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지크와 암살자들의 공방은 치열해 보였다. 세 개의 단검과 한 개의 장검이 계속적으로 교차한다. 검신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주변을 때렸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이는 것뿐, 지크도 암살자들도 그 공방이 치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흐음. 검 놀림이나 움직임에 별 특색은 없네.’
지크는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에 비해 암살자들은 자세를 낮추고 어떻게든 지크의 빈틈을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찾아낸 빈틈 아니, 빈틈이라고 생각한 곳을 공격해도 번번이 막히자 싫어도 현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놀아준다.
지금의 전투를 평가하자면 딱 그걸로 요약할 수 있었다.
당연히 놀아주는 쪽은 지크, 끌려가는 쪽은 암살자들이었다.
전투에서 심하게 여유를 부리는 지크의 모습이 보기 좋은 건 아니었다.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나더라도 방심은 곧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그러나 지크가 아무 생각 없이 놀아주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방금 그가 한 생각처럼, 암살자들의 검술이나 몸놀림을 탐색해 정체를 추론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녀석들의 움직임은 날카롭지만 밋밋했다. 누가 암살자들 아니랄까 봐 몸놀림에서 그 어떤 개성도 보이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면 승부에 약한 암살자들의 특성에다 상대가 지크니까 그런 것. 암살자로서는 충분히 훌륭했다.
‘만만한 조직이 아니군.’
사람의 개성을 이렇게 깎아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
‘역시 붙잡아 물어볼까.’
지크의 검이 변했다. 순식간에 암살자들의 단검을 쳐내며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일단 세 명 다 잡자고.’
얼마 전에 만난 암살자 놈들이 자폭한 걸 떠올렸다. 그때는 암살자 놈들을 전부 붙잡을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차고 넘친다.
‘일단 한 놈.’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을 기절시키려 할 때였다.
놈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폭발이 일었다. 각자 암살자들을 상대하고 있던 한스와 스녹이 깜짝 놀랐다.
자신의 상대를 견제하며 힐끔 폭발이 일어난 곳을 곁눈질했다.
“지, 지크 님?”
스녹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암살자들이 낮은 조소를 흘렸다. 마치 지크가 죽은 건 확정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스녹은 입술을 짓씹었다. 지크가 걱정됐다.
그러나 한스는 아니었다.
후웅!
폭발을 한 번 곁눈질한 게 끝. 그 이후로는 다시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조소를 흘리던 암살자가 화들짝 놀라 검을 막아섰다.
‘지크 님이 저 정도에 죽을 리가.’
그건 지크와 함께한 기간의 차이. 그리고 신뢰의 차이였다.
‘저 정도로 죽을 사람이었으면 백작가가 뒤집어질 일도 없고 내가 끌려올 일도 없었겠지.’
기분 탓일까. 한스의 검로가 좀 거칠어졌다.
화악!
폭발의 여파가 일순간 사라졌다. 일찌감치 몸을 빼 폭발 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암살자들이 흠칫 놀랐다.
한스의 예상대로 폭발이 일어난 중심에 지크가 여유있게 서 있는 게 보였다.
“아티팩트네?”
지크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고가의 아티팩트를 갖고 다니는 암살자. 어디서 많이 본 구도가 아니던가.
“너희구나?”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너무나 반가웠다.
지크가 다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은 양 떼에 뛰어든 호랑이 그 자체였다. 약속은 약속.
지크는 스울에서 목을 날린 암살자 대장과 한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암살자 대장과 같은 조직에 속해 있는 것들을 만나는 족족 그의 곁으로 보내준다는 약속을.
지금껏 버틴 것도 지크가 봐줘서 그랬던 것이다. 지크가 본격적으로 무력을 드러내자 암살자들은 사정없이 밀렸다. 숨겨둔 아티팩트도 아낌없이 썼지만 지크의 검은 그 모든 걸 베어버렸다.
“큭!”
한 암살자의 몸에 긴 검상이 났다. 당장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지만 전투에 참여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일단 한 마리.’
혹시 자살할까 일단 기절부터 시킬 요량으로 녀석의 머리를 향해 칼집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삐이익!
