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이러면 됐지?”
비욤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늘어뜨렸다.
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떴다.
아버지인 드라큘 백작이 앉았던 의자. 언제나 부러움에 올려다보기만 하던 권력의 상징인 의자에 앉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영지의 모든 자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다.
무엇보다도 어렸을 때부터 영특해 부모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요하임을 괴롭힐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연약하지만 않았다면 백작위는 차남이 잇는 게 나았다는 수군거림에 얼마나 열이 뻗쳤는가.
‘하지만 이제 끝이야. 결국 이 의자에 앉는 건 나였다고!’
의자의 팔걸이를 사랑스럽게 쓸어본다. 그러다 이 의자의 원래 주인에게 생각이 미쳤다.
‘영감탱이. 그냥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병상에 누워 있는 드라큘 백작을 생각하며 입을 삐죽였다.
가족에 대한 정 따위는 없다. 비욤에게 있어 드라큘 백작은 자신의 욕심을 가로막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어이, 살롬. 영감은 어때?”
오래전부터 가문에 봉사해온 집사, 살롬에게 물었다.
백작이 쓰러진 후 백작의 간병은 전부 살롬에게 위임한 상태였다.
관심은커녕 문병을 간 지도 오래. 지금처럼 간간이 백작의 상태를 묻는 게 전부였다.
“여전히 의식불명이십니다.”
“차도는 있어?”
“아쉽게도 없습니다.”
비욤은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으려 과장되게 볼을 문질렀다.
“그거 참 걱정이군. 아버지께서 빨리 일어나셔야 하는데 말이야.”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살롬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겠지? 전염병 말이야.”
지금까지 권력에 취한 만족감은 어디 가고 비욤의 얼굴에 불안감이 맴돌았다.
당장이라도 전염병이 여기까지 침범할까 걱정되는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살롬이 단호하게 말했다.
“요하임 공자님의 보고를 생각해 볼 때 분명 지방에 도는 전염병은 심각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오스프린에 도는 전염병은 그 정도까지의 병은 아닙니다. 예전에 저도 겪어 본 적이 있죠.”
“그래?”
“요하임 공자님을 제거하기 위해 전염병이 도는 마을마다 보낸 게 어쩌다보니 도움이 됐군요. 그 정도로 경험을 쌓았으면 저 정도 질병은 충분히 통제 가능할 겁니다.”
“흥! 쓰레기도 쓸 데가 있다는 법인가.”
요하임이 언급되자 비욤의 기분이 나빠졌다.
“그놈을 굳이 성에 부를 필요 있었어? 그냥 바로 임무에 투입시켜도 됐잖아. 그 놈들이 정말로 전염병을 옮겨 온 거면 어쩔 거야.”
살롬은 내심 한숨을 쉬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전염병이 도는 마을을 계속해서 돌아다닌 둘째 공자를 동정하는 목소리가 조금 있습니다.”
“그런 불충한 무리가 있다고?”
불충이라니.
비욤은 영주 권한 대행일 뿐 아직 영주가 아니다. 무엇보다 요하임 또한 영주의 자식. 그를 동정하는 게 어찌 불충이란 말인가.
하지만 비욤은 그런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리석은 자가 많은 건 사실이나 사람이란 본디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 또한 능력 있는 권력자의 자세입니다.”
“음, 그렇군.”
능력 있는 권력자. 그 말에 비욤의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오스프린에 전염병도 돌아 불안감 때문에 그런 것도 있을 겁니다.”
“고작 그 정도에 불안을 느끼다니. 하여간 겁 많은 것들은….”
붕어 대가리일까. 그렇지 않다면 고작 몇 분 전에 자신이 어떤 꼴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다.
그러나 살롬은 이번에도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영주 권한 대행님께서 이번에 직접 얼굴을 보고 명령을 내리셨으니 저놈들도 할 말은 없을 겁니다. 당분간은 조용조용 불만을 삭이고 살겠죠.”
“뭐, 좋아. 저놈을 성 안으로 들여놓은 이유에 대해서는 내 이해하지. 그런데 저놈이 오스프린의 전염병을 성공적으로 막으면? 그때는 어떻게 할 텐가?”
“공을 세웠으니 어느 정도 포상을 한 후 다시 지방으로 내려 보내면 됩니다. 전염병이 퍼진 마을은 아직 있으니까요.”
