, 약사들이 모여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제조법을 지크 같은 일개 여행자가 가지고 있다?

누구든 의심을 할 것이다. 실제로 요하임도 처음엔 의심하지 않았던가.

‘내가 개발했다고 주장해도 내 의학지식이나 약학지식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지 않으니까 당연히 의심할 테고. 정체를 숨긴 어떤 이에게 들었다고 해도 의심하겠지. 이 약을 개발했다는 게 증명되면 부와 명예가 자동적으로 따라올 테니까.’

어떤 식으로든 상대가 납득하지 않을 걸, 지크는 고민까지 해가며 납득시킬 생각이 없었다.

“누가 뭐라든 전 책에서 봤습니다.”

‘믿든 안 믿든 알 게 뭐야. 그리고 내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회귀 전, 전염병에 관심이 많던 요하임이 보던 걸 뺏어서 본 것이니 분명 거짓말도 아니다.

살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당장이라도 지크를 쳐죽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흥분을 억눌렀다.

“좋아. 그렇다면 다른 전염병의 치료약도 그 책에 적혀 있었나?”

“아뇨. 제가 그 책에서 본 건 이그람의 치료법뿐이었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야.’

다른 전염병의 치료약도 알고 있긴 하지만 그건 다른 책에서 본 거다. 이그람의 치료약이 쓰여 있던 책에는 오로지 이그람의 치료약 제조법만이 적혀 있었다.

“…진짜겠지?”

“거 참, 속고만 사셨나.”

살롬이 집요한 눈빛으로 지크를 탐색했지만 지크의 경험이 얼만데 고작 그런 걸로 압박감을 느끼겠는가.

무엇보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 한층 더 당당할 수도 있었다.

“…좋아.”

그 말만을 남기고 인사도 않은 채 살롬은 휙 나갔다.

지크는 둘째 치고 그가 모시는 가문의 공자인 요하임에게도 무척이나 실례되는 행동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요하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크 님. 우리 가문 사람이 폐를 끼쳤군요.”

오히려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지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굽니까? 예전에 첫째 공자의 곁에 서 있는 걸 본 것 같은데요.”

“베스놀 살롬. 우리 가문의 집사입니다.”

“집사치고는 기세가 대단하더군요.”

자신을 향해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던 걸 떠올리며 지크가 말했다.

“원래는 가문의 기사였습니다. 그것도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실력 있는 기사요. 하지만 다리에 부상을 입어 은퇴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실력과 그간의 공을 감안하여 아버지께서 가문의 집사로 들이셨습니다.”

지크는 살롬이 가볍게 발을 절던 걸 떠올렸다. 아마도 그게 부상의 후유증인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저한테 난리입니까?”

“아마도 지크 님 덕택에 우리가 이그람을 치료하는데 성공하면서 제 권위가 오를 거라고 생각해서겠죠. 그래서 상황을 파악할 겸 우리를 압박하러 온 걸 겁니다. 살롬은 철저하게 형님의 편이거든요.”

요하임이 씁쓸하게 말했다.

전염병을 막는 걸 넘어 치료까지 하게 되면 그 상황을 지휘한 요하임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것이다. 그건 요하임을 견제하는 비욤의 세력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상황일 터.

‘그래도 오스프린을 휩쓸지도 모를 전염병을 막아낸 사람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다니.’

아무리 이해를 하려 해도 살롬의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요하임이라고 해도 지크의 모든 걸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치료약의 출처는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지크가 오스프린의 은인인 건 확실하기에 그는 확실히 지크를 우대했다. 당연히 살롬의 행동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요소에 대해서는 그도 살롬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다른 전염병의 치료약은 모르십니까?”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했다.

이건 요하임 자신을 위한 질문이 아니다. 정말로 지크가 다른 병의 약마저 안다면 다른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지크는 요하임에게도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그 책에 적혀 있는 건 이그람 치료약의 조제법뿐이었습니다.”

교묘하게 말을 꼬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면서.

‘여기서 다른 전염병의 치료약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말로 귀찮아져.’

물론 치료약을 퍼뜨리는 것도 착한 일이니만큼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루벨라에게 던져 줘야지.’

카르위먼이라면 치료약들을 어떤 조직보다도 더 효율적으로 퍼뜨릴 것이다. 게다가 빚진 것도 있으니 자신의 신원도 확실하게 가려주리라.

명성을 극렬하게 거부할 생각은 없지만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 치료약을 통해 명성을 얻으려 할 만큼 명성에 굶주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게 아닌 명성은 엄청난 귀찮음을 가져올 뿐이니까.

“안타깝군요. 하지만 이것도 제 욕심이겠죠. 이그람의 약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기적이나 마찬가지인 일이니까요.”

요하임은 납득했다.

“용건은 이걸로 끝입니까?”

“그렇습니다. 살롬이 지크 님을 불러달라 계속 고집을 부려서 말입니다. 바쁘게 약을 제조중이셨을 텐데 방해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그 살롬이란 사람, 능력은 어떻습니까?”

지크도 살롬에게 흥미가 든 것일까. 지크의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요하임은 순순히 대답해줬다.

“기사로서의 능력은 부상을 당하면서 상당히 떨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한가락 솜씨는 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집사로서의 능력도 수준급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가문의 일을 잘 처리해 왔죠.”

“머리가 좋다면 협잡질도 잘 하겠군요.”

역시 원한이 남은 것일까. 나오는 한숨을 꾹꾹 눌러 참으며 요하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죠. 아직 만들 약이 많이 남아서요.”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거듭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병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길,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는 요하임의 배웅을 받으며 지크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길을 걸으며 지크는 살롬을 떠올렸다.

무례한 늙은이. 하지만 지크에게 중요한 건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 어슴푸레 떠오른 의심이었다.

‘그놈이 페스트일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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