남은 두 암살자 중 한 놈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칫!”
뭔가를 눈치챈 지크가 혀를 찼다. 동시에.
콰아아앙!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폭발이 일었다. 범위는 넓지 않지만 위력은 극강한 폭발.
그 폭발은 암살자들의 육신을 부수고 지크에게까지 영향을 주려 했다.
하지만 지크는 마치 불똥을 털어버리듯 폭발을 빗겨냈다.
‘이래서 서두르려고 했는데.’
스울의 그 암살자들과 같은 녀석이라면 자폭을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생각에 서둘러 잡으려 했지만 실패였다.
‘수준 자체가 예전의 그놈들보다 높았어.’
아무래도 스울의 암살자 대장이, 당시 자신의 부하들을 보고 급히 충원된 수준 낮은 녀석들이라고 한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지크는 등을 돌렸다. 한스와 스녹이 주저앉은 채 눈을 깜박이는 게 보인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있었고 그중 상당수는 꽤 깊어 보였지만 당장 죽을 만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녀석들이 자폭을 할 낌새에 지크가 한스와 스녹이 상대하고 있던 놈들을 우선해서 날려버렸기에 둘은 자폭에 휘말리지 않았다.
“뭐 하냐? 빨리 일어나.”
지크의 말에 두 사람이 후다닥 일어섰다. 둘에게 포션을 하나씩 물린 후 지크는 암살자들이 자폭한 곳을 한번 훑었다.
정보를 빼내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 남았지만 곧 털어버렸다.
어차피 실력을 본다면 그리 고급 정보를 갖고 있는 놈들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것 같거든.’
그런 예감이 들었다.
* * *
야심한 시각. 지크는 꺼져가는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넣어가며 불을 살리고 있었다. 한스와 스녹은 아까 했던 훈련 및 전투가 고단했는지 일찌감치 곯아떨어졌다.
모닥불을 지키는 지크의 모습은 영락없이 소일거리에 몰두하는 할 일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지크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의 대상은 오늘 쓰러뜨린 암살자들.
‘스울에 있는 놈들과 같은 조직인 건 틀림없겠지.’
지크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그놈들이 왜 여기 있었을까?’
스울에서 만났던 놈들을 토대로 추론해 봤다. 당시 스울에 있던 놈들의 목표는 스녹과 노웸이었다.
‘대지의 폭군 노웸을 만들려 했지.’
그게 지크의 추측이었다.
나라 하나를 날려 먹은 노웸이 설마 인공적으로 탄생했을 줄은 몰랐다.
‘노웸 즉, 마인을 만들려 하던 놈들이 여기서는 뭘 할까. 일단 목적이 비슷할 거라고 예상해 본다면….’
이곳에는 요하임이 있다. 후일 ‘마인 뱀파이어’가 되어 ‘마왕 지크 모어’의 측근이 되는 자.
‘마인을 만들려 한 녀석들과 같은 조직의 인간들이 또 다른 마인이 될 녀석 근처에서 얼쩡거려?’
우연일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크는 이 일들에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느꼈다.
‘만약 오늘 처리한 놈들이 정말로 요하임을 마인으로 만들려고 움직이는 놈들이라면….’
그러고 보니 앞으로 얼마 동안 세계에는 온갖 마인들이 튀어나오지 않던가. 그 시대가 ‘마인 시대’라고 이름 붙여질 정도로.
‘설마 뒤에서 마인을 만들고 있는 놈들이 있었어?’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일이다. 세계의 혼란이 누군가 혹은 어떤 조직에 의해 조장됐다는 뜻이니까.
‘물론 모든 마인을 만든 건 아니겠지. 나 같이 자연스럽게 마인이 된 놈들도 어느 정도 있을….’
지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가 마인이 된 이유에 외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애초에 누군가 마인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지 않은가.
스녹이 암살자들에 의해 ‘대지의 폭군 노웸’이 된 것처럼, ‘힘의 마왕 지크 모어’를 만들려 든 놈들이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백작가를 나오자마자 누가 꾸민 것처럼 온갖 사건들이 나한테 일어났지.’
그리고 그 사건들은 착실하게 지크의 마인화를 부추겼다.