“그래, 그렇군.”
비욤이 큭큭댄다. 제정신 박힌 영주라면 깨끗하든 부패하든 자신의 영지에 전염병이 도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러나 비욤은 요하임을 처리할 방법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염병을 기꺼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비욤은 눈치채지 못했다. 시리도록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살롬의 눈빛을.
* * *
살롬은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랗고 화려한 방. 영주성 자체가 백작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크고 화려한 감은 있지만 이 방은 영주성 자체에도 특별했다.
바로 드라큘 영지를 다스리는 백작의 방이었다.
방 중앙에 있는, 방만큼이나 크고 화려한 침대에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그가 바로 드라큘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였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능력으로 영지를 경영하던 그였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병색이 완연한 병자였다.
“잠깐 나가 있도록.”
살롬이 백작의 곁에서 간병을 하고 있던 하녀에게 말했다. 하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방 안엔 백작과 살롬만이 남았다.
살롬은 누워 있는 백작을 내려다봤다. 백작의 힘겹게 숨쉬는 소리만이 조용한 방 안에 존재감을 띄웠다.
살롬이 품 안을 뒤져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따니 안으로 미량의 액체가 출렁이는 게 보였다. 특정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살롬은 병을 백작의 얼굴에 가져갔다. 인중 근처에서 병을 기울였다.
쪼르륵!
인중에 떨어진 액체가 순식간에 기화되며 백작의 코로 흡입됐다.
순간 백작의 얼굴에 붉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백작은 이내 신색을 회복했다.
“…전부 당신의 업보입니다.”
무슨 뜻일까. 살롬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 * *
영주성에서 나온 요하임은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요하임의 측근과 지크 일행도 뒤따랐다.
전염병이 퍼진 곳은 오스프린의 남서쪽 구역이었다. 빈민가와 서민 구역이 모여 있는 그 곳은 병사들이 골목골목을 통제하고 있었다.
“상황은 어떻지?”
요하임이 물었다. 다행히 비욤이 오스프린의 위기에서까지 장난을 쳐놓진 않았는지 병사들은 순순히 요하임의 명령을 들었다.
“병자가 발견된 구역들을 전부 봉쇄하고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습니다!”
“봉쇄된 구역은?”
병사가 지도 하나를 줬다. 오스프린 내부가 모두 표시된 지도였다.
남서 쪽 구역 일부가 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그 곳이 전염병이 퍼져 있는 곳일 것이다.
생각보다 넓지 않다. 요하임의 얼굴에 옅은 안도감이 떴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다. 다시 얼굴을 굳히고 긴장감을 높였다.
“증상은?”
“기침과 발열, 발진, 구토, 식욕감퇴 등이 나타났습니다. 의사 말로는 이그람일 확률이 높답니다.”
이그람. 그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전염병 가운데 하나였다. 적어도 요하임이 마을에서 목격했던 그 치떨리는 전염병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하임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초기 증상만 비슷한 다른 병일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은?”
“어제부로 총 육십 명입니다.”
“언제부터 퍼졌지?”
“정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2주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2주에 육십 명. 1주에 삼십 명 꼴로 죽었다.
보고를 하는 병사의 얼굴에 공포와 절망이 언뜻 엿보였다.
본격적으로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요하임은 희망을 느꼈다.
‘그것밖에 안 죽었나?’
그가 지금껏 보아온 전염병에 비하면 오스프린의 전염병은, 이런 말을 하기 뭐하지만 천사 같았다.
만약 병의 증상이 마을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면 도시 전체를 강제로 비울 생각까지 했었다.
물론 비욤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그가 허락을 내려준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빌어먹을 전염병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하임은 기운을 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 * *
‘젊구먼.’
빛나는 승리를 위해 의욕적으로 움직이는 요하임을 보며, 지크는 늙은이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럼 나도 움직여야 볼까.’
오스프린으로 돌아왔다. 지방 마을에 처박혀 있을 때보다 훨씬 활동의 선택지가 늘어났다.
‘일단 페스트가 있다는 가정 하에 움직인다.’
지크는 환자들의 상태를 눈여겨봤다.
‘평범한 전염병이군.’
평범한 전염병이란 표현이 웃기지만 상대가 페스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껏 그 지독한 전염병들을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심지어 여기서는 완치자까지 나왔다지?’
물론 페스트가 뿌린 병이 감염된 사람들을 전부 죽인 건 아니다.
