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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64화 (64/628)

제64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일은요. 그냥 날 밝은 밤에 산책을 하다가 아직 깨어있는 지크 씨를 발견한 것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달이 유달리 크고 밝았다. 밤 산책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달 아래를 걸어보고 싶은 욕구를 느낄 것 같았다.

‘이 녀석이 마인이 되는 이유는 뭘까?’

맞은 편에 앉아 모닥불을 바라보는 요하임을 지크가 관찰했다.

‘단서가 너무 적어. 어쨌든 혈액공포증인 녀석이 ‘피의 지배’라는 권능을 사용하게 될 정도로 커다란 뭔가가 있긴 할 거야.’

“영주님은 괜찮으십니까?”

일단 현재 요하임의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물었다.

“소문을 들으셨나 보군요. 솔직히 좋진 않습니다. 쓰러지신 지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시네요. 그 때문에 걱정이 많습니다.”

아버지를 걱정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적어도 권력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그런 가족관계는 아닌 모양이었다.

‘비욤이란 녀석은 다를 것 같지만.’

“그래서 첫째 공자님이 전권을 잡으신 거군요.”

“장남이시니까요. 당연히 형님께서 잡으셔야죠.”

하지만 씁쓸해하는 말투가 비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 상태를 대변했다.

지크는 그 후로도 요하임의 주변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요하임을 도와주려다 역으로 의심을 받는 건 사양이었다.

여러 대화가 오고갔지만 지크가 얻은 정보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인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추론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영주는 반년 전에 의식을 잃고 쭉 병상에 있다. 그 틈을 타 비욤 드라큘이 권력을 잡았고 요하임과 그를 따르는 세력을 밀어붙이고 있다. 흔하디흔한 스토리지.’

아마 이 세상을 뒤져보면 비슷한 스토리가 적어도 수십 개는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요하임이 백작위를 잇도록 한 번 수작을 부려볼까?’

나쁜 생각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비욤도 엿먹일 수 있게 되잖아?’

지크가 가장 좋아하는 엿먹이는 방법은 희망을 줬다가 뺐는 것이지만, 상대가 원하는 것 혹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부수거나 빼앗는 것도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요하임에게 붙어서 백작위를 잇게 만든다. 그리고 아마도 요하임을 마인으로 만들려 할 그 암살자들의 조직의 정보도 가능하면 빼내면서 조진다.’

지크의 취향에 꼭 맞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러려면 일단 요하임에게 신뢰를 얻어야 했다. 지금처럼 큰 도움을 준 여행자 정도가 아니라, 요하임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까지 조언을 얻을 정도의 신뢰를.

지크는 밤새도록 요하임과 얘기를 나눴다.

본격적으로 요하임의 신뢰를 얻기 위해 움직이려 하자 시간이 아쉬웠다. 오스프린으로 돌아가면 요하임이 또다시 감금될 게 뻔했다.

그러나 지크의 아쉬움은 영주성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인해 사라졌다.

다른 마을에서 전염병이 발생했으니 바로 움직이라는, 개 같은 명령으로 인해서.

* * *

세 번째 마을로 움직인 사람들은, 이제는 아예 몸에 뱄는지 능숙하게 길과 마을을 봉쇄하고 병에 걸린 사람과 걸리지 않은 사람들을 격리 분산시켰다.

그리고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첫 번째 마을도, 두 번째 마을도 그랬으니 이번 마을도 비슷할 거라고 모두 반 쯤 포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대책팀에서도 상당히 많은 희생자가 나온 상황.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지만 병자들과 계속 접촉하는 상황에서 희생자가 없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마력이나 성력을 구사하는 자가 일반인보다 병에 대한 내성이 강하지 않았다면 대책팀도 마을사람들과 함께 몰살당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사람들의 사기는 바닥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병은 달랐다. 병이 악화하는 속도도 느렸고 증상도 심하지 않았다. 예전과는 다른 병 같았다.

또 다른 전염병이 도는 것이니 심각성으로 따지면 한층 더 한 상황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은 오히려 밝았다. 이곳은 첫 번째, 두 번째 마을과는 달리 생존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시간이 지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증상과 병세의 악화 속도는 달랐지만, 결국 치사율은 100%로 수렴했다.

그렇게 세 번째 마을도 사라졌다.

하지만 세 번 일어나는 일은 네 번 일어나기도 하는 법이다. 다른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고, 그들은 다시 이동했다.

오늘도 죽어간 시체들을 옮기고 막사로 돌아온 지크는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상해.’

도는 전염병이 여러 가지인 것도 이상했고 전염력과 치사율은 도가 지나쳤다. 게다가 전염병이 도는 마을들이 붙어 있다면 이런 급격한 유행도 이해를 할 테지만 발병한 마을은 전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이런 일을 조장하고 있는 것처럼.’

그 암살자 놈들의 일도 있는 만큼 지크는 지식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전염병.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금방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놈이 벌써 활동을 시작한 건가?’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며, 오로지 이명만으로 세계를 공포로 떨게 한 존재가 있었다.

그 등장은 어떤 왕국의 수도 하나가 전염병으로 멸망하며 시작됐다. 당시는 세계에 떠도는 혼란으로 여러 나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온갖 곳에서 일어나는 무력 충돌 때문에 전염병도 곧잘 돌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심각한 전염병이 돌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전염병은 곳곳에 퍼져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고, 곧 사람들은 그 전염병을 퍼뜨리는 인위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깨달았을 뿐, 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그런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이다. 사람들은 전염병을 마음대로 부리는 그 존재를 공포를 담아 이렇게 불렀다.

마인 페스트.