‘그저 세상이 혼란스러우니까 운 없게도 많은 위기들이 닥쳤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것들이 누군가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면.
‘…재미있네.’
지금껏 스스로의 의지로 마인이 되고 마왕이 됐으며 세상을 주유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출발선을 누군가가 정해놨을 가능성이 생겼다.
‘일단 침착하자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 열 받는 일은 무수히 많았지만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건 또 처음이었다.
‘이 힘의 마왕 지크 모어를 꼭두각시로 삼은 새끼들이 있을지도 모른단 소리 아냐.’
만약, 정말로 만약 그렇다면….
‘용서할 수 없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을 열 받게 한 나쁜 놈들. 그래서 만나는 족족 지옥으로 보내야 할 놈들. 암살자들의 조직에 관해 그런 인식만을 가지고 있던 지크였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논 빌어먹을 놈들일지도 모르는 조직’으로.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놈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세상에서 반드시 지워버려야 할 놈들이었다.
일단 거기까지 하고 지크는 분노를 삼켰다. 지금 혼자 분에 겨워 씩씩 대 봤자 나오는 건 없다.
평소 감정대로 사는 지크였지만 이런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당연히 대응이 달랐다.
이 분노는 가슴 속에 간직해서 계속적으로 단련할 것이다. 더욱 뜨겁고 더욱 격렬하며 더욱 날카롭게.
‘근데 그놈들이 왜 날 습격했을까?’
분노를 접어두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스울에서 동료 놈들을 조진 걸 아나?’
아까는 가능성이 낮다고 봤지만, 두 집단이 동료라고 가정하면 가능성은 확 올라간다.
하지만 그 가능성에만 매몰되진 않았다.
분명 자신은 스녹을 납치해가던 놈들을 전부 족쳤다. 적어도 그놈들이 조직에 알리진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스녹을 납치하는 걸 우연히 발견하고 쫓아가 족친 터라 자신이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럼 다른 가능성은?’
이곳 드라큘 영지에서 음모를 꾸미는 놈들이 스울에서 본 놈들의 사정을 모르거나 적어도 지크가 스울에서 끼어든 걸 모른다고 가정했을 경우. 그리고 놈들의 목표가 지크의 생각대로 요하임을 마인으로 만드는 것일 경우.
‘내가 변수가 되는 건가?’
도중에 갑자기 끼어들어 요하임을 돕고 있으니, 놈들이 자신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물론 성급하게 확답을 내리지는 않았다. 아직은 가능성 높은 추측일 뿐이다.
‘그럼 일단 요하임 근처에 붙어 있어야겠군.’
녀석들이 요하임을 마인으로 만들 계획이라면 요하임에게 어떤 방향이든 접근을 할 터.
어차피 당분간은 요하임을 도우려 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주무시지 않았군요.”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요하임이 다가와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주무실 시간 아닙니까? 늦게 자면 내일 아침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아침 일찍 일어날 이유가 있습니까?”
요하임이 씁쓸하게 웃었다. 왜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역시 중앙으로 불려가지 못하고 전염병이 돈 마을 근처에 대기나 하고 있어야 하는 본인의 신세가 처량한 모양이었다.
“앞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지크는 맞은편에 앉는 요하임을 쳐다봤다.
역시 동일인인지라 생긴 건 똑같다. 그저 눈앞의 요하임이 더 젊을 뿐.
하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지크는, 돕는 건 당연하지만 요하임을 얼마나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조금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슬슬 답은 나왔다.
‘적어도 마인이 되지 않도록 될 때까지는 돕자고.’
요하임이 회귀 전과 같이 뱀파이어로 불리는 마인이 된다고 해도 지크는 그를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반가운 면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뱀파이어 요하임 드라큘은 어떻게 생각해도 나쁜 놈이다. 그리고 지크는 이번 생에 나쁜 놈들을 쳐 죽이는 착한 일을 한다고 정했다.
그건 지크의 다짐. 상대가 비록 회귀 전 측근인 요하임 드라큘이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둘이 충돌할 가능성은 급격히 높아질 터.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이 녀석도 마인이 안 되게 하는 게 낫겠지.’
지크는 결정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