그러나 페스트의 병을 이겨낸 자들은 하나같이 강대한 힘을 가졌거나, 특정한 약을 처치 받은 사람들뿐이다.
일반인이 적절한 조치를 받았다고 회복했다는 말은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약이 통하는 것도 초반뿐이었고.’
페스트의 존재가 드러나고 그가 뿌린 전염병이 돌아다니자 그에 맞는 약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펼쳐졌다. 그래서 페스트가 초반에 퍼뜨린 병들에 대한 약은 꽤 많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발전하는 건 약만이 아니었다. 페스트의 병도 발전했다.
‘나중에는 정말 약도 없었지.’
정말로 치 떨리는 마인. 그게 바로 전 세계가 페스트를 보는 이미지였다.
때문에 페스트는 많은 마인들 중에서도 최악의 마인으로 손꼽혔다.
그걸 생각하면 적어도 지금 퍼진 병은 분명 페스트답지 않은 병이었다.
지크는 이번 전염병의 증상을 다시 한번 떠올려봤다.
‘정말로 이그람이 맞는 것 같은데?’
페스트가 만든 전염병이 아닌, 옛날부터 꾸준히 돌던 전염병.
‘비유적으로 평볌한 전염병인 게 아니라 정말로 평범한 전염병이었나.’
온갖 변종의 전염병을 다루는 페스트라면 이렇게 기존에 돌던 전염병을 다루는 것도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놈은 이럴 놈이 아닌데?’
더 잔혹한 전염병이 많은데 무슨 이런 평범한 전염병을 뿌린단 말인가.
보통 하지 않던 짓을 하는 경우는 뭔가 꿍꿍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페스트가 품은 꿍꿍이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되는 일일 경우는, 단언컨대 없다.
하지만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잘 이용하면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법.
‘이 꿍꿍이를 파헤치거나 페스트 놈을 죽인 다음 그 공을 요하임에게 돌리면 녀석이 백작위를 잇는데 도움이 되겠지?’
어차피 마인 놈들은 스녹 같은 특별한 케이스가 아닌 이상 만나는 족족 쳐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니 페스트를 조금 더 ‘유용하게’ 사용한다고 해도 나쁘진 않으리라.
‘어차피 도움 안 되는 놈들, 남을 위해 써야지.’
요하임 정도면 공을 넘길 상대로 충분하다. 지금껏 연약한 몸을 이끌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전염병을 막으려 부단히도 애쓴 사람이 그다.
‘문제는 요하임이 공을 넘겨받지 않는다고 할 때인데.’
지금의 요하임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때를 봐 요하임이 진짜 공을 세우게 하거나,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면 된다.
‘그럼 일단 페스트가 어떤 놈인지 특정해야 해. 그래야 계획을 짜기가 쉬워져.’
회귀 전에도 그 정체를 아는 자는 그렌 제너드와 그의 파티 정도다. 그 외에는 그저 단편적인 정보 몇 개가 알음알음 퍼졌을 뿐이었다.
페스트가 개발해둔, 끔찍하고 심각한 전염병이 너무 많아 아예 녀석의 신상 정보 째로 폐기를 했다는 카더라가 있긴 했지만 진상은 모른다.
‘수드 놈처럼 뭔가 거슬리는 느낌이 나는 놈이면 좋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지크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 감이 좋은 지크라도 모든 걸 감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애초에 감은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수단이다.
무엇보다 페스트 같은, 능력 있는 놈들은 그런 낌새를 주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지. 찾을 수 없으면 그 놈이 튀어나오게 만들 수밖에. 마침 좋은 건수도 있으니까.’
지크는 이그람의 치료약을 알고 있다.
회귀 전, 페스트의 전염병이 세계를 들쑤실 때 의사, 마법사, 신관 등등 온갖 지식인들이 전염병을 막으려 힙을 합쳤는데, 그때 해결한 병 중 하나가 이그람이었던 것이다.
‘요하임 녀석이 전염병에 관심이 많아 나도 어깨 너머로 익혀둔 게 여기서 도움이 되네.’
어쩌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요하임이 전염병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치료약이 없을 때니, 내가 치료약을 만든다면 페스트 놈도 관심을 보이겠지. 겸사겸사 요하임에게 신뢰도 얻고 말이야.’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자신이 이그람의 치료법을 알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지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