‘그렌 제너드에게 죽었다고만 알려졌을 뿐 그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는데. 그놈이 이 시기에는 여기 있었단 말이야?’

확답을 내리기엔 이르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만약 페스트가 여기 있다면, 여기엔 마인이라 불릴 인간이 두 놈이나 있다는 소린데.’

마인 둘. 회귀 전 세상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을 까뒤집고 경기를 일으킬 만큼 공포스러운 울림이다.

‘하여튼 일단 오스프린으로 돌아가야 뭔가 방법이 나오겠어.’

지방에 처박혀 뒤치다꺼리만 하는 이 상황에서는 방법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잠시 요하임의 곁에서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스프린으로 돌아가 수작을 부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페스트가 낄 가능성이 생긴 이상,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했다.

‘만약 페스트가 끼었다면 자연스럽게 오스프린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그리고 며칠 뒤, 지크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마을을 불태우고 할 일이 끝났지만 사람들은 귀환 기대를 거의 내려놓다시피 했다. 이번에도 바로 다른 마을로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귀환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올라오란 명령이.

드라큘 영지의 주도 오스프린.

그곳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 * *

그렇게도 원하던 귀환길이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다.

전염병이 도는 주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른다. 그러나 오스프린에 전염병이 도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지금 도는 전염병은 그 어떤 병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놈들이지 않은가.

당연히 일행의 발걸음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일행의 상당수, 특히 기사나 관리 같은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오스프린에 가족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오스프린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지옥 같은 최악의 상황이 펼쳐져 있진 않았다.

하지만 청명한 하늘 위로 표표히 솟아오르는 불길한 검은 연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요하임은 일행을 이끌고 바로 오스프린으로 들어갔다. 영주성으로 향하며 영주민들의 안색을 면면히 살폈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평시보다 적은 것이 확 티가 났다.

그나마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진한 공포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전염병이 오스프린 전체에 만연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문을 열어라!”

영주성에 도착한 요하임이 소리쳤다.

예전에는 비욤의 명령을 받은 문지기에 의해 영주성 앞에서 발길을 돌렸던 지크 일행이지만, 이번엔 요하임의 손님 자격으로 당당히 영주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상황이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영주성에서는 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군.’

지크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영주성에 들어가 어느 정도 정보를 얻어야 수작을 부려도 부릴 테니까.

아무리 요하임이 이끄는 일행 모두가 영주성의 정문을 통과했다고 해도 전부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요하임은 자신의 최측근 몇 명을 뽑았다. 그리고 지크에게도 동행 해달라 부탁했다.

지크의 해박한 지식과 지혜에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요하임의 신뢰를 얻겠다고 계속해서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요하임을 따라 간 지크는 드디어 비욤이란 놈과 대면할 수 있었다.

‘요하임과는 완전히 반대로 생긴 놈이군.’

키는 크지만 깡마른 걸 넘어 초췌한 요하임과는 달리 비욤은 땅딸막하면서도 굉장히 비대했다

‘형제가 어떻게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를 수 있지?’

공통점이라곤 둘 다 병에 걸린 것처럼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왔습니다. 형님.”

그렇게 말하는 요하임의 말에는 짙은 불만이 어려 있었다.

죽으라고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계속 처박아뒀으니 당연한 감정이었다. 솔직히 저 정도밖에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 것이 대단해보였다.

“어서 와라.”

비욤의 대응도 썩 좋진 않았다. 요하임을 탐탁지 않아 하는 모습이 빤히 보였다.

그러나 살에 파묻혀 작아진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게 많이 불안해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사태는 들었지?”

“오스프린에 전염병이 돈다고요?”

“그래. 역시 네놈들이 마을에서 옮겨온 모양이다.”

기가 막혔다. 저게 전염병이 돈 마을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 올라온 동생에게 할 말이던가.

그러나 익숙한 듯 요하임은 흥분하지 않았다. 이딴 상황에 익숙하단 사실이 지크는 더욱 웃겼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 귀환 시간에 여유를 둔 것 아닙니까? 그 안에 발병한 자는 없었습니다.”

“발병했는데 너희가 숨겨온 걸 수도 있잖아!”

요하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쩔까요? 다시 오스프린에서 멀리 떨어질까요? 이번에는 한 몇 달 머무르고 오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만, 나는 관대하니까 너희에게 너희가 저질렀을지도 모를 죄를 속죄할 기회를 주마. 오스프린에 도는 전염병을 막아라.”

“알겠습니다.”

예상했던 일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이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그들의 귀환을 차일피일 미뤘을 것이다.

‘나름 경력자라는 거군.’

요하임은 자조했다. 단 한 번도 마을을 구하지 못했는데 뭔 놈의 경력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이곳은 드라큘 영지의 주도 오스프린이다. 만약 이곳도 전염병이 퍼진 마을들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된다면 그 희생자의 수는 마을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막아야 해.’

“바로 움직일 테니 지원 부탁드립니다.”

“살롬에게 말해 놓으마.”

비욤의 곁에 있던 노인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말일까. 지원 물자로 계속해서 장난을 친 비욤이니 요하임은 조금 미심쩍게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거뒀다.

‘장소가 오스프린이니 이번엔 함부로 장난 못 치겠지’

요하임은 바로 전염병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방을 나서는 요하임의 뒤로 비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리고 전염병이 끝날 때까지 영주성으로 들어오지 마라. 병이 영주성에 돌아 나까지 병에 걸리면 어쩔 거야.”

“…알겠습니다.”

꽉 쥐어진 주먹에 필사적으로 힘을 빼며 요하임은 씹어먹듯 대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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